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 (막 14:3~9)

  • 잡초 잡초
  • 1028
  • 0

첨부 1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  (막 14:3~9) 
 
 
❚무명의 제자들

오늘부터 “무명(無名)의 제자들”이라는 설교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지난 수요일이 ‘성회(聖會) 수요일’이었습니다. 혹은 ‘재의(災衣) 수요일’이라고도 부릅니다. 바로 이 날부터 교회의 아주 중요한 절기인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됩니다. 넉 사(四), 열흘 순(旬), 네 번의 열흘 즉 사십 일 동안 지키는 절기라는 뜻으로 성회 수요일부터 주일을 제외한 사십 일 동안 지키는 절기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주보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이 사순절은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 고난에 동참하는 귀중한 절기입니다. 그래서 파티나 시끌벅적한 놀이, 유흥 등을 될 수 있는 한 삼가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고 동참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오늘부터 사순절 기간 동안 이 “무명의 제자들”이라는 시리즈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 등 열두 제자가 있습니다. 이들을 또 다른 말로 ‘사도’(使徒)라고도 부릅니다.  또 예수님의 직제자는 아니지만 그 유명한 사도 바울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유명한 사도들 외에도 성경에는 무명의 제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 유명하지도 않고 그야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입니다. 

물론 열두 제자도 귀하고 사도도 귀하지만 이들처럼 이름 없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조용히 주님을 따랐던, 그러나 그 누구보다 뜨겁고 간절하게 주님을 따랐던 무명의 제자들은 정말 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리는 이 사순절에 오히려 유명한 제자나 사도들보다 이들 무명의 제자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부터 무명의 제자들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무명의 제자들을 통해 겸손과 헌신과 진실된 예수님 사랑의 마음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로 이 ‘무명의 제자들’ 중에 정말 이름도 없이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했던 여인들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

‘국민가수’라고 불리는 조용필 씨 아십니까? 노래 정말 잘해요. 그런데 조용필이 부른 ‘여와 남’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지구 위의 반은 남자, 지구 위의 반은 여자.” 인구 조사를 해보면 정말 남자와 여자 비율이 50대 50 정도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 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지구 위의 반은 남자, 지구 위의 반은 여자”가 아니라 “교회의 3분의 2는 여자, 3분의 1은 남자”로 가사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만큼 교회, 특히 우리 한국 교회는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습니다. 

오늘도 이 자리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여자가 많습니까? 남자가 많습니까? 여자가 많지요. 우리 교회는 그래도 남녀 비가 좀 비슷한 편입니다만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을 보면 여자가 훨씬 많습니다. 왜일까요? 어떤 이들은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성이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약자고 억울한 일이나 힘든 일이 더 많기 때문에 종교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뿐 아니라 절이나 성당이나 다른 종교에 가 봐도 항상 여자가 남자보다 많지 않냐는 것이지요. 맞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사회적으로 힘이 있고 대접 받는 사람보다는 약하고 눌리고 힘든 일이 많은 사람이 종교를 더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기독교의 교주가 남자 아니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교주’라 함은 예수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교주라고 부르니 상당히 이상합니다만 그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 종교를 창시한 교주가 남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 신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별로 귀 담아 들을만한 말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런데 아마 여러분 중에 기혼자들은 처음 결혼해서 남자는 아내를 보고, 여자는 남편을 보고 참 신기했을 것입니다. “아, 남자는 여자하고 다르구나, 여자는 남자와 다르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처럼 시커먼 남자 형제들만 있는 집안에서 자란 사람은 더 하고요. 성격이나 습관이나 분위기나 말 하는 것 모든 면에서 남자와 여자는 상당히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이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만 봐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점이 다르냐? 

여자는 상당히 감성적인 면이 발달했습니다. 반면 남자는 상당히 이성적인 면이 발달했습니다. 여자는 분위기를 중요시 하는 반면, 남자는 이해득실이나 명분 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자는 분위기에 쉽게 넘어가기 때문에 충동구매도 잘 하고 한 번 사랑에 깊이 빠지면 ‘뵈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총각 때 아주 연애 잘 하는 소위 ‘선수’가 있었는데 이 친구 말이 여자는 분위기만 잡아주면 쉽게 넘어간다는 겁니다.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예수 믿는 것도 쉽게 믿습니다. 하나님이 선천적으로 여자를 종교심이 강하게 만드신 데다가 종교적인 분위기에 잘 빠져서 여자들은 신앙생활을 쉽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달라요. 여자보다 예수 믿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전도를 해도 따지는 게 많아요. “성경이 이성적으로 맞느냐부터 시작해서 내가 왜 믿어야 하느냐? 그런 것 믿어서 뭐하냐? 교회 다니면 뭐가 좋으냐? 내 주변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 보면 다 이상하더라” 등등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은지요. 예수 안 믿는 이유가 수십 개도 넘습니다. 다 남자가 이성적이고 분위기에 잘 안 넘어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렇게 남자는 여자보다 예수 믿기 쉽지 않고 오래 걸리지만 한 번 신앙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참 깊어집니다. 처음 예수 믿기 힘들어서 그렇지 한 번 깊이 들어가면 여자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신앙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잘 안 흔들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남편이 예수 안 믿고 형제나 아들이 안 믿어 고민인 분들 그렇게 기도하세요. 

