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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와 여성 (눅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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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여성 (눅 8:1~3)

 
내 용 

2월은 여선교회 활성화를 위해 우리 목회자들이 현수막을 준비해서 교회 건물에 커다랗게 걸어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해 특별히 하신 일이 있습니다. 제자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최초로 제자 선택을 받은 사람이 오늘 말씀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메, 도마와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 유다 이렇게 열두 사람이 제자 선택을 받았는데 이들을 가리켜 “사도라 칭하시니라” 라고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을 보면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승천하시기 직전 선택하신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또 제자를 삼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된 자들이 또 제자를 삼는 사역의 연결을 예수께서 말씀하셔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자 사역을 통한 2천년 교회 확장이 이어져 온 것입니다. 이 제자들의 헌신적 사역을 우리는 절대로 무시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열 명이 순교자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했고 요한은 100세가 넘도록 목회하다가 자연사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1~3절로 아주 짤막한데 바로 이 교회 공동체 원리를 나타내 주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주님의 제자 사역을 크게 두 가지로 표현을 하는데 보이는 제자(Visible disciple), 보이지 않는 제자(Invisible disciple)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사도직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바로 사도직 제자에 속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는 일의 성격이 아주 분명합니다. 이 사도직 제자들은 보일수록 효과가 크고 안보이면 큰일이 납니다. 그래서 잘 보이게 하는 것이 사도직 제자의 성격입니다. 오늘이 주일입니다. 만약 사도직 제자인 목사가 약속한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 이렇게 틀림없이 나타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온갖 잡음이 생깁니다. 

“어디 아픈가? 사고가 났나? 죽었나?” 별 소리가 다 나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잘 보이도록 합니다. 오늘도 어디서나 이 강대상이 잘 보이도록 합니다. 요즘 세련된 교회에 가보면 강대상도 유리판 하나로 만들어서 설교자의 다리까지 다 보이기 때문에 다리 장난도 못하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것을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 라고 합니다. 전체가 다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모두 유리 기둥으로 세워놨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니까 이 강대상이 얼마나 큰지 제가 부흥회 가서 “교회에 이렇게 강대상이 큰 줄 알았으면 바지는 안 입고와도 괜찮을 뻔했습니다.” 농담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 보이는 제자는 사회에서도 보일수록 전도가 되고, 약속한 시간에 틀림없이 잘 보이도록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그 증거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음성을 들으며 민족 이동을 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적 음성을 듣고 민중 앞에 나타나 백성들에게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전달했습니다. 홍해 그림을 보세요. 홍해를 만났을 때도 백성들은 밑에 있고 모세는 언덕 위에 지팡이를 들고 높이 서서 막 소리를 지르잖아요? “여러분, 가만히 있으세요. 동요하지 마세요. 가만히 있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세요.” 

