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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시 5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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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 (시 57:1~11)


2010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이정수, 모태범·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세계 정상에 서기까지는 핑판에서 넘어지고 넘어지는 수많은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을 것입니다. 넘어졌을 때 포기했다면 오늘의 영광은 그들에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처럼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다윗이 그런 인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형들에게 무시를 당했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이기고 민족을 구원했는데 사울 왕이 시기하여 숙청 대상이 되었습니다. 원수의 나라 블레셋으로 도망가는 수치를 당하여야 했고, 살기 위해 개같이 미친체해야 했습니다. 

깊은 죄의 수렁에 빠져 부하의 아내를 범하고 부하를 죽이는 죄를 지기도 했습니다. 자녀들끼지 겁탈하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자식들끼리 죽이는 고통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말년에는 자식이 반역하여 왕위에서 쫓기는 인생을 살기도 했습니다. 결코 순탄한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그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정치인으로, 군인으로, 시인으로, 음악가로, 학자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사울을 피하여 동굴에 들어갔을 때의 기록을 통해 그 지혜를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때 상황을 보십시오. 당시 최고의 권력자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3,000명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삼상24:2) 다윗을 찾았습니다. 그 때 다윗은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었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사나운 사자처럼 사울이 달려들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 되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아 가슴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3절에는 “나를 삶키려는 자의 비방”이라고 말하였습니다. 6절에는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앞에 웅덩이를 파 놓았다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앙, 비방, 불같은 시험, 장애 공작, 웅덩이... 이런 것들이 다윗을 위협하고 공격했습니다. 잘못하여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골리앗으로 인하여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골리앗을 쳐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사울은 시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자신보다 인기 있는 다윗을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을 살려놓으면 자신의 왕권이 위태로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자 신세가 되어 떠돌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방 나라에 가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개처럼, 미친 사람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집을 떠나 방황합니다. 있는 것 다 잃어 버렸습니다. 부모도 집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의 눈을 피해 동굴에 숨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다가 오면 우리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이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누가 무슨 위로의 말을 해도, 누가 무슨 용기를 주는 말을 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답이 보이지 않고 앞길이 망망할 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합니까?

1. 인생의 동굴을 하나님을 멀리하는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여 은혜받는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다윗은 심각한 인생의 동굴 앞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뒤로 도망갈수도 없습니다. 터널이다면 빠져나가면 되는데 동굴입니다.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앞에는 사울의 3000명의 정예부대가 다윗이 보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옆으로도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같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이런 동굴을 만날 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한나가 그랬고, 느헤미야가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고, 에스더가 그랬습니다. 

인생의 동굴 속에서 아무나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동굴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동굴이 오히려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동굴에 갇히는 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다. 인생의 동굴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이 비참한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습니까?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지존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를 하나님보다 크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도 문제를 당하면 문제를 하나님보다 크게 보아 버립니다. 그러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인생의 동굴을 하나님보다 크게 보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보고 있습니까?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필요한 일을 당하게 하고 훈련시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안 되는 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 한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부정적인 현실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서 지금도 나를 위해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다가온 고난도, 고통도, 상실도, 위기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다윗은 무엇을 간구합니까?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거듭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도 은혜의 수단입니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통해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며 고통을 통해 소리치신다. 고통이란 귀머거리 세상을 일깨우는 그분의 메가폰이다.'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동굴이 다가올 때 사람은 절실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가족 수술, 심각한 상황이 다가 오면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나는 브닌나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 술취한 여인처럼 부르짖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었다면 인생의 동굴이 없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 지도자 사무엘을 이 땅에 태어나게 했습니다. 에스더는 이스라엘 민족을 죽이려는 하만으로 인하여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평안했다면 에스더는 왕비로 그렇게 부르짖지 않았을 것입니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으로 불림받은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는 각종 병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폐결핵으로 인생의 황금기인 스물네살 때부터 13년동안 거의 침대에 누워 질병과 고독과 외로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한가지 병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암, 파킨슨씨병, 척추카리에스 등이 계속 그녀의 육체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질병으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77년 일생 대부분을 육체의 가시인 질병과의 투쟁하며 살았지만 그녀는 "빙점, 죽음의 피안까지, 길은 여기에, 살며 생각하며, 이 질그릇에" 등 많은 작품을 써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무수한 질병 가운데서도 그녀를 쓰러지지 않게 한 것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복음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폐병 3기의 중환자로 폐병환자 수용소에서 피를 토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결핵으로 요양중인 소꼽동무 마에가와 다다시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복음편지를 통해서 예수님을 그녀에게 소개하였습니다. 피를 토하면서 숨을 거두기까지 헌신적으로 그녀를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미우라 아야꼬씨는 그의 사랑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52년 7월 5일 병상에서 세례를 받고 성경을 주야 묵상하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절망은 소망으로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근심은 기쁨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영혼의 병이 고쳐지자 마음의 병도 고쳐졌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질병이 그녀의 은혜의 인생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질병은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빙점"이 아사히 신문사의 공모에 당선된 때는 그녀의 나이 마흔 두 살 때였습니다. 그녀는 일약 일본 최고의 작가로 알려졌고 그녀의 글은 절망과 사망의 깊은 골짜기에 다니는 많은 인생들의 가슴을 이슬비같이 잔잔히 적셔 주었습니다. 그녀가 소천하기 직전에 “질병으로 내가 잃은 것은 건강 뿐이었습니다, 그대신 ‘신앙’과 ‘생명’을 얻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었습니다. 인생의 동굴은 하나님을 만나 기도하여 은혜를 체험할 기회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 7:7-8)”