“지금은 어렵지만, 지금은 잘 안 받아들이지만 저 남자 속에 믿음이 깊이 들어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아무튼 남녀의 성격과 특성 차이 때문에 교회 안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자가 남자보다 많지만 상대적으로 교회 안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대접을 덜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단은 이미 오래 전에 여성목사와 장로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만 아직도 남자보다 여자 목사가 훨씬 적습니다. 또 아직 우리 교회처럼 여성 장로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겨우 한둘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보수적인 교단은 아직도 여자 목사나 장로를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아직도 교회 안에 남녀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은근히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편견입니다. 여자도 남자도 다 주님 앞에서는 공평합니다. 그리고 여자도 얼마든지 교회의 중책을 맡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신앙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리고 나아가 한국 교회가 남녀를 평등하게 바라보고 서로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여인들

예수님 당시에는 지금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훨씬 심했습니다. 여자는 아예 사람 숫자를 셀 때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람 숫자를 셀 때는 항상 남자 장정만 세고 여자와 노인, 아이들은 다 빼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와 소외된 자들의 대표가 바로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주님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들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셨기에 그들은 늘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습니다. 

바로 그런 계층 중에 하나가 여성입니다. 여성은 소외되고 차별 받았기에 그 마음이 언제나 무겁고 힘들었습니다. 그런 자신들에게 부드럽게 다가와 진정한 사랑과 관심을 부어주시는 예수님은 이 여성들에게 참 특별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늘 여성들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 여성들은 늘 주류에 끼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다 남자였고 언제나 모든 중요한 일들은 남자들 차지였습니다. 여인들은 그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르며 주님을 섬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4복음서를 읽다보면 시작과 끝부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심인물은 남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아닙니다. 바로 이들 이름 없는 여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다룬 말씀들을 보면 아버지 요셉도 중요하지만 마리아가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처형, 그리고 부활의 현장에서는 그 어떤 남자보다 여자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가까워 올 때 예수님 머리에 값진 향유를 부은 것은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의 현장을 끝까지 지킨 것도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사지내는 것을 지켜본 것도 여인들이고 무엇보다 부활의 아침,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도 바로 여인들이었습니다. 남자인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여인이 예수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을 때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화를 낸 것은 남자들입니다. 여인들이 십자가 현장을 끝까지 지킬 때 그 자리를 피한 것도 남자 제자들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큰소리 치고, 죽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막상 주님이 잡혀가시자 황급히 도망하고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들도 남자 제자들이었습니다. 이쯤 되니 우리 남자 분들 안색이 별로 안 좋아지시네요. 제가 지금 남자를 구박하고 여자를 높여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남자인데요? 그저 성경에 나온 그대로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예수님의 주변 인물들 중에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고 지킨 참 제자들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제자도의 핵심인 자기희생과 자기부인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두 제자도 아닌, 그 잘난 남자도 아닌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무명의 여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무명의 여성 제자에게서 참 제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제자도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눈에 띠는 이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한 여인입니다.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이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할 때 주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주님의 죽음을 예비한 까닭에 주님으로부터 이런 놀라운 칭찬과 축복을 받은 귀한 인물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9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요한은 이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라고 말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요한과 달리 마태와 마가가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까닭이 뭘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냥 제 생각입니다만 아마 이름을 안 밝히는 것이 더 이 여인의 행동에 걸맞은 일이 아닐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름을 만천하에 밝히는 것보다 한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멋지고 귀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무명의 여인은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제자와 남자들과 참석자들을 경악하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행동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녀가 주님의 머리에 부은 향유 때문입니다. 당시 귀한 손님이 오면 향기가 좋은 향유 기름을 발라주는 풍습이 있었기에 그 행동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다만 그녀가 옥합을 깨서 부은 향유의 가치가 무려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기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빌립의 계산에 의하면 오천 명을 한 끼 먹이는 데 이백 데나리온 정도 드는데 삼백 데나리온이면 도대체 얼마나 큰 액수겠습니까? 