이 사람은 항상 민중 앞에 뚜렷하게 나타나서 말을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아침이면 “오늘은 하나님께서 이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니까 내 말을 듣고 나를 따르시오.” 그러면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과 음성을 듣고 모세를 따라 민족 이동을 하잖아요? 자고 깨면 모세의 모습을 보기를 원했고 또 보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내산 밑에 왔을 때 모세가 약간 방심을 합니다. 그동안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넉넉하다고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홍해 사건이 있었잖아요? 하나님이 바다를 갈라주시고 우리가 무사히 다 건너오고 애굽의 병사들을 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을 모두 목격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서 백성들이 넉넉히 믿음이 생겼다고 판단을 해서 모세는 민중을 떠납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과 둘이 만나 이야기 하려고 시내산으로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어떻게 되었나요? 보여야할 사도직 얼굴이 안보이니까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모세가 죽은 거야.” 40일 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금품을 거두어서 송아지 한 마리를 만들어놓고 “이것이 우리를 인도할 신이야.”라고 합니다. 모세가 안보이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더 심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3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역을 훌륭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예수님의 얼굴이 3일 동안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자들은 다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를 세우시되 사도직 성격의 사역자들에게는 영적인 능력을 더하셔서 민중이 바라보게 하시고 인도하시는 힘을 주시는데, 이것이 열두 제자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들을 도와주는 또 한 팀의 제자가 생긴 것입니다.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이 여 제자들, 즉 봉사적 제자, 혹은 청지기적 제자들이 있음으로 사도들을 3년 동안 훌륭히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봉사적 제자들이 자기들의 소유, 자기들의 재산을 털어서 이들을 섬겨주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 시대부터 잘 이루어졌음을 오늘 성경말씀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사역 특징을 보이지 아니하는 제자, Invisible disciple로 부르는 것입니다. 일은 많이 했는데 흔적은 안 남습니다. 이것이 봉사적 제자들의 성격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여자들 가운데 특징 있는 이름이 몇 사람 나옵니다. 예수님을 도와주었던 살로메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일한 것이 많은 여자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동생입니다.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었습니다. 또, 꽤 살만한 가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을 위해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충분히 공로가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예수님께 요청했잖아요? “임금님 되시면 내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주소서.” 그 다음에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의 동생들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베다니 마리아 집은 휴식처 같은 역할을 해서 제일 많이 그 집에 심방을 가셨습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만 오시면 얼마나 분주히 음식을 만들었는지, 이것을 본받아 교회에 가보면 식당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마르다 봉사회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밥 먹을 일이 많고 모임이 많습니다. 그러니 식당에서 밥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마르다 봉사회에서 이것을 하자.” 그래서 항상 부엌을 책임지고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300 데나리온의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 일을 할 때 가룟 유다가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렇게 값진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더 훌륭한 사역인데 발 한번 닦는데 이것을 허비하느냐?” 그러면 그 돈이 얼마나 되는가? 다른 계산은 우리가 할 필요가 없고 성경 자체에 계산 방법이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집회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남자만 5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언제나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군중집회는 아무리 적게 계산을 해도 1만 명 이상의 대형 집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아프리카 흠버마운틴 집회를 하고 다시는 제가 이런 집회를 안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리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1만 명 정도가 모이는데 체육관도 없고 그럴만한 집회 장소가 없어 산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아주 높은 산인데 그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면 집회할 만한 장소가 넓게 있어서 결국 흠버마운틴 산상집회라고 해서 올라갔는데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모이는지 제가 제일 많이 걱정한 것은 올라갈 때는 괜찮은데 내려갈 때 압사사고가 날 것 같았습니다. 

제 주변으로 사람이 새까맣게 달라붙는데 피부 색깔도 까맣잖아요? 그런데 감당을 못하겠는 겁니다. 사람이 1만 명이 모여서 이동을 해보세요. 그런데 거기에 교통경찰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한 발자국이라도 강사에게 가까이 오려고 아우성을 치니까 ‘어휴! 큰일 났다.’ 사실 아프리카 집회는 사람들 몇 만 명 모아놓는 것은 쉽습니다. 선전만 하면 얼마든지 사람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올해도 현지에서 “금년에 10만 명 집회 안하시겠습니까?” 저한테 요청이 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못하겠습니다. 소그룹으로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이 많은 군중이 모이면 압사 사고로 몇 명이라도 밟혀서 죽으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저는 걱정이 되어서 아직도 대답을 안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설교자들의 가끔 실수할 때가 뭐냐 하면 사람이 많이 모이면 괜히 흥분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큰 문제가 길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연합집회를 잘 환영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순서를 맡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기도할 사람, 설교할 사람 시간을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련되게 딱 끝나야 그 다음에도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그냥 시간을 무한정 끌고 나가면 이것은 실패입니다. 그러니 지킬 수 있나요?” 하지만 시간을 잘 안 지킵니다. 

어떤 목사는 축도 하러 나와서 15분 설교를 합니다. 전에도 부활절 연합예배 때 시간을 꼭 지키라고 말씀드리고 미리 시간을 정했습니다. 목사님 설교하시는데 10분 만에 종결짓는 듯 한 말씀을 하셔서 ‘저 목사님 정말 세련되셨다. 어떻게 저렇게 10분 만에 짤막하면서도 말할 것 다 말하시냐?’ 그래서 ‘오늘 순서는 아주 잘 되겠다.’ 생각했는데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특징을 10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두 시간 설교하셨습니다. 우리가 학생 시절에 많이 들었잖아요? 마지막으로 한마디하고 30분 더 연설하는 교장 선생님을 우리가 너무나 미워했습니다. 

