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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중의 한사람(2) (눅 17: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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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그 중의 한사람(2) (눅 17:15~19)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께 찾아가 마침내 그 흉한 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수십 년간 옥중 생활하다가 풀려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병자들이 고침받자 마자 각자 집으로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때로 중병을 앓은 것도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 중병에서 고침을 받으면 감사의 진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의 값을 발견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중병을 앓고 있는 당시는 고난이고 아픔이 있겠지만 그 후 고침 받게 되면 그 일로 진정한 감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로 중병이나 고난은 해석하기에 따라 은혜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10명의 나병환자들이 마침내 고침을 받습니다. 11절-14절 까지는 10명의 나병환자들이 다 함께 고침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예수께 오기만 하면 고침을 받고 회복을 받는다는 것을 선포하신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5절-19절까지는 그중의 한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10명 모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사람만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6). 이것이 오늘 본문이 주시는 메시지의 줄거리 내용입니다. 나병환자 10명이 다 함께 고침 받은 사건을 1막이라고 한다면 그중 한 사람이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께 엎드려 감사하는 모습은 2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결과 

10명의 환자들이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기적같이 깨끗함을 받았고 고침을 받았고 은혜를 입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누구든지 예수께 가기만 하면 다 고침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께 가기만 하면 다 응답받는다는 약속도 들어있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 믿음을 가지는 순간부터 기적이 싹이 트이기 시작합니다. 믿음은 전적인 신뢰감을 말하고 전폭적인 의지를 의미합니다. 환자들은 예수께 가는데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악조건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믿음 앞에 다 녹아내렸습니다. 가다가 돌을 맞아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가다가 어떤 난관이 있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 가기만 하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그 어떤 것도 주저하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밤잠을 설치며 걱정들이 앞을 가리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들에게 이 믿음이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매사가 불확실한 것입니다. 상대방이 불확실하면 전적 신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반대로 전적 믿음은 나병환자들이 고침 받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가정으로 돌아감 

기도 응답의 경험을 가져보셨습니까. 평생 시원한 기도의 응답 몇 번만 받아보면 우리의 영적생활이 쑥쑥 자랄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10명의 나병환자들이 모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꿈같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할 일입니까. 그리고 기쁜 발걸음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갔겠습니까? 이 세상의 최후의 보루는 가정입니다. 가정이 최고입니다. 가족이 최고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의 목적은 하나님이고 두 번째 목적은 가정이고 가족입니다. 오늘 이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과 가족의 진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가정을 파괴하고 분란을 일으키고 불화하게 만들고 살아갑니다. 모두 무지 때문입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가정은 내 자존심 보다 훨씬 더 소중한 곳입니다. 내 체면보다 훨씬 더 소종한 모임입니다. 가정은 쉽게 깰 일도 깨서도 안 되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은 내 집입니다. 명절 때를 보십시오. 모두들 가정으로 고향으로 부모 곁으로 가려고 안달입니다. 왜 입니까. 내 집이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중국에서 명절이 되니까 차표를 구입하지 못하게 되자 수천 키로의 길을 오토바이에 온가족을 태우고 귀향길에 오른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사람들이 외국 여행을 좋아하지만 며칠은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두 달 지나보십시오. 내 집이 제일 좋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어느 여인이 남태평양 바닷가로 여행을 갔는데 맑은 물과 푸른 숲과 맑은 날씨 그리고 깨끗한 모래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기로 이사 가서 살자 하고 곧 이사를 하였습니다. 며칠간은 천국이었습니다. 날씨가 끝내주었습니다. 푸른 물, 부드러운 모래가 환상적이었습니다. 

밤마다 들려오는 남극의 노랫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모두가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고 보니까 가는 곳 마다 모래뿐이었습니다. 방에도 마루에도 거실에도 신발에도 음식에도 침실에도 모래 천지였습니다. 이제는 모래가 지긋지긋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자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군에 입대를 하여 훈련을 받다보면 그때 제일 그리운 곳이 집이고 부모입니다. 그래서 군에 간 아들들이 하나같이 눈물로 편지를 쓰고 집을 그리워하고 부모님을 그리워합니다. 모두 효자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군 생활 하다가 휴가를 갈 때는 어린 아이처럼 며칠 전부터 밤잠을 설칩니다. 

군에 안간 분들은 이해 못할 것입니다. 가정 없는 사람은 휴가 날이 와도 기쁘지가 않고 기쁠 일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보따리를 풀지 못하고 그리운 고향에 갈 날만 고대하며 살았습니다. 밤마다 고향의 꿈을 꾸며 명절 때마다 눈물로 보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그들을 놀리고 비웃을 때 그들은 호젓한 강가로 나아가 다리 뻗고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집, 내 고향이 최고의 안식처입니다. 오늘 이 소중한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환자들이 고침을 받고 제일 먼저 어디로 갔는가 하면 가정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중 한사람 

