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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디메오의 기도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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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메오의 기도 (막 10;46~52)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10;46-52) 

이 시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10장 46절에서 52절 말씀으로, ‘바 디매오의 기도를 합시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에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님의 감동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오늘 설교는 이 본문으로 일 년 전에 청년회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해아래 새것이 어디 있나요? 더구나 설교는 지식이 아니니... 듣고 은혜를 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은혜’가 문제입니다. 오늘 저녁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저녁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본문의 배경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 일행은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냐 하면 종려주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마지막 일주일을 맞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행진을 하면서 여리고를 지나가고   계십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호산나 호산나’ 찬송을 하며 따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머물러서십니다.  행렬이 중단되었고 열 두 사도와 군중들도 발길을 멈추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소경 거지 ‘바 디매오’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리속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절규를 듣고 멈추어 서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의 발길을 붙잡은 사람인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듯입니다. 즉 제 이름도 없는 사람이며,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그리고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는 거지입니다. 이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본문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세가지로 기도에 대해서 교훈을 주십니다. 
 
첫째로, 기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기도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셋째로, 기도는 분명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성경 본문의 말씀을 성령님이 이끄시는 대로 구체적으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첫째로, 기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른 일을 하시다가 그 일을 잠시 멈추시고 우리의 기도를 돌아볼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시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기도나 믿음이 그 하나님의 처음 뜻을 바꾸시거나 취소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 인간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거나 바꾸려고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은 아브라함의 기도로 말미암아 의인 10명만 있으면 뜻을 돌이키시겠다고 까지 하셨습니다. 거기다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조카 롯과, 롯의 처, 두 딸까지 소돔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그들의 죽을 운명이 살 운명으로 바뀐 것이지요.   이런 예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디매오의 기도는 우리들에게 여호수아의 기도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수아는 태양을 향해서, 달을 향해서 말 합니다. ‘멈추어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대로, 그 기도한대로 태양과 달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을 무찌르는 동안 하늘에서 움직이지 않고 멈추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10;14)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거지 맹인 바디매오도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발걸음을  붙잡아서 자기 곁에 머물러 서게 하는 일을 합니다.  이 사람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발휘했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한걸음을 옮기는 그런 때입니다.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은 자기의 죽음을 향한 무거운 발걸음이면서, 인류를 살리는 위대한 발걸음입니다. 이 길을 걷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뒤로 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길을 걷기 위해서 30년을 보내셨고, 또 3년의 공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있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창세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오래 전부터 정해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또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33년의 생애를 한 번도 십자가를 잊으신 적이 없고, 십자가를 행하여 똑바로 걸어오신 분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예수님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소경 거지 ‘바 디매오’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의 외침은 간단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한 인간의 절절한 외침이 우리 가슴에 공감을 일으키지 않나요?  ‘바 디매오’의 이 외침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소경인 이 사람은 공부를 할 수도 없었고, 장사를 할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부자도 아니었기에 살기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구걸(求乞) 말고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 갈 수도 없는 사람이요, 누구 보고 좀 데려가  달라고 할 입장도 못되는 극악한 환경의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막2;4)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바 디매오’는 자기의 손을 붙잡고 예수님에게로 자기를 데려가 줄 한 사람도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있는데  ‘방법’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있는 여리고로 가까이 오셨습니다. 금방 지나가십니다. 이제 가시면 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 길이기에 다시 여리고로 올 일이 없습니다. 바디메오가 알든지 모르든지 이것이 그에게는 마지막기회입니다.    이때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을 합니다.  천에 하나, 만의 하나, 예수님이 자기 가까이 오시면  이렇게  해야지 하고 수백 번, 수천 번을 생각했던   그것을 실천에 옮깁니다. 그것은 바로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바디매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바디매오는 지금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다 키워보셨지요. 아이가 배가 고플 때, 몸이 아플 때, 기저귀에 오줌 똥을 쌌을 때 아이는 웁니다.   우는 아이를 보고 야단치는 부모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라면서 점차 울지 않게 됩니다.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녀가 자라서 부모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잘살고, 평안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들게 삽니다. 가난한 자녀, 없이  사는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지 않습니까? 그래도 부모님에게 ‘좀 도와주세요’하지 않는다면... 이런 자녀는 훌륭한 자녀인가요? 아니면 부모를 서운하게 하는 못된 자녀인가요?  부모의 기쁨은 ‘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달라고 하지 않는 자녀는 자녀가 아니라 ‘남’입니다.   

