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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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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


프랑스의 작가 삐에르땅 빠셍이 쓴 작품 중에 '우리의 삶의 날들'이란 제목의 단편이 있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보그라는 마을에, 마음씨 착하기 그지없는 곱추 우그린이 누나 소랑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데다가 어머니는 중증의 알콜 중독자였기에, 누나인 소랑케가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으며 곱추 동생 우그린을 키웠습니다. 어느 날 소랑케는 뜻밖에도 도둑의 누명을 쓴 채 옥살이를 하고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로 소랑케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맹세코 결백했지만 사람들은 믿어 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소랑케는 몸을 팔아 곱추 동생 우그린을 부양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곱추 우그린이 마을로 나갔을 때 마침 그 곳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우그린을 밀어 넘어뜨리고는, 쓰러진 우그린을 발로 차고 밟으면서 창녀의 동생이라 놀려대었습니다. 그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다 똑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곳을 지나가던 그 마을에 수도사 그 장면을 목격하고 무리들에게 호통을 치며 피투성이가 된 우그린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말할 수없이 큰 충격을 받았던 곱추 우그린은 강에 투신하여 자살해 버렸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누나 소랑케는 권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랑케와 우그린 남매의 자살 소식을 접한 신부님은 '이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인간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며, 가슴을 치면서 탄식했습니다. 마침내 장례식 날이 되었습니다. 우그린 남매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마을 사람들 역시, 좋은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모두 장례가 거행되는 마을 예배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장례를 집례 하는 수도사가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소위 기독교인들이여, 이 세상 마지막 심판 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나는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떼들은 어디 있느냐?' 하고 또 물으신다면, 그때 나는 부끄러움과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저들은 양떼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 착하디 착한 곱추 우그린과 마음씨 고운 누나 소랑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 마을 사람들이 수도사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주님의 양떼들로는 더더욱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리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 이리떼들과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살아야 하는 그 수도사의 절망감과 좌절감이 얼마나 컸을런지는 그의 설교를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리떼와 같은 인간들에 대해 절망하고 탄식하는 까닭은 하나―인간은 본래 이리가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코 이리일 수 없는 인간이 하루아침에 이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면 인간사에서 그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과연 그러합니까? 하나님의 법을 유린한 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동생 아벨을 단지 시기심으로 쳐 죽였던 카인이 이리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아내야 어찌 되건 말건 자기 한 목숨 살겠다며 아내를 동생이라 속였다가 그 아내를 빼앗겼었던 아브라함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자기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굽인을 때려 죽였던 모세가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삼촌을 교묘하게 속여 삼촌의 재산을 횡령하여 부정축재했던 야곱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충복의 아내와 몰래 통정하고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아예 충복을 살해해 버렸던 다윗이 이리가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돌로 쳐 죽이던 바울이 이리가 아니었었단 말입니까? 도대체 성경에 나타난 인간 중 본래 이리가 아니었던 자가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함께한 본문 16절에 하나님은 이런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은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는 보통얘기가 아닙니다. 생각할수록 신비한 얘기입니다. 생각할수록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여러분 요3:16절은 만민의 사랑을 받는 구절입니다. 글도 없는 미개한 부족을 찾아간 선교사가 그들의 말을 배우고 글을 만들어서 성경을 번역할 준비가 되면 제일 먼저 번역하는 말씀이 창1장이 아니라 요한복음 3:16절이라고 합니다. 우리 어린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보내면 놀랍게도 가장 먼저 외우는 성경 구절이 요3:16절입니다. 

저도 이 구절을 제일 먼저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성경 중의 성경으로 애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16절의 핵심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누가 누구를 사랑했느냐 하는 것을 깊이 있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 놀라우신 주님께서 높고 높은 곳에 계신 그분이 무가치한 나를 사랑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사랑했다는 이 사실을 제외해 놓고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그분의 풍성한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했던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몇해전에 한 tv 뉴스에서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보여 준적이 있습니다. 학살된 6백만 명의 유태인 중 150만 명이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진행되는 기념식이었습니다.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안경만 가득한 방, 의족만 가득한 방, 여행용 가방만 가득한 방 그리고 머리카락만 가득한 방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자기 삶의 흔적을 남기고 죽어간 것입니다. 불태워 죽였던 현장 바로 너머에 독일군 장군들이 춤을 추며 밥을 먹었던 식당이 불과 십 미터 거리에 있었습니다. 