칠천 오백 명은 먹일 수 있는 액수지요. 일반 노동자가 1년을 꼬박 일해야 벌 돈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액수의 귀한 향유, 여기서 “순전한 나드 한 옥합”(3절)이란 아주 값비싼 수입산 향유를 뜻합니다. 워낙 비싼 향유라서 산화되지 않게 하려고 옥으로 만든 병에 밀봉해 보관한 것입니다. 앰플(ampulla)이라고 불리는 작은 유리병에 담긴 주사액을 쓰려면 앰플을 깨야 하는 것처럼 이 나드 향유도 쓰려면 그 옥합을 깨야만 했던 것이지요. 

당연히 한번 옥합을 깨고 나면 다시 쓸 수 없기에 제자들이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볼 때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저 1년 치 월급을 한 번에 주님 머리에 붓나? 아무리 주님이 귀하시다고 하나 너무 심하지 않나?” 적어도 그들이 볼 때는 엄청난 낭비요 쓸데없는 짓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화를 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는 그 향유를 팔아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그랬냐며 여인을 책망하고 야단칩니다(5절).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화를 내고 책망하는데 주님은 오히려 여인을 변호하고 크게 칭찬합니다. 정말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 행동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첫째, 그 여인이 주님을 정말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소중하다면 ‘올인’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에 가서 부인한테 이렇게 말해 보세요. “당신 나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이야!” 부인이 정말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비슷하지만 이렇게 한 번 말해 보세요. “당신 나한테 참 소중한 여자 중에 하나야!” 아마 그날 저녁밥을 못 얻어먹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소중하다면 그것에 다 투자해야 합니다. 쏟아 부어야 합니다. 많은 소중한 것 중에 하나라는 말은 전혀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과도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내 소중한 것을 전부 쏟아 부을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입버릇처럼 주님을 위해 뭐든지 다 하겠다고, 심지어 같이 죽겠다고까지 하는데 정작 급한 순간에는 저 살려고 부인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갑니다. 하지만 여인은 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말로만 당신이 참 귀하다고 하지 않고 실제로 자신이 가진 전 재산에 해당되는 향유를 다 쏟아 부어 올인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귀히 여기신 것입니다.

둘째, 그 여인이 자기를 부인하고 진정으로 섬기는 헌신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드린 것처럼(막 12:42) 이 여인은 자신의 전 재산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린 진정한 섬김을 보여주었습니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다고 하면서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았다고 기록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가장 낮추고 주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헌신을 몸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말로만이 헌신, 섬김, 겸손 하다가 저희들끼리 누가 좌의정 하냐 우의정 하냐 싸우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몸으로 삶으로 진짜 섬김과 겸손과 헌신을 보여주었기에 주님이 그토록 귀히 여기신 것입니다.

셋째,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최상의 장례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고난과 죽음에 대해 가르쳐줘도 정작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고 하시니까 배드로는 무슨 소리냐고 대들고 따집니다(마 16:22). 그런대 이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최고 수준으로 장례식을 치를 때 시신에게 바르던 최고급 향유를 주님께 부어 최상급의 장례를 치러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귀한 여인의 행동을 주님이 최상급의 칭찬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무명의 여인뿐 아니라 주님이 가장 처참하게 고통 받으시던 순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고난과 십자가의 증인이 된 여인들에게서 참된 섬김과 헌신을 봅니다. 공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라고도 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요 19:25)라고 조금 다르게 기록하지만 아무튼 십자가의 자리에 같이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도망한 남자 제자들과 달리 이 네 여인들은 어떤 위험도 감수하며 예수님을 정말 끝까지 사랑했던 진정한 제자였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주검을 무덤에 장사지내는 순간도 지켜보았고 결국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갔다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는 영광도 누리게 됩니다(막 16:1~8).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인정받고 대접 받던 남자들과 달리 늘 천대와 무시를 당하던 여성들,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따르지만 정말 말없이 조용히 이름도 없이 따르며 묵묵히 섬겨야만 했던 여성 제자들은 오늘 우리에게 참된 섬김과 헌신과 겸손의 제자도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남자냐 여자냐 하는 성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남자든 여자든,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든, 가난하고 약한 자든 상관없이 그가 진정한 제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말로만 헌신하고 충성하지 말고, 말로만 제자라고 폼만 재지 말고 진짜 삶으로 몸으로 헌신으로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인정받습니다. 이름이 나고 유명하든 아니면 아무도 날 몰라주는 무명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향유 옥합을 깬 여인처럼 남들이 안 알아줘도 주님이 알아주시면, 주님이 인정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의 제자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제자요 사람들의 제자라면 세상이 날 알아주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만 알아주기면 됩니다, 주님만 인정하시면 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서지 않겠네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이 세상 사람 날 무시해도, 이 세상 사람 날 손가락질해도 나는 오직 주님만 따르고 주님만 위해 살겠다는 이 무명의 제자들의 고백이 이 귀한 사순절, 바로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