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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소리, 궁창의 빛 (시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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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소리, 궁창의 빛 (시 19:1~6)
  

괴테는 죽기 직전에 "나에게 밝은 빛을 다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명성 높은 철학자인 동시에 시인이기도 했던 사람의 유언답게 매우 의미 깊고도 멋진 말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괴테가 그 말을 하게 된 실제 상황을 보면 꼭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방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하인을 불러서 "창문을 열고 좀 더 밝은 빛이 비치게 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그렇게 멋있게 미화되었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입니다.
  
쪽이든지 간에 그것이 괴테의 마지막 말이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고 특히 그가 죽은 날이 바로 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춘분이었기 때문에 어쨌든 그 말이 최소한 자연계의 아름다운 빛을 사모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훌륭한 군주이면서 또한 동시에 시적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역시 자연계의 미(美)와 경이(驚異)를 대하면서 정말 멋진 시들을 썼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시편 19편의 첫 번째 문단입니다.
하지만 그 시는 세상의 시인들의 것과는 달리 정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신자만 부를 수 있으며 똑같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만 공감할 수 있는, 실로 '영감이 넘치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멋진 시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3월의 첫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면서 자연계의 온갖 신묘한 소리들과 아름다운 빛들을 통하여 절로 설레는 기쁨과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는 이 시점에, 저와 여러분은 그런 세상의 온갖 만물들이 이 믿음의 시인(詩人) 다윗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으며 그의 인격을 통하여서 어떻게 감동되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연계의 소리는 '절대자의 존재와 그 주권을 증거해 주는' 아름다운 창조계시입니다.

1절부터 4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a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우주의 자연계가 내는 '소리'를 어떤 마음으로 듣고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 결과 어떻게 감상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에서 그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바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 손으로 하신 일"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일 두 가지 중에 하나인 '창조사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다윗은 이 천체와 우주 공간이 운행되고 있는 소리가 바로 '하나님의 자존'과 그 위대하신 '절대주권'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있다고, 즉 이 자연계가 내고 있는 각종 소리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메시지라고 이해하며 감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자연계의 소리는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는" 소리로 다윗의 귀에 들렸습니다.
여기서 '말하다'라는 것은 '쏟다, 끓어오르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자연계시가 들려주는 소리는 마치 '샘이 물을 펑펑 솟구쳐 내듯이' 풍성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라는 표현은 낮과 밤이 그 "지식을 전하는" 사명을 매일같이 교대 근무를 하면서 쉬지 않고 수행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마치 두 찬양대가 서로 화답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노래는 것과 같았습니다.
어떤 하루의 낮이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우렁찬 소리를 내고 끝나면 곧 이어지는 밤 역시 하나님을 증거해 주는 오묘한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한 노래의 마디마디가 이어지고 1절과 2, 3, 4절로 연이어져서 연주되는 음악 같이 다윗의 귀에 들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한다"고 감탄했습니다.
물론 그 우주의 소리라는 것은 육신의 귀로 들을 때에는 그저 고요와 적막뿐이며 사람처럼 입에서 내는 언어는 전혀 없지만, 다윗처럼 영의 귀로 들을 때에는 '온 땅에 다 들릴' 정도로 뚜렷하고도 깊고도 충만한 소리였던 것입니다. 
  
