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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정(叱正) (막 8: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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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정(叱正) (막 8:31~38)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새로운 길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 순례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매년 한 번씩 찾아오는 불편한 손님으로 여기지 말고, 우리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사순절기는 본래 세례를 받고 입교하려는 이들이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세례가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한다면 사순절은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절기라 하겠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부정한 일을 멀리 하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수난의 골짜기로 들어가기 전까지 예수님이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가르치신 바를 저는 ‘따뜻한 가르침’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르치셨고,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막1:15)가 될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전제로 합니다. 

죄를 뜻하는 ‘하마르티아hamartia’는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겨눠야 할 인생의 과녁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이라고 일컬으셨던 것인 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막12:30-31)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인생의 과녁을 겨누고 삽니까? 이런 과녁에 적중하는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그렇지 못함은 우리의 삶이 증명합니다. ‘죄罪’라는 단어는 ‘그물’을 뜻하는 망(网=罒)과 ‘잘못’을 뜻하는 비(非)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란 잘못으로 말미암아 부자유한 상태, 갇혀서 답답한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소외, 공포, 절망, 멸시, 폭언, 폭행 등은 죄에 갇힌 인간 실존의 풍경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죄의 길에서 돌이키라고, 사랑의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라고 이르시고, 친히 길이 되시어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율법의 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믿는 이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관습적인 사고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그런 가르침조차 혁명적인 것이었지만, 주님이 행하신 이적과 잘 버무려져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 봄볕 양양한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삶은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진실과 거짓, 평화와 갈등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필시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게 될 것임을 내다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기에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신 앞에 전개될 고통과 시련을 직감하면서 주님은 제자들을 준비시키려 하십니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죄 없는 자가 경험하게 될 현실이 무엇입니까? 배척과 죽임 당함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의기양양한 승리를 약속하지 않으시고, 차갑고 냉혹한 현실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31)

• 꾸짖음의 충돌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말씀입니까. 성미 급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며 항의합니다. 사실 여기서 ‘항의하다’라고 번역된 단어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는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치우라’며 예수님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꾸짖고 있습니다. 그는 조금 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내신 퀴즈의 정답을 맞힌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 전체를 걸고 한 고백입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고 예수를 따라나선 이후 수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병 고치는 현장에도 있었고, 귀신을 쫓아내는 현장에도 있었고, 풍랑의 위협에서 건짐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도 보았습니다. 기득권자들의 위협 아래서도 얼마나 당당하신지도 보았습니다. 주님이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 사이에 번져가는 사랑과 신뢰와 평화의 물결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모든 경험을 하나로 모아 ‘선생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생 전체를 걸었는데 주님은 천만 뜻밖에도 고난, 배척, 죽임 당함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꾸짖는 베드로의 마음을 알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의 꾸짖음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단호한 태도로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 갈릴리 사람 시몬, 주님은 그를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반석’을 보아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사탄’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자입니다.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오도하는 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의 옳음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주님은 지금 매우 중대한 사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무엇 때문일까요? 자기가 제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는 지금 스승의 앞길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스승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추적해보면 ‘무당’, ‘승려’, ‘선생’과 연관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연의 섭리와 성현들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사람됨의 도리를 가르치는 이들입니다. 어느 분은 ‘스승’을 ‘스스로’를 ‘이긴’(勝) 사람이라 했습니다. 마음공부를 해 본 분들은 세상에서 제일 이기기 힘든 적이 자기 자신임을 알 것입니다. 스승은 자기를 이긴 존재입니다. 그 말을 신앙적으로 번역하면 스승은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이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그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올립니다.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주시고 악인들에게 대접을 받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시141:5)

꾸짖어 바로잡아 주는 것을 일러 ‘질정叱正’이라 합니다. 꾸짖음의 바탕은 사랑과 관심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꾸짖어 그가 서야 할 자리를 알려 주십니다. 인생길 가는 동안 꾸짖어 바로잡아줄 스승 하나를 모시는 것이 행복입니다.

• 예수의 모범

주님은 제자들과 무리를 향해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럽게 밝혀주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34b)

우리는 지금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말씀을 못들은 척해도 됩니다. 하지만 정말 주님이 우리의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믿는다면 이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자아’를 여의는 과정, 즉 내 뜻․내 욕심․내 감정․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으로 나를 채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갈5:24)라고 말합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자기 부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며, 비록 자기의 뜻이 기쁨이 된다 할지라도 자기의 뜻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생되지 않고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는 어떤 쾌락이라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며, 즐겁고 화려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 해도 곁길로 가기를 거절하는 것이며, 자기 취향에 맞을지라도 결국에는 치명적인 독이 되고 말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존 웨슬리, 설교 48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의 이 급진적인 요청을 적당히 누그러뜨려서 받아들입니다. 자기 욕심을 조금 줄이고, 다른 이들을 어느 정도 배려하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웨슬리 목사의 표현대로 하면 ‘형식적인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일 뿐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은 아닙니다. 예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포기의 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이라 합니다. 많은 이들이 ‘십자가’라는 말을 상징적인 의미로 활용합니다. 사람들은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을 비롯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 믿음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십자가라고 일컫습니다. 

직장의 술 문화, 믿지 않는 남편……. 이건 어려움이긴 하지만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혜로 풀면 됩니다. 일전에 어느 교회 청년 수련회에 강사로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한 청년이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부득이 술을 먹게 되는 때가 있는데 그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나에게 묻냐고 대꾸했더니, 그래도 방법이 있을 게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약 먹는다고 해!”라고 말했더니 청년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습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고통이나 어려움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견디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에 상반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그 뜻을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퀴리오스’ 곧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말에서 특별한 긴장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퀴리오스라는 호칭이 로마 황제에게만 배타적으로 적용되던 때에 예수님을 퀴리오스라고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10:45)

예수님은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참된 생명이란 누군가를 섬기는 데 있으며, 고통스럽지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내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를 희생하며 살아왔던 수많은 여인들의 삶, 양심의 길을 따르기 위해, 모두가 존중받는 새 세상을 열기 위해 감옥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은 십자가의 길과 유사합니다.

• 땅의 길은 하늘의 길과 통한다

그러면 십자가의 길은 고통스럽기만 한 길입니까?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참된 기쁨의 길이고, 충만의 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람을 먹고 삽니다. ‘보람’을 ‘의미’로 바꾸어도 됩니다. 인생의 보람과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유익이 될 때입니다. 사람들은 대가를 받고 일을 할 때보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할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병원이나 양로원 같은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의 얼굴에 빛이 나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 이익에만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여유가 없고, 때로는 표독스럽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35)

나는 하늘의 길은 땅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땅에서 천국을 살지 않는 이가 하늘의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의 쓰라림을 맛보는 이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이웃이 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라는 요청 앞에 서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천국의 문을 여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런 십자가의 길에서 일쑤 벗어나곤 합니다. 하지만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분이 계시니까요. 주님은 말씀을 통해 혹은 이웃들을 통해 혹은 어떤 상황을 통해 우리를 꾸짖으십니다. 그 꾸짖음을 고깝게 여기지 않고 감사히 여길 때 우리 영혼은 성장합니다. 

박중식이라는 시인은 1987년에 첫 시집을 내면서 제목을 <독자구함>이라고 붙였습니다. 그가 한때 성대 앞에서 찻집을 했는데 그 찻집 이름은 <손님구함>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 팻말을 내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꾸짖어 주실 분 구함! 베드로는 주님의 꾸중을 들었지만, 돌이켜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알았기에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통해 우리도 자아의 무게에서 벗어나 이웃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뛰어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걷는 길마다 평화와 생명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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