철학의 대가들과 시대를 풍미했던 지성인들이 특히 많이 나왔던 독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랬던 사람들 속에서 죄책감 없이 다른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죄악된 모습을 함께 발견합니다. 아니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인터넷 게임에 중독돼 생후 3개월 된 친딸을 굶겨 죽인 비정한 부모를 바라보는 찹찹한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불과 며칠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자기 쾌락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면서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노동자들의 하반신이 마비되어도 상관하지 않는 이웃이 있는 세상입니다. 외국인과 결혼한 후 그들의 불리한 신분을 이용해서 폭행하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입니다. 이 땅을 바라볼 때 희망을 둘만한 곳이 없습니다. 어디 한군데 빛을 따라 가면 살 수 있겠다 하는 곳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사건이 바로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 16절 중반절에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주셨다'라는 표현을 보십시요. 우리 한글 성경이 너무나 단순하게 번역을 해놓아서 주고받는다 할 때의 그런 단순한 의미만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주셨다'라는 이 말은 '샤워하다(shower)'라는 표현이 원문의 뜻을 드러내는 데 보다 적절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샤워하면 흔히 몸을 씻는 것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샤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폭우가 쏟아져 내릴 때 바깥에 나가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 때는 비옷이나 우산이 비를 막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온몸이 흠뻑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폭우와 같이 우리에게 쏟아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신을 자녀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움과 감격만을 담아서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단순한 표현에서도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이처럼’이란 도대체 어떤 뜻을 담고 있습니까? 두 가지로 설명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와 같은’ 방법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을 삼는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러나 그 방법 이외에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는 길이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는 ‘이만큼’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는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이처럼" 나를 사랑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이 십자가의 형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손과 발에 녹슨 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시22:14)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놓고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바로 이리 같은 존재, 죄로 범벅이 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고통을 친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 또한 우리를 이만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만날 수가 있고, 십자가의 못 박히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만-큼’의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다시 말해 입으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는 다는 것은, 나를 먼저 이만큼 사랑하신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을 좆아 사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의 말을 듣고 따르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말씀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누려 갈 때, 찢겼던 우리의 심령이 싸맴을 받게 됩니다, 굽었던 생각이 펴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무의미하던 우리의 삶은 영원한 진리와 생명, 그리고 빛의 통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제 우리의 동역자요 믿음의 지도자인 신용태 선교사님이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우리가 아시는 대로 선교사님은 삶에 최선을 다하신 분입니다. 가정적으로도 자녀들 앞에 아내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아버지요, 남편이었고, 교회에서는 언제나 신앙의 본을 보이며 늘 충성하던 믿음의 어른이십니다. 저는 요즈음에 마치 기둥이 하나 빠져나간 것 같은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할 일 많은 사역의 현장에 너무 아쉬움이 많은 분입니다. 당뇨로 인한 합병증 가운데 투병 생활 속에서 자세하나 흩트리지 않으시며 자신에 대해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고통을, 그 아픔을 다 멈추게 하시고 영원한 하늘 처소로 옮기셨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여러분이나 저나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일하는 세상에 출생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세상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일이 끝남은 곧 이 세상에서의 그의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일, 어떤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일인가 함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요 6:27). 이는 육신을 목적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신선교사님은 몸이 아픈 가운데서도 사명을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삶에는 축복의 보상이 따라온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고후서 5장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신선교사님은 오랜 투병생활을 마치고 주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그 분이 남기고 간 복음에 대한 열정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실로암대학이 더 활성화되기를 기도하시고, 또 많은 자원하는 봉사자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보면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의 결과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하심입니다. 여러분, 그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겹겹이 둘러 에워싼다 하여도 우리의 신앙을, 싱싱하고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생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합니다. 하수구에서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아와 싹을 트는 것을 보았습니까? 집채만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이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한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을 보았습니까? 모두가 조건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 흘려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었습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이란, '얼마나 안 넘어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 그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여유가 있습니다. 배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일을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는 절기로 부활절 직전 주일을 제외한 40일간 진행됩니다. 금년에는 부활주일이 4월 4일이라 사순절은 2월 17일부터 4월 3일까지입니다. 사순절은 십자가 신앙을 회복하는 절기로 회개와 경건을 실천하는 기간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영적인 대청소’ 기간이요 ‘신앙의 업그레이드’ 기간입니다. 아무쪼록 사순절 기간 중에 전해 드리는 말씀들을 통해 저도 여러분도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신앙의 성숙을 위해 최선을 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생명의 복음은 생명이자 실재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닭은 닭처럼 살고, 독수리는 독수리처럼 살면 됩니다. 닭이 아무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산다고 해도 독수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됩니다. 여러분, 나이 40이면 인물의 평준화가 이루어져요, (추암에서 보니까 나이 못속입디다.) 50이면 학벌의 평준화, 60이면 건강의 평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세월따라 평준화가 되는데 여기에 무슨 희망을 걸겠습니까? 이 덧없는 인생, 너무 미련두지 말고,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좀 감격 있는 삶!!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우리 예수님께 좀 미쳐보십시다. WEC 선교단체를 창설했던 C.T스타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진정 죽으셨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헌신하고 애쓰는 것이 희생일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교회에 오셨습니까? 지금 우리 앞에서 두 팔을 벌리시고 ‘이-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누리고, 먹고 마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빚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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