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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응답 받는 기도 (눅 1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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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 받는 기도 (눅 11:5~13)
  

우리 교회는 3월 14일부터 4월 3일까지 ‘봄철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미리 생활계획에 참조하셔서 한 분도 빠짐없이 이 특별한 영적 축제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아도 먹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기도하는 사람만 살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다 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도 살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만 그 삶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섬세한 간섭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함께 가정생활을 할 때, 부부간에 서로 살뜰한 사랑을 느끼면서 생활하는 것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남편은 돈 버는 사람 아내는 살림살이 하는 사람으로 그렇게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할까요?
물으나 마나 백년 천년 부부간에 서로 살뜰한 사랑을 느끼면서 생활하는 것이 행복하겠지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섬세한 사랑으로 이끌어가는 그리스도인이 있고요, 또 그 관계를 있는 둥 없는 둥 무덤덤하게 이끌어가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기도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눈물 기도’라는 짧은 글이 있어 들어가는 말로 소개합니다.

“기도를 마치고도 한참을 우는 진석이에게/ 왜 우느냐고 물으면,/ 하나님이 좋아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다시 울었다.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은석이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엄마 왜 울어? 그만 우세요.” 하며/ 엉엉 우는 바람에, 우리는 그만 웃어버렸다.” -최에스더 사모의 ‘성경 먹이는 엄마’ 중에서-

‘하나님이 좋아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 마음 알 것 같아서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다시 울었다.’라는 표현이 좋습니다.기도를 통하여 비로소 우리는 참 좋으신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면 제일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응답받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 ‘어떻게 기도를 드리면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시고 본문의 두 가지 비유를 통하여 기도의 응답을 받은 비결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저가 지어낸 말이라면 한번 듣고 그냥 귓전으로 흘려보내도 되겠지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니까 귀담아들으시고 기도하는 순간순간마다 마음에 떠올리십시오.
기도 응답을 받자면 거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사람 편에서 해야 할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편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 편에서는 끈질긴 강청함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편에서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주셔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이 본문에 있습니다. 
본문 눅11:5-8절의 ‘한밤중의 친구 비유’는 강청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분문 눅11:11-13절의 ‘구하는 아들과 주는 아버지 비유’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한밤중의 친구 비유(눅11:5-8)

이 비유의 핵심은 강청함에 있습니다. 
비유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5절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어리를 내게 꾸어 달라.” 
‘떡 세 덩어리’란 아주 하찮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라도, 아무리 시시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일상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6절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공동번역에서는 ‘내 친구 하나가 먼 길을 가다가 우리 집에 들렀는데 내어 놓을 것이 있어야지’라고 번역했습니다. 

듣고 보니 아주 사정이 딱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묻습니다. 
그렇다면 “…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없노라 하겠느냐?”(7절)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 형식을 ‘수사의문문’이라고 합니다. 
즉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상되는 답변은 ‘결코 그렇지 않지요! 일어나 줘야 마땅하지요. 그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게 친구입니까? 아니 그게 사람입니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벗이라면 빵 세 덩어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사정 또한 딱한데 그냥 잠자리에 누워 있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저희 집에 밤 1시쯤 손님이 왔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손님은 저녁식사를 한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저녁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쌀이 그만 똑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저가 급하게 쌀을 구하러 여러분의 집에 가면 쌀을 안 꿔주겠습니까? 
쌀 한 됫박 많지도 않은데, 사정도 안됐는데, 모른 체하고 잠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성도는 그만두고, 사람도 아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친구는 8절에 보면,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지 아니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의 말씀을 듣던 청중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 그렇게 의리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의리가 없는 사람도, 이런 상식을 벗어난 사람도 강청할 때에는 꼼짝없이 빌려줬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강청’이란 말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공동번역에서는 ‘귀찮게 졸라대면’, ‘NEB’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으로 번역했습니다. 

귀찮게 졸라대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매어달릴 때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귀찮게 졸라대서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얍복 강가의 야곱입니다. 
창 32:26절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얼마나 귀찮게 졸라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응답 받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염치불구하고 기도해서 응답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한나입니다. 