저도 늦게, 사회생활을 20년은 한 후에 40이 넘어서 신대원에 입학을 했습니다.  한번은 식당을  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추석이 다가왔는데... 부모님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가게가 너무 안 되어서 이번 추석에는 못가 뵌다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좀 해야겠다고, 다음에 찾아 뵙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듣는 부모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인간의 부모도 힘을 다해 자녀를 돕습니다. 힘이 없으면 자녀를 위해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앞에 뿌립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자 이십니다.  힘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구하지 않으면 얼마나 실망하시고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우리는 바디매오가 거지고 맹인이라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인간으로서 다윗의 자손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에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람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이기도 합니다.  항상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기도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여러분, ‘바 디매오’는 포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오시리라, 언젠가 한번은 내 앞을 지나가시리라 그때는 내가 소리 지르리라 누가 뭐라고 하든 소리 지르리라’ 그리고 지금 그는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기합니다. ‘인생 뭐 있나,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합니다. 그래서 매 주 교회는 나오는데도 ‘소리 지르지’않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문제와 함께 살려고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포기하나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포기하나요?  왜  내가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을 해달라고 왜 기도하지 않나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에게 포기(抛棄)란 단지 배추를 셀 때 쓰는 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어떤 사람도 절망할 수 없고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나는 안 되’ 라고 생각하는 사람, ‘나에겐 남아있는 소망이 없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소경 바디메오를 보십시오. 이 사람보다 더 한 사람은 여기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바디메오도 회복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예수 안에서 회복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런 사람은 도저히 안 돼, 저런 인간은 구원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든 간에 결코 절망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들어가면 누구나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가수 태진아 씨의 회심기를 읽어보면, 본명이 조방헌 이더라구요. 그가 예명을 짓게 된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데뷔를 할 당시 최고의 미모의 여배우가 태현실 씨였답니다. 그래서 성을 ‘태’ 자를 썼고 가수로서의 최고의 스타가 남진과 나훈아씨 이어서 그 이름 끝자리를 하나씩 써서 ‘태진아’라는 예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매우 거창한 이름입니다. 소망이 담긴 이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해서 무일푼으로 미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잘 되지 않았는데 미국에서 잘 되리라는 것도 없지요.  어렵게 어렵게 매일을 살다가 아내 이옥경 씨를 만났습니다. 결혼을 해서 주로 부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라스베거스에 가서 도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도박은 마약보다도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완전히 탕진해 버리고 풍요로운 미국에서 끼니걱정을 할 정도로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있는 상황에서 집에만 들어오면  부인이 밤마다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가냐고, 바람났냐고 물었더니 ‘예수바람 났다’면서 밤마다 기도하러 나간다고 했답니다. 

그때 장모님께서 나을 수 없는 병에  걸려서 기도 외에는 나을 길이 없다고 하여 기도하러 나간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본인도 남는 것이 시간이고, 또 궁금해서 교회를 한 번 찾아갔답니다. 처음 갔을 때 불렀던 찬양이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를 듣는데 꼭 자기를 부르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그 찬양 하나에 눈물이 나고 가식이 사라지고 마음이 열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장모님도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갔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태진아씨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가정도 무너지고 도박중독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떨어졌던 사람입니다.  희망을 잃은 사람, 도박에 빠진 사람, 암에 걸린   가족이 있는 사람.  이런 가정에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찾아가셔서 복음으로 변화시키시니까 지금의 모습과 하늘과 땅 차이로 보입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본문의 바디매오처럼 소리 지르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소리 지르는’것은 바디매오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다. 다른 삶을 살고 싶다. 이대로는 싫다.’  이것이 소리 지르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소리 지르면’ 주위사람들이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왜 많은 사람들이 꾸짖나요? 왜 잠잠하라고 합니까? 이 사람들이 뭔데 바디매오의 인생을 간섭하나요?   그냥 그대로 거지요 장님으로 살으라고,  장님으로 살다가 장님으로 죽으라고   하나요?     긴 이야기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면 꼭 훼방꾼이 있습니다.  수요일 저녁, 일손을   멈추고 교회에 나오려고 하면 “그렇게까지 나가야 예수 믿는 거냐”는 소리를 듣습니다.  헌금을 해도 핍박이 있습니다. ‘돈도 없는 것이 교회에 낼 돈이 어디서 나느냐,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웃긴다’느니 하는 말도 듣습니다. 그래서 헌금하고   낙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예수님 앞에 제대로 나가고자 할때에는 핍박과 방해가 늘 있습니다.
  
