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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벧엘로 올라가라(창 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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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올라가라 (창35:1~5)

조지 바나(George Barna)의 저서 ‘솥 안의 개구리’(The frog in the kettle)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개구리를 잡아 뜨거운 물 속에 넣으면 죽을 줄 알고 금방 뛰쳐나옵니다. 그러나 적절한 온도의 물이 든 솥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열을 가하면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다가 삶겨져 죽고 맙니다. 조지 바나는 솥의 물이 뜨거워지나 느끼지 못해 쉽게 타협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갱신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영혼 그리고 심장이 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여기에 대조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거의 잠수함들은 토끼를 잠수함에 싣고 나갔습니다. 수압이 높아지면 토끼가 견디지 못하고 몸부림을 칩니다. 수압이 주는 환경의 변화를 사람보다 먼저 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잠수함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시대에 먼저 위기를 예감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변화와 갱신을 하지 못하고 안주하는 개구리 같이 된다면 결국 믿음의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은 벧엘에서 오래 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형의 분노를 피해 가진 것 없이 도망치던 야곱이 쓰러져 잠든 장소가 바로 벧엘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장소적 의미만이 아닙니다. 가장 낮고 비참하며 무력하게 쓰러졌던 실패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셨고 축복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세겜에 거하고 있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세겜과 벧엘의 거리는 48km밖에 되지 않아 하루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에 놓여있는데도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왜 그가 세겜에 머물러 있었습니까?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요 태도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이라도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 을 의미한다면 세겜은 '일부분' 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은 일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분적 순종, 절반의 순종이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삶의 일부분으로 밀려났습니다. 결국 야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겜성 추장의 아들에게 딸 디나가 욕을 당하게 되었고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성 사람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세겜성 사람들의 복수가 분명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 고 명령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처음 은혜를 기억하라 

세기적 부흥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목사가 청소년 시절에 집회를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강사가 “오늘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사람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라고 회중에게 청합니다. 그 순간 빌리 그래함은 일어나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 때 일을 빌리 그래함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께로 나왔을 때 어떤 감동도 갖지 못했습니다. 눈물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결단하고 앞으로 나갔을 때 겁을 먹었던 것 외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습니다. 맨 앞자리에 서 있던 그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럽고 우매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나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면 나는 “글쎄올시다. 나는 다만 앞으로 가서 저 설교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라고 얼버무렸거나 애매 모호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삶의 방향을 전환시켰으며 삶의 차원을 변화시켰고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그 때의 감격을 늘 생생하게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감격을 체험케 하려고 힘을 쏟았습니다. 그것이 빌리 그래함 목사로 세기적 부흥사를 만든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내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께 은혜 받은 곳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벧엘의 감격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벧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란에서 돌아와 세겜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잊었습니다. 이제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을 만나 감격이 넘쳤던 그 은혜를 다시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믿고 은혜 받아 기뻐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말씀만 들어도 가슴이 뛰며, 찬송을 부르면 눈물이 쏟아지던 그 감격을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그 은혜가 식어지고 그 감격이 사라지고 그 믿음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세겜까지 내려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은혜의 감격이 사라졌습니까? 왜 믿음이 식어졌는지 생각하며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지금 말씀하십니다. 처음 받은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려가는 신앙에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삶의 자리를 바꾸라 

초대교회 시절에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선교사는 불량배들과 유생들의 돌 세례로 인해 곤혹을 치르곤 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평양 깡패로 알려진 이기풍(李基豊)이었습니다. 그는 잔칫집마다 찾아다니며 술과 떡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집에도 끈질기게 찾아와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며 그의 행패는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그가 던진 돌에 맞아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마포삼열 선교사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치다가 다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교사는 이기풍을 찾아가 치료를 해주며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에 감동한 이기풍은 회개하고 예수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삶의 자리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훗날 이기풍은 평양신학교를 나와 초대 목사가 되었으며 초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수 돌산 앞 우학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를 하였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야곱은 벧엘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면서 갖가지 우상숭배와 세속적 향락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약속을 잊어버린 야곱은 세겜 땅에서 몹시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세겜은 살기는 좋은 곳이었을지 모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세겜은 야곱의 신앙을 병들게 한 곳이었습니다. 자식들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곳이었습니다. 세겜은 떠나야 할 자리였습니다. 이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라는 명령에 우상을 땅에 묻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러분에게 떠나야할 자리는 없습니까? 말씀을 어기면서 세겜에 머물러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바른 신앙은 떠나야할 자리를 과감하게 박차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버려야할 것을 단호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야곱의 모습은 생각의 전환이나 깨달음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벧엘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즉 삶의 자리를 바꾼 것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있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야할 곳이 있고 가서는 안될 곳이 있습니다. 이것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디 세겜을 떠나 벧엘로 삶의 자리가 바꾸어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바른 예배를 회복하라 

윌리스 라이머(Willis Reimer)는 세계 2차대전 당시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만일 내가 살아 돌아간다면 고향에 교회를 건축하겠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간 그는 공부를 계속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결혼 후에 아내 제니(Janie)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성전 건축에 동의했습니다. 그들은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최선을 다해 저축했지만 성전을 지을 만큼의 액수를 저축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셀커크(Selkirk) 마을의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흉년으로 인해 은행과 식품점이 문을 닫는 상황이 닥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심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결국 35년 만에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라이머는 교회 이름을 ‘웨이 사이드(Way side) 교회’ 라고 지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지켰다고 ‘약속의 땅’ 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예배당을 짓는 35년 동안 그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하면 병이 나았습니다. 예배당에서 기도하면 어려운 문제를 감당할 힘을 얻었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와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리며 문제 해결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웨이 사이드 교회의 방문객은 월 평균 천명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윌리스 라이머의 벧엘은 예배를 통해 기적을 베푸는 하나님의 벧엘이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7절에도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라 고 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는 말씀은 예배를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상황이 다급해진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예배의 회복에 힘쓰라고 명령하십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도 반드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그러기에 예배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주인공처럼 최선을 다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구경꾼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십자가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절기입니다.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벧엘로 올라가기를 원하십니다. 잊어버린 은혜를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삶의 자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무너진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좇던 야곱은 그 일이 허사임을 깨닫고 다시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세겜으로 내려가고 있습니까? 세겜에 머물러 있습니까? 이제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결단을 통해 회복되어지는 믿음을 가짐으로 문제를 해결 받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김광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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