예수님도 지금 하루 종일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열심히 설교하시는데 제자들이 약간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이제 그만 돌려보내소서. 해가 저물어 가나이다. 배도 고픕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먹을 것을 좀 주면 될 거 아니냐?” “날은 저무는데 이 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해다 줍니까?” 빌립이 수학적 계산을 해냈습니다. “이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한데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그러면 계산이 나왔죠? ‘아! 200데나리온이면 일만 명 정도가 한 끼 먹을 수 있는 가격이다.’ 우리가 이 예배 마치고 나가서 점심 먹으러 갈 때 햄버거, 설렁탕, 자장면 간단한 음식을 먹어도 5천원은 듭니다. 그러면 5천 원씩 계산해서 1만 명이면 얼마입니까? 5천만 원이 200데나리온입니다. 금방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의 옥합은 300데나리온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더 좋은 게 있으면 더 좋은 것을 드렸을 텐데 이것 밖에 없어서….” 마리아가 드리는 방법도 아까워서 한 방울씩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옥합을 깨뜨려서 왈칵 쏟아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런 여 제자들이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가 고향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아마 예수님께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 막달라 마리아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으니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이니라.” 이 여자는 세계 어떤 신학자도 직업이 창녀였다고 똑같이 해석합니다. 그리고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정신도 육체도 만신창이가 된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께 접근할 수 있었는가? 예수님의 이런 따뜻한 사랑을 어떻게 받을 수 있도록 다가왔는가? 방법이 있었답니다. 

“마리아 마리아” 공연을 보신 분은 ‘아! 그렇겠다.’ 생각 되셨죠? 그게 뭐냐? 로마 정부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로마 정부가 유대 나라에 와서 점령하고 있는데 갈릴리 지방에서 나사렛 예수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민중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로마 정부가 지금 굉장히 신경 쓰는 일인데 예수님 주변에 사람이 모였다 하면 보통 1~2만 명씩 모여서 움직이는 겁니다. “이들이 빌라도 정부를 때려 부수고 민중봉기를 일으키면 큰일 난다.” 

이런 정치적 판단 때문에 예수님 중심의 민중 모임을 해체할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막달라 마리아를 이용했다고 이 작품에 나옵니다. 로마 정부의 실세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서 흥정을 합니다. 그리고 조건을 줍니다. “만약 네가 예수를 데리고 잠을 잔다면 로마 이민을 약속하고 모든 일평생의 책임을 로마 정부가 약속해 주겠다.” 그 말을 듣고 마리아가 흥분을 합니다. 그때 유대 사람들은 로마 이민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접근했다고 작품에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죠? 정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일평생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인간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곱 귀신이 든 만신창이가 된 고칠 수 없는 병들을 예수님이 다 현장 치료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 흥분해서 그 순간부터 자기가 하던 일을 모두 끊어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이지 않는 제자(Invisible disciple)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니까 제자들은 약간의 비겁한 태도가 되었습니다. 마치 자기들은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 같이 발뺌을 하고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매우 과감한 반응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 처리를 자기들이 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금요일 날 돌아가셨지만 토요일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꼼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법이 못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안식일이 해제되는 순간 그들은 뛰쳐나왔습니다. 그래서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달려 나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이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부활 설교를 제일 먼저 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동참한 여인들에게 수없이 많은 수난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와 같았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문화로 발전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성경 자체도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역사에 여인들이 당한 불이익적 대우는 세계가 공통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가 언제부터 해결되기 시작했는가? 그것이 기독교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권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 공헌을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어린이 인권 문제요, 하나는 여권신장의 문제였습니다. “어린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만약 너희 중에 이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메고 바다에 빠져라.” 극단적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인권을 회복시키셨죠?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여권신장을 위해서 예수님이 행하셨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문화는 손님을 초대하면 주인이 손님의 발을 씻어주던지 발 씻을 물을 갖다 주던지 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그런 일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초대되지 아니한 불청객 한 사람이 별안간 느닷없이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여자는 그 성경 말씀에 동네 여자라고 했으며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죄인인줄 아는가? 창녀로 소문난 여자였기 때문에 누구든지 알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는 묻지도 않고 죄인으로 규정하는 몇 종류가 있습니다. 세리와 장애인, 창녀입니다. 예수님이 세리 삭개오 집에 들어가니까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보고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묻지도 않고 죄인으로 규정하고 맙니다. 창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한 일이 좀 이상하고 요란스러웠죠? 옥합을 열어서 발에다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고 만졌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불쾌했습니다. 이런 신분의 여자가 초대하지 않은 자리에 왔다는 그 자체도 불쾌하지만 창녀는 바리새인 집에 못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 사람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아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나는 예수가 선지자라고 해서 우리 집에 한번 초대했는데, 사실이 아닌가? 만약 이 사람이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인 것을 알았으리라.” 

