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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택함 받음의 복 (엡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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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함 받음의 복 (엡 1:3~6)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 예정하사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사람들이 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복은 눈에 보이는 복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복은 말 그대로 만져지고 보이는 복들입니다. 물질적이고 이생적이고 양적인 땅의 복을 말합니다. 땅의 복은 한결같이 화려합니다. 높고 많고 귀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복의 공통점은 지극히 일시적이고 변하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화려함이 있는 동시에 유한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은 사랑, 희망, 소망, 은혜, 부르심, 자녀됨, 죄 사함 받음, 구원받음의 복들입니다. 겉에서 볼 때 화려함은 없으나 영원하고 소중한 것들입니다. 집 없이는 살 수 있지만 소망 없이는 살 수는 없습니다. 출세 없이도 살 수는 있지만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복은 모두 “예수 안에서“ 주어집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신학의 중심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복은 한결같이 영원한 복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 복을 가리켜서 “신령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복 중 하이라이트는 4절에서 말씀하는 “우리를 택하심의 복”입니다. 그것도 이미 창세전에 택함 받았습니다. 그 선택은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예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정은 “프로오리사스”(proolisas)라는 말인데 ”미리 정했다“는 뜻입니다. 

왜 선택하셨는가 하면 그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4절에서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뜻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기 때문에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거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영적인 순결을 지키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6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들과 모든 생명체에게 이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산속의 초목들을 보십시오. 누가 보지 않아도 산속에서 아름다움을 발휘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사람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고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예정하셨고 부르셨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선택받음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선택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선택의 교리가 많이 나옵니다. 그것을 예정론에서는 “예정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면 오해가 발생하게 됩니다. 예정론을 말할 때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였다”고 설명하는데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고 또 누구를 멸망시키시기로 예정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정론은 신학자 존 칼빈에게서 기인하였다고 하는데 존 칼빈이 지옥 갈 사람과 천국에 갈 사람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잘못된 이해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질문하기를 “그러면 전도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다 예정되어 있는데 무엇 하러 전도를 합니까”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전도하는 것도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전도해야 할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누가 예정된 사람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예정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정”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방인들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 은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고 영광일 뿐입니다. 그것도 만세전에 우리를 아시고 구원하여 주셨다고 하니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 같은 깊은 선택의 교리를 생각하면 몇 가지 주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감격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구원받고 뽑힘을 받았습니다. 영광이고 감격적인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유능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택함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선택받음입니다. 감격적인 일입니다. “왜 나를 구원하셨습니까” 거기에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나를 은혜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택받음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 마음에 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은 감격의 삶입니다. 

나를 부르신 이유는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고 또 하나님께 영광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는 영광의 존재이고 은혜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큰 꿈을 심어 주셨습니다. 나는 땅을 밟고 살아가는 미약한 존재지만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주목하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꿈이 얼마나 큰 꿈입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꿈이 때로 큰 기적을 일구기도 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느 사극 드라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사극에 덕만공주가 나옵니다. 이 공주가 장차 신라의 왕이 되어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꿈을 가집니다. 남자들이 볼 때 그 꿈은 가당치 않은 꿈입니다. 그래서 원로 중에 문노라는 원로가 덕만공주에게 여자로서 어떻게 신라의 왕이 되며 더구나 통일왕국을 이루겠다는 것이냐고 따집니다. 그러자 덕만공주가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으로 하느냐 하면 꿈으로 할 것입니다, 내 백성들에게 꿈을 꾸게 하고 내 백성들 마음에 희망의 불을 질러 희망이 불타게 함으로 이룰 것입니다.” 이정도면 게임은 끝난 것입니다. 그 가슴속에 불타는 꿈이 있는데 누가 그를 말릴 수 있습니까. 

우리 신앙인은 내 가슴에 이 꿈이 불타야 합니다. 그 불의 근원은 내가 주님을 만났다는 그 감격의 불입니다. 거기서 내 가슴에 희망의 불이, 복음의 불이, 소명의 불이, 가능의 불이 타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그 조그만 가슴속에 그 불이 타 올랐습니다. 로마를 복음으로 불을 지르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허황된 꿈이 아니고 하늘이 준 꿈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이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감격 없는 신앙, 그 마음에 희망도, 타오르는 불도 없으면 무감한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선택하셨고 나를 뽑으셔서 구원하셨다”는 이 선택받음에서 이 감격이 솟아나옵니다. 


100% 은혜체험 

신앙생활은 저 깊은 영적 세계를 하나씩 깨닫고 알아가는 생활입니다. 나는 무지한 존재이고 하나님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 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내가 뽑히고 내가 선택받았습니다. 내가 부름 받고 택함 받는 일에 내가 한 일은 전무합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를 부르셨고 선택하셨고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자랑할 것도 없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은 교만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내가 스스로 구원받고 내 힘으로 뭘 하고 내 재주로 뭘 했다는 등식이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신앙의 삶에서 좀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는 할 말이 전무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말이 많은 것은 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뭐 할 말이 있겠습니까. 

