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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삼상 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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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삼상 14:6~15)


저는 글을 쓸 때, 신문을 볼 때, 설교문을 작성할 때 컴퓨터를 사용합니다. 예전에는 글을 쓸 때 원고지를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컴퓨터 없이는 글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인터넷에 접속하려고 하는데 접속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집에서는 되는데 교회에서 접속하려고 하면 접속이 되지 않았습니다. 전화국에 물어 보니까 회선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노트북 서비스센타로 문의하니까 익스플로어를 다시 깔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우고 다시 깔아 보았습니다. 그래도 접속이 되지 않았습니다. 7년 정도 사용하여 고장이 났는가 생각하여 여러 방법으로 시도를 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컴퓨터를 가르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 손으로 고쳐 보려고 3일 동안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4일 째 되는 날 문득 혹시 바이러스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백신을 사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들어 왔을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체크해 보니까 컴퓨터 바이러스가 있는 것입니다. 치료하니까 인터넷이 잘 접속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갑자기 문제에 부딪쳐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도 길이 보이게 됩니다. 

1.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통일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왕 2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블레셋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전쟁에 승리하려면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져있어야 합니다. 

닉 스켈론이 지은 "기업들의 전쟁"에 보면 역사속에 일어난 전쟁에 승리한데는 세 가지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가 SWAT(우세한 무기와 전략체계; Superior Weapons and Tactics System)였고 둘째가 높은 힘 대 공간 비율(수가 많은 사람 이김)이었으며 셋째가 강력한 방어위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세한 무기 체계나 전략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3장 5절에 보십시오. 블레셋 군대는 전차가 3만이었습니다. 기마병이 6천이었습니다. 

13장 17절 보십시오. 세대로 나누어 협공 전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아무런 전략이 없습니다. 겨우 하는 것이 왕으로서 신분을 망각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8).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고 제사장 사무엘이 해야 할 일을 월권하여 행한 것입니다. 당시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은 왕을 하나님이 바꿀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기를 보십시오. 

22절을 보십시오. 칼 두 자루입니다. 당시 블레셋이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무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19). 지금도 강대국이 쓰는 무기 정책이 아닙니까? 미국이 자신들은 핵무기를 만들고 첨단 무기를 만들어 판매하면서 약소국은 만들지 못하도록 규제하지 않습니까? 

수를 보십시오. 블레셋은 기병이 6천입니다 보병이 해변의 모래같이 많습니다(5). 그런데 이스라엘 군인들은 얼머나 됩니까? 13장 2절을 보면 3천명 남겨 놓았습니다. 그 중 두려워 도망가 버리고 몇 명 남았습니까? 15절 보십시오. 6백명입니다(14장 2절). 

우수한 방어 진지를 구축한 것도 아닙니다. 적은 진을 치고 있는데 6절을 보십시오. 전의를 상실하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바위 틈에 숨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떨었습니다(7). 흩어졌습니다(8). 심지어는 우물로 숨었습니다. 14장 2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갔습니다(15) 14장 2절을 보십시오.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전쟁은 백전 백패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 전쟁에 시각을 달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나단입니다. 6절을 한 번 크게 읽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우리 성도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할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도, 앞으로도 뒤로도 옆으로도 갈 수 없는 사면초가의 절박한 상황에서도 시각을 하나님께 돌리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앞쪽에 서 있으면 뒤를 볼 수 없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숲속에서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서있는 자리만 조금만 바꾸어도 사물은 달리 보입니다. 사람은 지배가치가 있습니다. 

지배 가치(Governing Values)는 컴퓨터 운영 시스템의 소스 코드와 같아서 인간이 세상을 해석하고 상황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일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 지배가치는 고정관념, 선입견, 관습 등으로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인간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초월적 세계는 알수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프레임이 바뀌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일을 당할 때 사람의 판단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휴리스틱(Heuristic)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률이나 효용의 극대화를 꼼꼼히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 어림짐작으로 가장 그럴듯한 것을 선택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삼촌은 아무리 담배를 피워도 건강하게 90세까지 잘 사셨다. 그러니 담배가 건강에 나쁘다는 것은 틀린 이야기이다." 감정적인 판단입니다. 

