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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행 1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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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행 17:1~15)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 하는 그의 뜻을 막으시고(행16:6) 마게도냐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행16:8-10) 마게도냐의 대표적인 도시의 하나인 빌립보로 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소아시아의 두아디라 시에서 온 루디아라는 자색 옷감 장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행16:11-14). 하나님께서는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이 전하는 말에 마음을 열게 하셨고 그녀와 그녀의 온 집안이 다 세례를 받게 하셨으며(행16:14-15) 바울의 전도활동의 가장 든든하고 헌신적인 후원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믿는 이들이 생기는 곳마다 시기와 반대와 난동과 위협과 박해가 일어나곤 했듯이 빌립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고발을 당했으며 옷을 찢기고 많은 매를 맞았으며 옥에 갇혔다가(행16:22-24) 풀려나는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이미 여러 차례 확인하며 확신하게 된 바울의 복음전도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에서 그보다 더 큰 도시이며 마게도니아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로 갔고 거기서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살전2:2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오늘 본문은 바울과 그 일행 즉 실라와 디모데에게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일과 그 다음 도시 베뢰아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복음을 전하면 난관이 닥치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며 계속해서 복음을 더 널리 퍼지게 하시는 과정이 계속 반복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남서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암비볼리와 거기서 또 남서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아볼로니아를 거쳐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약 6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빌립보와는 달리 데살로니가는 자유도시였습니다. 즉 독자적인 법과 제도와 세금, 행정관과 의회를 갖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빌립보와 달리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회당이 있는 곳에서는 의례히 거기 들어가 유대인들을 상대로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전도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세 번의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습니다(본문 2절). 그의 강론은 성경을 읽고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정복자의 통치와 억압의 굴레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줄 구원자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런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그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라고 말하려면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했는지를 설명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강론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강론을 하고나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했습니다(본문 3절). 그러자 그 회당에 함께 있던 수많은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수의 귀부인들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본문 4절).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랬듯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반발과 그들의 선동에 따른 이방인들의 박해가 데살로니가에서도 어김없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 일행의 말을 따르게 되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저자거리의 불량배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 안에서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머물게 한 야손이란 사람의 집에 침입해서 바울 일행을 찾아 끌어내려 했고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자 야손과 그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고하기를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했습니다(본문 5-7절). 다른 임금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무리와 읍장들이 다 이 말을 듣고 야단법석을 떨었으며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은 보석금을 받고서야 놓아 주었습니다(본문 8-9절). 

데살로니가에서 믿게 된 형제들의 도움으로 불량배들의 손을 벗어날 수 있었던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서남서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베뢰아로 보내졌습니다. 또 한 번 위기를 모면한 바울 일행이었지만 어디 가나 전도를 해야 하는 그들의 열심은 쉴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베뢰아에 가서도 역시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가 말씀을 전했습니다(본문 10절).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말씀의 참됨을 성경에 쓰인 말씀으로 확인하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가운데 많은 유대인과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이 믿게 되었습니다(본문 11-12절).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다시 베뢰아까지 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을 일으켰고(본문 13절) 그 때문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하고는 나중에 다시 합류하기로 하고 베뢰아에서 믿게 된 형제들의 인도를 받아 아데데로 가게 되었습니다(본문 14-15절).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도 몇 가지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첫째는 전도가 행해지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곳마다 전도를 반대하고 방해하며 박해하는 역사가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그 어떤 핍박과 고난도 바울을 비롯한 전도자들의 전도의지와 그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어떤 적대세력의 준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함께하시며 친히 역사하심을 보여주심으로써 전도자들이 확신과 담대함으로 쉬지 않고 전도에 임하게 하시며 당신의 복음을 널리 확산시키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바울의 전도방법에 주목합니다. 본문 2-3절을 다시 보면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합니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 바울이 전하는 핵심내용입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만 전해도 충분히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이 알아듣게 하고 믿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은 성령의 몫입니다. 

만일 그저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말 전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차서 뭔가 조금 더 하고 싶은 사람은 더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원자이신데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시라고 말하면 됩니다. 조금 더 길게 말하고 싶으면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 말하면 됩니다. 

만일 예수가 누구기에 그를 믿기만 해도 구원받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모두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전하고 싶을 때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회당에 들어가서 한 것처럼 왜 예수님이 십자가의 해를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는지를 증언하는 성경구절들을 찾아 읽어주며 전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실 것은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먼저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 직후였습니다. 그것을 눅9:18-22에서 봅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그 후에도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날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면서도 또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24:25-27을 보면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했고 조금 내려가서 

눅24:44-48에 보면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훗날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벧전2:24-25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리고 이것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것임을 봅니다. 사53:5-6을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본문 3-4절에서 보듯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고 합니다. 또 11-12절에 보면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했다.” 합니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듣고는 많은 헬라인들이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헬라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철학적인 사변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대단히 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합리주의의 물을 많이 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든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든다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듣고는 코웃음 치거나 미친 자의 소리라고 일축해버리지 않고 믿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그럽다”는 말은 원래는 “상류계급에서 태어났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육을 잘 받은 귀족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듣기에 따라서는 미친 소리 같은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미개한 족속이나 무지한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고 안 받아들일 것 같은 이성적인 사람들과 높은 교육을 받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이것을 길게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안 믿을 것 같은 사람들을 오히려 더 잘 믿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즘 현대인들에게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말 전해가지고 무슨 전도가 되겠느냐고 회의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전도사역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전도, 우리 힘과 지혜로 하려면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믿고 나아가면 됩니다. 전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저 전하라는 것 전하는 심부름만 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망설이지도 말고 담대히 나아가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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