사이먼과 가팽클이라는 듀엣 가수의 대표곡으로서 'Sound of Silence'(침묵의 소리)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 그 '침묵의 소리'라는 것은 '아무 말이 없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는 없으면서도 그 무언가 중요한 의미는 더욱 강렬하게 전달하는 특별한 소리'를 뜻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언어가 없고 소리도 없으나 온 땅에 통하는 소리'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이 전 우주와 자연계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는 다른 특별한 소리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온 세상 만민에게 뚜렷하게 알려 주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구절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는 말에서 더욱 강조됩니다.
여기서 "그 말씀"이라고 번역된 부분은 직역하면 '그들의 말들' 즉 바로 앞에 나오는 '자연계의 소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궁극적으로는 곧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인 까닭에 "말씀"이라고 의역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비록 인간이 발하는 가청(可聽)적인 언어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찬양하는 우주의 소리는 이처럼 온 세계 땅 끝까지 충만하게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소리를 이렇게 깨닫고 감상하던 다윗이었으니 그의 영적 귀에는 그 소리가 그 얼마나 감동적인 음악이며 그 얼마나 웅장한 우주의 합주곡이었겠습니까?
그는 날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함께 찬양했고, 밤마다 그런 우주의 선율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실히 공감했던 것이며, 그런 멋진 영적 음악 연주와 감상은 다윗에게 어느 날에서 다음 날로, 어느 밤에서 다음 밤으로 매일 연이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가족이 미국에 살고 제 아들 영은이가 어렸을 적, 아마 한 서너 살 때 즈음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언젠가 영은이와 함께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거쳐서 어디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 구간 중간에 톨게이트를 하나 만나게 되었는데, 그런 곳에 접근하는 지점에는 차량 속도를 줄여야 할 것을 운전자들에게 상기시켜주기 위해서 도로 바닥에 촘촘한 간격으로 홈을 파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타이어가 그 노면을 지나갈 때 '드르럭 드르럭'하는 소리를 내게 되고, 혹시 졸고 있던 운전자도 바로 그 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속도를 줄이면서 톨게이트에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차가 바로 그런 노면을 지나면서 타이어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는데, 그때 갑자기 영은이가 제게 "아빠, 지금 차 슬슬 가라고 '슬, 슬'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말을 어슬프게 배우던 때라 아직까지는 '천천히 간다.'는 표현을 할 줄 모르고 그 대신에 '슬슬 간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또 바퀴에서 나는 그 소리도 통상 우리 어른들의 귀에는 '드르럭 드르럭' 혹은 '부욱 부욱' 이런 식으로 들리는 것이지만 영은이의 귀에는 그 소리가 '슬슬'로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노면을 지날 때에 그처럼 '슬슬'이라는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놓은 이유는 '차가 슬슬 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제딴에는 아주 논리적인 추론을 해낸 것처럼, 무슨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 소리에 대한 의성어를 '슬슬'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은이 한 사람뿐일 것이며, 더구나 그 소리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해석한 사람은 정말이지 영은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런 소리를 감상하는 차이와 수준은 물론 음악 세계에서 가장 뚜렷이 구별됩니다.
자동차 타이어와 노면 사이에서 나는 소리를 그렇게 특이하게 들었던 영은이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즈음부터 재즈를 즐겨 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 영은이의 아버지인 저는 음악 분야에 있어서 팝송도 클래식도 우리나라 전통음악까지도 두루 즐기지만 딱 한 분야, 이 재즈만은 별로 잘 이해할 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재즈는 가장 '철학적인 음악'이라는 말도 있고 또 재즈를 즐기시는 분들은 재즈를 모르면 아예 음악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된 것인지 제 귀가 재즈 음악에는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 아들은 재즈 음악을 스스로 작곡하고 연주 녹음테이프까지 만든 정도인데 저는 그 분야에만큼은 감감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소리라는 것은 그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소리로, 즉 소리의 색깔뿐 아니라 때로는 그 소리의 의미까지 아주 다르게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이라야 그 타이어 긁히는 소리가 '슬슬 가라는 소리'로 들릴 수 있으며, 귀에 들리는 멜로디의 이면에 내포되어 있는 철학까지 이해할 수 있어야 그 소리 또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 자연계의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음악 이해'요 가장 즐거운 '음악 감상'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어린이가 순진한 마음으로 소리를 들어도 우주의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 살아 계심의 계시를 듣는 청결한 마음에는 비할 수 없고, 아무리 재즈가 철학적이라 해도 이런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깨닫고 만나고 이해하고 고백하는 영적 심오함에는 견줄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오늘까지, 그리고 주님 재림 때까지 우리가 사는 이 시공계에서 끊임없이 연주될 이 자연계시의 아름답고도 깊은 연주의 소리를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살아 계신 절대주권자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연계의 빛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명백한 일반계시입니다. 

4절 하반절부터 6절에 "4b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그 하나님의 창조물들 중에 해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해는 온갖 만물 중에도 모든 사람의 눈에 가장 돋보이는 것인데, 다윗은 그것을 아주 특별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우선 4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해 자체만을 높게 보고 사람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절대적인 존재처럼 숭상했지만, 다윗은 '그 태양이 위치하는 공간과 운행하는 길을 바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다'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이 우러러보고 대단하게 여기는 태양, 사람이 감히 거스르거나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처럼 숭상하는 태양을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라고 한 것은 실로 그 어떤 시구보다 멋있는 말이 아닙니까?