둘째는 알고리즘 (Algorithm) 판단입니다. 논리 판단, 과학적 판단, 이성 판단, 합리적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판단에 있어 전문가의 의견을 중요시합니다. 사이먼은 어떤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5만 단위(chunks)의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정보에 대한 지식 구조를 이 정도로 세우기 위해서는 10여 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 판단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신 탁월한 지혜를 가지신 전문가 중의 전문가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서 있는 다윗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전쟁을 본 것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삼상 17:46)”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라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전쟁을 보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모두가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8-9)”


2.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시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백성들은 블레셋의 수많은 군인과 전차, 마병을 보고 도망하였습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도피하고 무기력증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힘을 비교하여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기가 없습니다. 상대는 전차가 있고 기마병이 있습니다. 칼과 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칼과 창이 없습니다. 겨우 사울왕과 요나단에게만 칼이 있습니다(삼상13:22). 겨우 남은 군데는 600명입니다. 블레셋 군인은 전차병만 3만대이고 기마병 6천 보병은 바다의 모래같습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전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보십시오. 군인의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을 가지고 나가 싸웁니까?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차도 없습니다. 기마병도 없습니다. 

삼상 13장 22절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칼 한 자루가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칼을 가지고 나가 싸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잘못된 계산법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없는 것만 자꾸 봅니다. 그리고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좌절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돈이 없느냐. 나는 못배웠는냐. 나는 능력이 없느냐. 나는 외모가 아름답지 않느냐. 나는 이미 늙었느냐. 나는 믿음이 없느냐. 나는 말이 둔하냐” 늘 없는 것만 보며 절망하며 무기력해집니다. 자본과 기술, 인재가 있어야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 다 얻을 수도 없고 모든 것 다 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요나단에게 가장 필요한 것 주신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는데 칼 10자루 필요 없는 것입니다. 칼 한 자루가 가장 전쟁에는 좋은 무기인 것입니다. 열 자루가 있으면 전쟁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무기가 아니라 짐인 것입니다. 골리앗을 치는 다윗을 보십시오. 어린 그에게 큰 갑옷이나 큰 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동으로 익숙한 물매와 돌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사용하신 것입니다. 모세에게 전차나 비행기를 주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목자로 40년 간 양을 칠 때 사용했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시고 12바구니를 거두웠습니다. 사람이 돈이 없어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돈에 그만큼 무게를 두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인재가 없다고 불평하며 시도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시작했던 일 인재난 타령을 하며 접을 수 있습니다. 요나단에게 1명의 군인이 있었습니다(13:2). 그러나 그에게 지금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습니다. 999명은 떠나 버린 것입니다. 지난 것에 억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중에 5년 만에 등록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웃지도 않고 인사해도 제대로 받지도 않습니다. 5년 만에 등록하고 심방을 하였습니다. 이혼한 것입니다. 그 이혼의 아픔으로 대인관계를 꺼리는 것입니다.(어느 권사님, 가치가 처녀) 과거에 발목잡혀서는 안됩니다. 그 시각에 매여 있어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배신하고 반역하고 간첩노릇하는 만명이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목숨 걸고 같이 싸울 충성스런 부하 한 명보다 못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죽음까지 같이 갈 수 있는 충성스러운 부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라” 이런 사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떠나고 배신한 사람에게 시각을 고정시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증오와 분노만 생깁니다. 복수심만 마음에 가득찹니다. 그러나 아무리 적어도 나와 함께 사명을 감당할 한 사람에 시선을 주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명 가지고 나아가면 필요한 사람 붙여 주십니다. 엘리야가 혼자 남았다고 엘리야가 영적 무기력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 19:18)"라고 말씀합니다. 주신 것이 하나님께 헌신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사용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없는 것 보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실패를 보면서 무기력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아직 남아 있는 건강이 있고 아직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청교도 황태자라고 불리우는 스펄전 목사님이 계십니다. 어느날 어느 여인이 와서 주일학교 교사를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거부했지만 계속적인 간청으로 그를 교사로 임명했습니다. 그 여인은 바틀렛 여사였고 주교 체용된 때는 1859년 이었다고 합니다. 아이들 없이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매주 전도합니다. 매주 발전하여 주일학교 학생 700명을 전도하였습니다. 등록 교인 1000여명을 만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입술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건강이 악화된 여인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여인의 말을 들어 보세요." 외칩니다. 마지막 하늘 나라에 부름 받았을 때 그의 무덤 묘비명에 "아름다운 하나님의 딸을 추억하며 메트로 폴리탄 테버네클 교회의 목사 이하 제직들과 주일학교 어린학생들은 지금 이스라엘의 한 어머니가 된 그의 말을 여기에 새긴다. 자매여 십자가로 가까이 오세요"라는 글을 스펄전 목사님은 남겼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있는 것이 있습니다.