빌리 그래함의 예화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구리들이 연못에서 한가로이 있을 때 백조 떼가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모두 부럽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개구리 한 마리는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하늘을 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나뭇가지를 물고 백조가 나뭇가지를 잡고 날면 되겠다 싶어 그렇게 해서 하늘 높이 날았습니다. 그러자 연못의 개구리들이 누구 아이디어냐 하고 야단입니다. 개구리는 나뭇가지를 물고 있어 말은 못하고 마음속에서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참다못해 “내가 했지”했습니다. 그리고 개구리는 떨어져 척추가 부러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자기를 나타내는 말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천지창조 순서에서 인간을 맨 마지막에 창조하셨는데 그 이유가 두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 대한 특대우입니다. 다 마련하시고 인간을 태어나게 하셔서 불편 없게 하셨으니 특대우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위험을 고려하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간을 첫째로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을 따라다니며 “이렇게 해 주세요, 저렇게 해 주세요”하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발생하였겠습니까. 나중에 “나도 창조를 같이 했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 예가 기드온 300명 용사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기드온 300명 용사라고 쉽게 말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도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 미디안 군이 쳐 들어왔습니다. 그 수가 메뚜기같이 많았습니다(삿 7:12). 기드온이 싸울 자를 소집하니 32,000명이 모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람 수가 많으니 두려운 자를 돌려보내라 하셔서 2만 2천명을 돌려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많으니 준비되지 않은 자를 돌려보내라 하셔서 보내니 300명이 남았습니다. 상대방은 메뚜기처럼 많습니다. 그런데 이 300명이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드온 300명 용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300명이 뭘 했습니까. 그 300명을 단합시켜 싸웠어도 열세인데 하나님은 그 300명을 세 떼로 나누라고 하십니다. 100명씩 세 떼로 나누어 세 지역에 매복시켰습니다. 나팔을 불면 일제히 횃불을 들고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트리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적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서 전쟁에서 이겼다고 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300명이 모여 소리를 질러도 보잘 것 없는데 세 떼로 나누어 소리를 질렀더니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는 이런 아이들 장난 같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질문이 하나 나옵니다. “이 전쟁은 누가 하였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이 사사기 7장2절에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라.” 만일 2만 명 3만 명이 싸워서 전쟁에서 이겼다면 사람들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싸워서 이겼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시키시고 자녀 삼으시고 선택하신 일에 내 가 한 일은 전무합니다. 모두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감 

이 믿음이 우리의 삶에 자신감을 심어줍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로부터 지배를 받고 살았지만 로마인들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선민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존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로부터 지배를 받고 살았지만 어깨를 펴고 살았습니다. 로마가 우월감에 빠져 이방민족을 우습게 여겼지만 그런 교만한 로마인들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은 또 로마인들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신감은 삶에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골프선수 신지애 에게 “어떻게 하면 골프를 잘 칠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자신감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공을 쳐야 하는데 저 앞에 연못이 있습니다. 그 연못을 넘겨야 합니다. 공을 칠 때 그 연못이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치면 반드시 공이 그 연못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못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소처럼 치면 공이 잘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골프는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장담했습니다. 이것이 자신감이 주는 영향입니다. 이 자신감에 차 있었던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고백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 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 앞에 누가 와서 방해를 하겠습니까. 이런 사람 앞에는 사탄도 맥을 출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다.” 이 말씀이 마음 속에서 얼마나 강한 힘과 강한 믿음이 발산될 것입니까. 그것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으니 영광이고 축복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이 선택받음의 믿음으로 신앙의 길을 갔습니다. 그 길에 나타난 무서운 조건들 함정들 시험들 난관들 핍박들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들까지 다 극복하고 건너갔습니다. 그들은 죽음도 불사했습니다. 그래서 순교하면서도 그 길을 갔습니다. “나는 주께로부터 택함 받았다”는 그 믿음 때문입니다.    


긍정믿음 발휘 

이 선택받음의 믿음은 또 우리 앞에 주어진 삶을 긍정하는 믿음을 발휘하게 만들었습니다. 앞에 놓인 고난도 은혜와 희망으로 해석하게 만들어줍니다. 오늘의 실패도 결국에는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믿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자신감을 불어놓기 위해 암시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인위적으로 수단을 쓰기도 합니다. 

대영백과사전 회사에서는 사원들이 출근하면 현관에서 “I can do” 를 20번씩 복창하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있어” 이것을 자기암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타인 암시법도 있습니다. “너는 할 수 있어” 이 타인으로부터 받는 암시가 나로 큰 격려를 입게 만듭니다. 맥아더 장군은 어려서 골목대장으로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매일 일을 저질러 동네사람들이 모두 우려를 했지만 그의 할머니만은 “너는 군인기질이 있어, 크게 될꺼야”하고 격려했는데 마침내 성장해서 맥아더 장군이 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도 어려서 거친 개구쟁이로 매일 일을 저질렀는데 그때마다 그의 할아버지는 “너는 말을 잘하니까 뭔가 할꺼야”라고 용기를 주었는데 후에 큰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암시법이 아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동기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셔서 자녀 삼으셨다는 이 선택받음의 자본이 주어져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겁나는 것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온갖 능력과 힘과 용기와 무한한 자본이 솟아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순전히 그 믿음으로 전도하고 도전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면서 외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서 끊으리요...내가 아노니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나와 맺어져있는 그 사랑의 줄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자 앞에서는 사탄도 기를 쓰지 못하고 운명도 힘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운명 앞에 질질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고 그 운명을 다스리고 개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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