생산할 수 없는 여인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삼상1:10-11) 
이 한나의 기도가 얼마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간절한 기도였든지 그 모습을 보고 엘리제사장이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삼상1:14절 )고 핀잔을 줬습니다.
한나는 누가 보든지 말든지, 창피하든지 말든지, 욕을 하든지 말든지, 부끄러움을 모르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한나의 기도도 응답받습니다.

왜 강청하면 안 들어줄 수 없습니까?(질문)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안 들어주면 밤새도록 문을 두드릴 테니까…. 
눅 18:1-6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우습게 아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애원합니다. 
처음에는 이 불의한 재판관은 본 척,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끈질기게 매달리니까 재판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눅18:5절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안 들어 주면 못 배기기 때문에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끈질기게, 악착같이 매어달리라는 것입니다.
버저 비터(buzzer beat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농구에서 마지막 버저와 함께 터지는 극적인 골을 말합니다. 
버저가 울리는 순간 공이 선수의 손을 떠나 있으면 득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 슛으로 역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긴 팀은 그야말로 짜릿한 감동을 느끼지요?
선수들을 풀로어에서 펄쩍펄쩍 뜁니다.
이 버저비터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지막 1초까지 끈질기게 악착같이 매어달리는 데에 있습니다.
기도에도 버저비터가 있습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악착같이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응답의 비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끈질기게 악착같이 매어달려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게을러서 기도하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상황이 절박하지 않아 대충 기도를 끝내고 마는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하다가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악착같이 매달리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실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실까?’ 
이런 의심이 말끔히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생활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구하는 아들과 주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2. 구하는 아들과 주는 아버지의 비유(눅11:11-13)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라는 흔들림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신반의 하는 기도는 저 같아도 안 들어줄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빠, 안 사줄 거지요?”, “아빠, 안 가실거지요?’ 이렇게 물어오면, 어떤 대답이 나가겠습니까?
“안 사줄 줄 알면서 왜 사달라는 거야?”하고 안 들어주게 됩니다. 
의심하면서 요구하면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1:6-7절)

본문을 봅니다. 

11-12절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이 본문 역시 수사의문문입니다. 
이 질문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요.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식에게 그런 것을 주겠습니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이 말씀은 상식이고 또한 진리입니다. 
도둑도 자기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도둑이 물건을 훔쳤는데 진짜는 하나도 없고, 다 가짜였습니다.(imitation)
도둑이 화가 나서 도둑질 한 집에 전화를 걸어 “진짜를 좀 가지고 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도둑의 전화를 받은 주부가 이런 악담을 했습니다.
“이 도둑놈아, 네 자식도 도둑질해 먹고 살아라.”
이 말에 분개한 도둑이 그 집 딸을 납치하여 얼굴에 문신을 새겨서 그 인생을 망가뜨린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도둑이지만 그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13절의 ‘하물며’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간직하십시오.
‘하물며’라는 단어가 기도를 강조하는 말씀에 종종 등장합니다.
마7:11절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눅18: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기 않겠느냐” 
여기에 날카로운 비교와 점진적인 대조가 있습니다. 

‘악한 인간이 좋은 것을 준다면, 하물며 선한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을 것을 주시려고 준비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응답하기 싫어하여 우리의 손을 뿌리치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셔서 기도하는 우리의 손을 덥썩 잡아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렘 29:11-13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기도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Gendenhuys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기도응답에 대한 불신은 단순히 신앙인의 하나의 약점이 아니라 심각한 죄악이며 전적인 어리석음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좋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왜 자꾸만 의심하게 되는지 많은 것을 생각해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기도 응답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기도응답의 여부를 체크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수첩을 만들어 기도응답을 체크해보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응답의 여부를 체크해보면 많은 유익을 얻게 됩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

1) 우리 자신의 영적 건망증이 치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건만 우리는 그 은혜를 모르고 지나칩니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3)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알게 됩니다. 
4) 이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성장해갑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끈질기게, 악착같이 매어달리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많이 아는 것보다도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번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시발점으로 멋진 기도인생을 시작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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