2. 인생의 동굴을 인간의 죄악성을 드러내는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과해 보아야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잘 될 때는 잘 모릅니다. 충성스런 사원은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회사가 위기를 당해 보아야 합니다. 신실한 신앙인도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환란을 당해 보면 압니다. 고난을 당할 때 인간의 죄악성을 드러내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미래는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 합격점수 맞느냐 불합격 점수를 맞느냐는 위기 앞에서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극한 인생의 동굴 속에서 어떻게 합니까?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주께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수는 적으나 사울을 인간적으로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원칙이 이니고 그것이 기준이 아니고 그것이 말씀이 아니고 그것이 상식이 아니고 그것이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때 다윗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면 나라의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고백했듯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3절을 보세요. 하나님게서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욕심 챙기고, 내 분노 풀고, 내 원수 갚고, 내 억울함 해소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인자로 자신을 돌보아 주시며 진리로 판단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인자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진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6절에 보십시오. 결국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웅덩이를 판 사람들이 그 웅덩이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억울해도, 힘들어도, 비참한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인생동굴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름이 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 11절을 큰 소리로 한 번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인생 동굴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인생의 동굴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햇빛이 내리면 짙은 안개도 걷힙니다. 골이 깊으면 깊을수록 봉우리도 높습니다.
비 오는 날도 구름 위를 오르면 파란 하늘이 있습니다. 비온 후 새순은 더욱 잘 자랍니다.

하나님을 높이면 내가 높아집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높였더니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높였더니 바벨론의 총리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만 높였더니 결국 위대한 성군이 되게 하였습니다. 자기를 높인 루시퍼 천사장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어둠 속에 떨어졌습니다(유1:6) 하나님이 내 인생의 동굴을 통해 높아지며 내 인생의 동굴을 통해 영광받으시길 원하여야 합니다. 천연보석의 여왕 진주는 고통의 산물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실낙원의 저자 밀턴을 보십시오. 그의 인생은 그야 말로 동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목사가 되길 원해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지도교수와 의견 충돌로 정학 당하였습니다. 결혼 하였지만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남겨 놓고 아내는 죽었습니다. 재혼했지만 또 아내는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딸 캐서린도 엄마를 따라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장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36세부터 시력을 잃어 가다 44세 때 완전히 실명했습니다. 그를 비난하는 자들은 실명은 '신의 징벌'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먼저 보내는 사별의 아픔, 육체적 실명과 공화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실패, 가족 간의 갈등, 정적들의 비난 등 긴 터널 같은 수많은 고통과 실패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한 실패와 고난은 그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영적 세계에 대한 눈을 더욱 맑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시력보다 더 명료한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 냈습니다. 그가 겪은 쓰라린 인생 경험은 고통과 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승화되어 위대한 걸작품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 같은 웅장한 서사시들로 형상화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 내 조국을 명예롭게 만들고 지식을 충만케 하여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다." 

3. 인생의 동굴을 좌절과 낙망의 기회가 아니라 감사와 찬양의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인생의 동굴이 다가오면 좌절하고 낙망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동굴 앞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십시오. 7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확정합니다.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으로 확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하고 원망하는 것으로 확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확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음을 어떻게 확정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가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 속에 던진다는 느부갓네살 왕의 공갈 앞에서도 굴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마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다니엘이 왕궁에서 주는 우상음식을 거절한 것은 뜻을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인생의 동굴 앞에서 노래하고 찬송할 것을 확정합니다.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잠에서 깨라고 말합니다(공동번역). 대적에게 쫓기며 가슴 조이며 평안함과 기쁨을 잃고 살고 있는 자신을 향하여 깨어서 찬양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수금과 비파를 동원하여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찬양으로 새벽을 깨우겠다는 것입니다. 새 시대를 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위대하심을 감사하며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하면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외부적인 기적이 일어납니다.
굳게 닫혀 있던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미할 때에(행 16:25-26), 

①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② 옥문이 열리며, ③모든 죄수들의 쇠고랑이 벗겨지는 신비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대하 20: 14-23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와 찬송을 시작할 때에 이스라엘을 치러 왔던 모압, 암몬, 세일의 3개국 연합군을 하나님께서 전멸시키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영적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행 16: 25-34) 찬송하니까 자신을 때리고 쇠고랑을 채운 원수에 대한 미움이 살아집니다.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습니다. 평안함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살아집니다. 자신의 마음부터 변합니다. 성숙합니다. 다른 사람이 변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미하니까 간수가 회개하고 그와 그 권속이 다 예수를 믿는 영적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자살했으면 장례식을 치러야 할 집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세례식을 받은 가정으로 변하였습니다. 찬송하니까 마귀가 쫓겨갑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 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삼상 16:23)

욥을 보십시오. 그는 한 순간에 열 아들을 잃었었고, 그 많던 재산을 다 잃어 버렸으며 마침내는 자신의 건강까지도 다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욥이 하는 고백입니다. 

욥기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참으로 위대한 찬양의 신앙입니다. 왜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동굴의 연속이고 왜 나는 결혼하면서 동굴의 연속이냐고 낙심하며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동굴을 찬양과 감사의 기회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다가온 인생의 동굴 앞에 감사했습니다. 

요 6:11 이하를 보십시오. 사람들이 장정만 5천명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여자까지 합하면 적어도 2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겨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그런데 없는 것보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 현재의 것으로 헌신함으로 감사합니다. 축사합니다.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서도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감사합니다. 실패의 현장에서도 감사합니다(마 11:20-26). 고라신과 벳세다야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믿지 않았을 때 절망하고 좌절하며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가서 살 사람들입니다. 어떤 위기의 삶을 거친다 해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룰 사람들입니다. 햇살 쏟아지면 안개는 사라집니다. 구름은 해를 오래도록 가리지 못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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