해가 그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었을 때, 시인 다윗의 눈에 그 해는 어떻게 보였습니까?
이어지는 5절에 보면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려가는 장사 같다"고 했습니다.
'신방에서 나오는 새 신랑'이란 그야말로 웃음꽃이 함박 핀, 행복으로 가득 차서 그 얼굴이 빛나는 사람입니다.
'그 길을 달려가는 장사'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힘찬 발걸음으로 줄기차게 달음질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해도 매일 아침마다 바로 그처럼 '기쁨에 찬 밝은 빛을 발하면서' 떠올라서 하늘을 가로질러 '동에서 서로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고, 정말 멋있게 노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절에서는, 해가 그렇게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줄기차게 운행할 때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태양의 빛이 전 세상을 조명해 주고 그 열기가 모든 동식물에게 온기를 유지시켜 줍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처럼 햇빛과 햇볕의 '영향력'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태양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연계시' 역시 모든 사람에게 다 전달되고 있으며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다윗은 실로 의미심장하면서도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읊고 있는 것입니다.

해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동경의 대상 내지는 숭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사회에서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만물들 중에서 태양이야말로 대표적인 경이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이 뜨면 온 세상이 밝은 빛으로 가득 차는 낮이 되고, 그 내는 열에 따라서 사시사철의 온도와 기후가 바뀌고, 그 정확한 운행에 따라서 역사의 일자와 연도가 결정되고 있었으니, 살아 계신 창조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가히 신처럼 여겨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태양 자체를 신으로 섬기기도 했지만, 제왕들이 자신의 권위를 신격화할 때에도 바로 이 태양을 사용했습니다.
태양의 높은 위치, 그 불변성, 그 무한한 에너지, 이런 것들이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상징이 되었고 그것은 사람들의 경외심을 유발시키기에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파라오 같은 군주들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소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해에 대한 그런 경외심은 현대에 와서도 비록 숭상은 아닐지라도 어떤 막연한 동경심이나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싶어 하는 심정으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 감정을 잘 나타내어주는 대표적인 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박두진 씨의 '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저도 한때 아주 애송(愛誦)했던, 또 사실상 정말 아름다운 시이기도 합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싫어… /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라는 시입니다.

"해야 솟아라"라는 반복구절을 통하여, 이 시인은 삶에 있어서 부정적이며 괴로운 부분인 '어둠'을 그 해가 살라 먹어 버리고, '눈물과 고독'이 있는 '달밤' 같은 시간은 자기 인생에서 사라져 버리게 되기를 염원합니다.
그래서 '청산'과 같은 이상향에 모든 사람뿐 아니라 모든 자연의 생명체들이 다 한자리에 모여서 '애띠고 고운 날' 즉 모든 갈등이 다 해소되고 완벽한 화합과 행복의 날을 누리고 싶다는 노래인 것입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이 시를 읽었던 시집에서 "한 인간이 노래할 수 있는 최고를 노래했다."라고, 즉 우리나라 서정시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극찬하는 시평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또한 박두진 씨 본인도 "나는 저 뜨겁고 영원하고 절대하고 성숙한 우주의 한 중심체인 '해'를 그 이외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이 '해'야말로 가장 으뜸가고 가장 적절 정확하고 가장 훌륭하고 유일한 이미지의 시적 실체요, 활력이라고 믿었던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지성인들이 해를 가리켜 사람의 어떤 이상향을 대표해 주는 최고의 실체로, 우주전체의 조화를 상징해 주는 최고의 중심체라고 입을 모으는 것만 보아도, 해는 여전히, 비록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 버금가는 동경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하지만 박두진 씨가 노래한 '해'와 여기서 다윗이 노래하고 있는 '해'는 그 얼마나 다릅니까?
전자는 '해' 그 자체를 찬양했지만 후자는 해를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전자는 해 그 자체에 어떤 희망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후자는 해를 통하여 우리에게 증거되는 창조주의 계시를 발견한 감격에 벅차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문학계에서는 박두진 씨의 '해'가 무슨 서정시의 한 극치로 여겨질지 몰라도 적어도 이 다윗의 시에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마음에서는 그 박두진 씨의 '해'가 '인간이 노래할 수 있는 최고를 노래했다'고 칭찬받을지 몰라도, 그 정도의 시적 수준이나 시적 감흥은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위대하심을 공감할 줄 아는 신자의 영적 수준과 감흥을 따라오기에는 까마득히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해가 온 세상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연계시는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뚜렷하고도 아름답게 조명되고 있다.'는 다윗의 노래는 곧 '자연계시의 일반성'을 강조합니다.
바로 그 점을 두고 로마서 1장 20절에서도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과 신성(神性)이란 원래는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지만 그것이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한 자연계시로 나타나게 됨으로써 이제는 '아무도 핑계치 못할' 일반적인 진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해를 볼 때에 그 '해를 위하여 장막을 베푸신 하나님'은 당연히 해보다 더 높고 위대하심을 깨닫고, 햇빛의 밝음과 햇볕의 따뜻함을 느낄 때에 그 태양광으로도 견줄 수 없는 훨씬 더 밝은 영광으로 빛나고 계시며 그 6천도의 열기로도 비교조차 안 될 따뜻한 사랑을 무한정으로 베풀어 주시는 이 창조주 하나님을, 해뿐 아니라 모든 자연과 우주만물을 볼 때마다 깨닫고 느끼고 찬양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어릴 적부터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어쩌다 가족 여행을 하게 될 때면, 아버지께서 운전대를 잡고서도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시면서 계속 혼자서 찬송을 흥얼거리시다가 느닷없이 "느거들은 이런 멋진 자연계를 보면서도 우째 무슨 감흥이 없노?"라고 우리 형제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시는 말씀을 흔히 듣곤 했습니다.
  