10명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9명은 즉시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15절을 보면 “그 중 한사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메시지의 초점입니다. 여기 10명이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 한명만 돌아와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나오는 10명의 사람들이 초점이 아니고 이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기 이 한사람에게 몇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이 한사람이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 이 한사람이 누구냐 하면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6). 당시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천시하고 무시했던 사람들입니다.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군에 의해 망합니다. 그러자 그 땅에 앗수르 사람들이 들어와 거주하게 되면서 북 이스라엘 유대여인들이 앗수르 남자들과 결혼하여 혼혈인을 낳게 되는데 그 사이에서 낳은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그 사마리아 사람들이 피가 더러워졌다고 해서 그때부터 사마리아인을 경멸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 때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였고 참여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시하던 한사람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께 찾아와 감사를 하며 자기의 할 도리를 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아간 9명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택함 받은 민족이고 먼저 된 자이고 자칭 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최소한의 도리도 못합니다. 고침 받은 9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병이 나았다는 진단서를 발급받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정신을 쏟고 있다가 문서를 발급받자마자 예수는 간데없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9명이 예수께 가지 않고 곧 바로 집으로 갔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진단한 제사장들 때문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예수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예수가 병을 고치고 백성으로부터 인기를 누리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10명의 나병환자들에게 진단서를 발급해 주면서 예수께 가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병환자들이 집으로 곧장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도 그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께로 돌아가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감사의 삶이 참 중요합니다. 사람이 도리를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느 교사가 평생을 교직에 있다가 은퇴할 때가 되던 어느 날 제자로부터 감사의 편지가 받고 너무 반가워 그 자리서 답장을 썼습니다. 그 답장 내용이 “내 평생 교직생활을 하면서 회의를 가졌었는데 자네 편지를 받고서야 나의 50년간 교직생활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네, 감사 편지는 자네가 처음이네”라고 썼습니다. 이 감사가 사람으로 하여금 격려와 회복과 감격을 갖게 해 줍니다. 

하나님이 두 천사에게 바구니 둘을 주시면서 세상에 가서 기도와 감사를 담아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기도바구니는 금방 채워졌는데 감사바구니는 겨우 바닥을 채워가지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감사는 모든 은혜의 시작 지점 입니다. 여기 10명중 한사람만이 돌아와 영광 돌리고 감사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멸하고 무시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감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한 사람이 자기 병을 고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것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이 한명만 그 분이 메시야임을 알고 인식하였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를 고치고 눈먼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자는 메시야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볼 때 이 한사람이 얼마나 기특하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아홉은 다 어디 갔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 질문은 그들이 찾아와 감사하지도 않아서 괘씸해서가 아니고 서운해서도 아니고 꾸짖음도 아닙니다. 겨우 병 나음에만 만족해하는 그들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병 고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돌아갔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 더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성도들 대부분이 병 고침에 만족하는 상태입니다. 병을 고치면 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병은 얼마 있으면 또 발병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도 또 죽게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방편일 뿐인데 그것으로 다 인줄 알고 살아가는데 주님은 그것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소중한 것은 예수를 아는 것이고 그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복을 받고 병을 고치는 일에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병을 고치면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예수는 곧 잊어버립니다. 

그냥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아홉 명에 대해서 그렇게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고 노여워하신 것입니다. 너무 하찮은 것에 만족해하는 그 아홉 사람들을 안타까워서 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그 말은 “네가 지금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지 않고 있구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때로 내가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어디 서 있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한사람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은 최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그의 병도 고쳐주셨지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왜 이 한사람에게만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가 하면 이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메시야인줄 알고 찾아와 영광 돌리고 감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예수가 오늘 보니까 진정 당신은 메시야 이군요.”하고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정확하게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 너는 나병에서 완전히 구원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적으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이제 네 영혼도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주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 고백은 아무나 못합니다. 눈이 열려야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 본문의 사건이 왜 우리에게 강조하는가를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나병환자를 고치는 사건이 일어난 지점이 어디인가 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일어난 사건 (11)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남쪽 지방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금 점점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시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때 이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곧 메시아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죽으시기 전에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인가를 세상에 재천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직전에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바다를 걸어가셨고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지금 사마리아 땅으로 가시다가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이제 곧 예루살렘이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얼마 후에 마지막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 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지점에서 나병환자를 고침으로서 당신 자신이 메시야임을 다시 증명하고 공개적으로 세상에 천명하실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길에서 나병환자 10명을 고치시고 그 10명중 한 사람이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께 감사함으로 주님은 메시아임을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 고백을 들으시고 생각하시기를 “아 이제 사마리아 사람도 내가 메시야임을 알았다면 알 만한 사람은 내가 메시야임을 알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눈이 어두운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고 한탄을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은 그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하고 마지막 구원의 선물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 말은 “네 말대로 나는 죄를 사하는 권세도 있고 구원하는 권세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한사람은 정말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병도 고치고 칭찬도 받고 인간의 도리고 다 하고 메시야도 만나고 죄사함도 받고 구원도 받고 하나님의 자녀도 되는 온갖 복을 다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은 9명처럼 가장 값싼 선물에 모두 만족해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야 깊은 영적 안목을 가질 수 있고 깊고 더 소중한 신앙고백을 강하게 피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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