예수님을 초대해놓고 이렇게 되었으니 그 자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주 민망한 관계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맞다. 이 여자는 죄 많은 여자다. 그러나 너보다는 낫다. 왜냐? 너는 나를 너희 집에 선지자인지 아닌지를 테스트 하려고 나를 초대했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셨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으며 너는 나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극단 선언에 의한 여권, 인권 회복 선언에 힘입어서 수많은 여인들은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게 되었고,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 진리가 되어서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바로 어린이의 인권 문제와 여인들의 인권 문제를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남성 위주 문화에서 남녀평등 문화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직도 여자 신부는 안 세웁니다. 앞으로 교황 가운데 여성 신부 허용 문제를 선포하는 교황은 세계 역사에 어떤 전환점을 만드는 유명한 교황이 될 것입니다. 이슬람의 여인은 또 어떠합니까? 노예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뜨거운 사막에서 여인들이 눈만 내놓고 온통 뒤집어쓰고 다니는 것이 삶입니까? 이런 여인들의 인권을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이슬람 여자가 이슬람인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아버지가 끌어다가 목을 쳐버립니다. 이것을 명예 살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여인들의 인권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한국의 개신교회도 100년 이상 성차별한 죄가 있습니다. 여자 목사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안하는 교단이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추하게 평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치 가장 거룩한 여자 같은 분위기로 존경 일변도의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예수님께서 그의 인권을 제자리로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 유난히도 여신도들이 많은 이유는 5천년 긴 세월 속에 여인이 인간 대우 받은 일이 거의 없는 문화였습니다. 사실 옛날에 보세요. 여자 아이를 낳으면 갖다 버리지 않으면 다행인 대우를 받았잖아요? 그래서 주어다 길렀다는 말이 많이 유행했습니다. 100년 전만 해도 여자 아이를 낳으면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아서 지금도 호적에 김간난이 박아기라는 이름의 사람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그런 문화를 개혁을 했기 때문에 이 나라의 수많은 여인들이 교회로 몰려 온 것입니다. 

마치 노예에서 해방된 듯 한 자유의 기쁨을 주님으로부터 선물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안방에 갇혀있던 여인들을 사회로 다 이끌어냈습니다. 그래서 YWCA 운동을 벌려서 젊은 처녀들을 다 교육시켜 지도자로 배출시킴으로 김활란 총장, 이명신 총장 같은 인물들이 교회에서 다 배출되었고 정신여고, 이화여대를 비롯한 여성교육 기관을 만들어서 사회에 여성 지도자들을 수없이 배출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문화가 변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기독교 교인들은 여성이 65퍼센트, 남성이 35퍼센트 정도로 계산이 됩니다. 절반 이상 여신도가 많은 것이죠?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남자들이 역차별이 되어 남성 박해 시대가 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사회는 여성이 하지 못하는 일은 없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여자가 대통령만 안 되었지 모든 일에 여성 참여가 이루어졌습니다. 어두운 긴 역사에서 활짝 열린 햇볕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100년 동안이나 여성이 사도직을 허락하지 아니하던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 문화는 이제 소수만 제외하고는 모두다 활짝 열렸습니다. 

저는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대표적 역할의 어떤 대형교회가 자신들의 담임 목사를 여성 목사로 한다면 그 교회는 한국 교회에 전환점을 만드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우리 문화는 남녀의 편견은 없어졌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으로 잘 발전되도록 우리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훨씬 더 많은 여성들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를 해결해 가는 그런 여성 지도자들이 많은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 사도직 제자들과 평신도 청지기 봉사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오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인류 구원 역사에 우리 모두가 다 쓰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는 주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 대우에서 벗어나 죄 많은 사람들, 천대받는 사람들, 여인들, 어린이들 모두다 인권 회복을 해주셨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는데 그 중에 우리 대한민국도 그 은총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사역을 해왔지만 앞으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다 사도직과 봉사직에 손을 잡고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며 우리에게 주어진 21세기의 문화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역사를 훌륭하게 창조적으로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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