3. 절대 이성이 아니라 절대 신앙으로 시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방 안에서는 창을 통해서만 밖을 볼 수 있듯이 사람도 자신들의 창이 있습니다. 

더글라스 무크가 지은 "당신의 고정관념을 깨뜨릴 심리실험 45가지"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가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내었습니다. 질병으로 600명의 주민들이 죽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질병을 퇴치할 수 있는 두 가지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프로그램이 적용될 때 과학적 추산이 아래와 같이 나타날 때 어떤 프로그램을 선택하겠냐는 것입니다. 만약 프로그램 A가 선택된다면, 200명의 주민이 구조될 것입니다. 만약에 프로그램 B가 채택되다면 600명이 모두 살아날 확률이 1/3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확률이 2/3입니다. 이 때 72%가 A프로그램을 더 좋아했습니다. 다른 반에 C,D 프로그램을 소개했습니다. 프로그램 C가 채택된다면, 400명의 주민이 죽을 것입니다. 프로그램 D가 채택된다면 아마 아무도 죽지 않을 확률이 1/3이고 600명이 죽을 확률이 2/3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두 가지 프로그램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라는 문제였습니다. 

78%가 D 프로그램을 더 선호했습니다. 두 문제는 묘사만 다르지 결과는 똑같은 것입니다. 200명의 주민은 살아남을 것이지만 400명은 죽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대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설명한 프로그램 A와 B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72%가 A프로그램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잃을 사람들을 기준으로 설명한 두 번째 경우에는 78%가 D 프로그램을 더 선호했습니다. 선택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은 죽거나 살 주민의 숫자가 바뀌어서가 아니다. 그 문제를 보는 방식의 차이 때문입니다. 

바라보는 창이 다르기 때문에 결정도 달라졌습니다. 이것을 "결정의 프레이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규제 신념, 자료 신념에 의해 창이 만들어 집니다. 

예측하고 판단하는 이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문제는 이성을 절대화하는데 있습니다. 이성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는데 있습니다. 이성을 무시하면 맹신이 됩니다. 이성을 절대시하면 이성적으로 계산하여 안되면 절망하고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삶이 수확 공식처럼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면 인생이 얼마나 편지하겠습니까? 무생물은 기계론적으로 적용될 수 있지만 생물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보편적 법칙은 전략과 수, 방어진지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좌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것만이 전쟁에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전쟁이 뜻하지 않은 질병과 자연 재해 등으로 승패가 갈리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계산을 절대시하고 그것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며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 이성이 신앙에 의해 쓰임받을 때 우리 인생은 날개를 달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절대시하고 이성이 믿음의 발목을 잡게 되면 이성은 신앙의 세계로 전진하는데 올무가 됩니다. 신앙인은 이성의 노예가 될 때는 오히려 그 이성 때문에 인간은 교만해지고 무기력증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요나단이 무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행동을 보십시오. 이성적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 전쟁을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패전은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계산만 하고 있었다면 그는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숫적으로 비교되지 않지만 이기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은 수에 억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기 체계에 억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코끼리의 코만 보면서 코끼리를 뱀같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공시적(公示的) 관점 즉, 전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둘째는 통시적(通時的)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전후 사정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셋째는 초월적(超越的)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앙적 관점입니다. 

어떤 절벽 앞에서도 어떤 강 앞에서도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지 않고 건너가게 하고 넘어가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요나단은 어떻게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요나단의 작전 계획을 보십시오. 단순합니다. 매복하여 언덕에 이르러 몸을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그때 적들이 꼼짝 말아라 우리가 내려 갈 때까지 그대로 기다려라라는 소리가 나면 그대로 있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로 올라오너라라고 하면 올라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블레셋 사람들을 넘겨 주겠다는 신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험적인 믿음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는 참으로 미련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세상을 만들고 전쟁의 승패를 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믿음의 행동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떨림이 일어납니다(삼상 14: 15,19,20, 19: 7-4; 14: 15), 하나님이 동사하십니다(삼상 14:45), 큰 구원을 이루고(삼상 14: 23,39,45, 삼하 23: 9-12, 삼상 19:5). 낙망했던 사람에게 새 용기를 주게 됩니다.(삼상 14: 21-22, 삿 5: 13, 학 1 장).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믿음이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만큼 우리 삶은 풍요로워지며 우리의 미래는 밝아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 진정한 인생 승리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풍요입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397장 1절)"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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