사실 맹인이 눈뜨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협조는 못할망정 꾸짖고 방해하는 이 사람들은 뭡니까? 그런데 오늘날도 우리에겐 이런 방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들을 ‘무리’라고 표현합니다. 성도여러분, 이 사람들은 사단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만, ‘무리’는 이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주위에 있는 ‘무리’가 되지 말고, 우리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 주위의 사람들은 ‘제자’와   ‘무리’로 나뉩니다. 우리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제자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자는 나를 버리고 예수님을 중심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무리는 자기중심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도 기적을 구경하거나,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즉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정말 기가 막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신 뒤입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시니 ‘무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이제 무리들은 바디매오의 편입니다.  바디매오를 향해 좋은 말로하고 일어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180도로 바뀌는 것이 무리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장을 하실 때도 많은 무리들이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열렬히 반겼습니다.   며칠 후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에게 돌리소서’합니다.  우리는 정말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우리는 ‘무리’의 말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있는 ‘무리’들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머물러서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길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부르라’  성도여러분,    한 사람의 간절한 외침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이렇게 예수님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합시다.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합시다.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는 기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기도,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우리는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시고, 얼마나 마음이  부드러우신지 모릅니다. 그런 예수님의 마음조차 감동시키지 못하는 기도를 우리가 해서야 되겠습니까! 

 셋째로, 기도는 분명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바디매오는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드디어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말씀을 더 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말씀은 좀 어렵습니다. 마치 예수님은 질문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바 디매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실까요?  “아 거참 참 예수님도... 유머가 심하시네요. 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그러시나요?” 라고  바 디매오가  대답하면 될까요?  

이 예수님의 질문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사람의 분명한 의견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다 아시잖아요. 알아서 해주세요’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결혼을 앞둔 남녀가 ‘예수님 아무 남자나(여자나) 적당한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 알아서 해주세요’   이런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예수님이 물으실 때 바 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바 디매오의 이 말을 읽을 때 마다   가슴이 찡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짧은 한마디에 그의 인생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의 눈물, 그의 한, 아픔, 서러움, 배고픔, 미움, 그리고 그의 절망과 희망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 짧은 한 마디 말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잘 보여주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나라면 어떤 대답을 했을 까? 라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바 디매오 처럼 나의 모든 것을 담은 한 마디,    내 인생의 가장 강렬한 염원을 담은 한 마디를 잘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성도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무슨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바 디매오처럼 전심 전력이 담긴 대답을 하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바 디매오의 대답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입니다. 그는 다만 ‘눈을 뜨기만’을 바랬습니다.  그는 로또 복권의 당첨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동산도, 학위도 명예도, 특이한 재주나 능력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충고 할 수 있습니다.  “아- 이 사람아, 당신 지금 눈 만   떠서 뭐할래! 너 아무것도 없잖아.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이잖아,    또   너도, 너의 부모도 지독하게 가난하잖아. 뭔가 다른 것을 구해. 앞으로 살아갈 확실한 뭔가를 구해.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이야. 눈 뜨고 있는 우리도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죽을 맛이야” 하지만 바 디매오는 다만 눈뜨기만을 바랬습니다.  

즉 그는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눈만 뜨면 된다. 눈만 뜨면 나는 무엇을 해도 살아갈 수 있다. 눈만 뜨면 지금 다시 공부해서 글을 깨치고, 자격증도 따고, 눈만 뜨면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바 디매오의 기도는 눈만 뜬다면 남은 인생을 그는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런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히’ 눈 뜨면서 살아온 우리를 참 부끄럽게 하는 말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도 죽겠다 죽겠다 불평하고, 방탕하고, 좌절도 하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기도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첫째로, 기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둘째로, 기도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셋째로, 기도는 분명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붙잡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그런 기도,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하시라 하십니다.  최선을 다해서, 주위 신경 쓰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행동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기도, 내 모든 진정이 담긴 기도,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은 그런 기도제목을 하나님 앞에 내 놓읍시다. 그리고 이 기도만 들어주신다면 나머지는 나의 행동하는 것만 남은 기도, 후회도 뒤돌아보는 것도 없는 멋진 기도를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 디매오의 기도를 배우고 그의 삶을 이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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