그것은 요즘도 역시 아주 드물게 어쩌다 한번 아버지를 모시고 바깥에 운동을 하러 나가게 될 때 날씨가 화창하고 계절이 아름다운 때라면 거의 어김없이 듣게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도 그 '무슨 감흥'이라는 것은 아버지 못지않게 충만히 느끼고 있습니다.
단지 원로목사님은 그것을 그 순간 즉시 밖으로 표현하실 뿐이고 저는 그저 속으로만 마음껏 음미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문학 작가이며 독실한 신자인 루이스(C. S. Lewis) 씨는 이 시편 19편을 가리켜 "나는 이것을 시편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서정시(抒情詩)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실로 이런 시편은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시이지만, 같은 기독신자들 사이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언어와 인종과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똑같이 가슴이 터질 듯 뜨겁게 공감될 수밖에 없는 '성령 영감의 명시(名詩)'입니다.
세상의 시인들은 그냥 '해'를 찬미할 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 해를 만드신 '창조주'께 영광을 돌릴 줄 알고, 세상의 철학자들은 그 자연계의 '빛'만을 사모할 때에 우리 성도들은 그 자연계를 통하여 명백히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무한하신 절대주권' 앞에 엎드려 경배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시'만으로도 이처럼 '하나님의 자존하심과 창조 능력'이 충만히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계시의 완성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이라는 '특별계시'가 주어졌으며 이것은 당연히 자연계시보다는 우위에 있습니다.
  
오늘 나눈 본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7절의 첫 마디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연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분'만을 보여 주지만 성경계시는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뿐 아니라 구원 얻기 위하여 깨닫고 믿어야 모든 것까지도 다 알려 주기 때문에 '완전한 계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계시의 완성이요 정점이 되는 것이 바로 '화육강세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처럼 '계시의 최절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고 믿게' 된 기독신자라면 성경의 계시는 구구절절 절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이 자연의 계시를 보고 감동 받게 되는 것이란 그야말로 '기본'이요 '자동'이 될 수밖에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너희들은 이런 멋진 자연계를 보면서도 무슨 감흥이 없나?"라고 하시는 원로목사님의 말씀은 바로 '예수를 정말 제대로 믿고 있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자연 계시를 볼 때마다 이 시편 19편과 같은 영적 감흥이 솟구쳐 오르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는 이 멋진 계절에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의 소리'를 통하여 '창조주의 솜씨'를 노래하는 것을 듣고 '하늘의 별과 울려 퍼지는 뇌성'을 통하여 '우주에 가득 찬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함께 찬양드림으로써 실로 자연계시를 통하여서도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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