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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렘 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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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렘 7:1~15) 
 
 
일전에 청년 커플이 주례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결혼 준비는 잘하고 계십니까?” 두 사람이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정신이 없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또 물었습니다. 결혼 준비를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두 사람이 꼼꼼하게 메모해 놓고 준비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청첩장은 준비했고, 웨딩 사진은 찍었고, 신혼여행과 피로연은 예약이 끝났고, 당일 입을 예복과 웨딩드레스는 준비해야 하고, 아직 혼수 더 준비해야하고, 또 폐백 준비해야 하고, 야외 촬영할꺼구, 신혼집과 신혼살림 준비해야 하고...” 

가만히 듣다 보니 이 커플은 결혼준비와 결혼식 준비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결혼준비를 물었는데 이 커플은 결혼식 준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혼식을 준비했다고 결혼을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결혼식을 잘 치렀다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준비는 결혼하는 날 당일 예식과 그 전후한 여러 절차들을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결혼 준비는 두 사람이 하나 되는 준비를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함께 삶을 나눌 준비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많은 커플들이 결혼한 뒤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결혼식 준비는 잘해서 결혼식은 잘 치렀지만 결혼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결혼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식 준비에만 신경을 썼지 정작 결혼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잘 드렸다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는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정해진 의식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생활이란 어디에서든지 또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결혼식과 같은 것이고, 신앙생활은 결혼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예배는 잘 드리는데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참 많습니다. 저들은 예배드리는 일은 나름대로 준비하고 신경 써서 열심히 하지만, 정작 신앙생활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또 신경 써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성공하지만 신앙생활에는 실패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로 이 점을 질책하시고 계십니다.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예레미야는 지금 예루살렘 성전 안뜰로 통하는 여러 문들 가운데 하나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이때가 이스라엘의 큰 절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원근각처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힘든 길을 마다 않고 최선을 다해 성전을 찾은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선포된 말씀은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예배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신앙생활은 잘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좇아낸 것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였다 할지니라” 한 마디로 신앙생활을 실패한 채 예배에만 매달리는 사람들 그들을 하나님께서 좇아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저들이 먼 거리를 마다 않고 정말 예배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성전으로 나아오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내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예배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이 교회마다 넘쳐납니다. 우리교회에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미신적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불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정말 그들이 믿어 온대로 여호와의 성전이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왜 이토록 예루살렘 성전이 여호와의 성전이기를 그토록 바랐을까요?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굳게 의지해온 신앙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윗왕조는 영원히 지속된다는 다윗언약에 대한 신앙입니다.(삼하 7:12 이하)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세우셨고 다윗왕조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다윗왕조는 영원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성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여호와의 성전에 대한 신앙입니다.(시 132:13-14) 예루살렘 성전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여호와의 성전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두 가지 신앙을 붙들고 어떤 국가적인 위기가 와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다윗왕조의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왕조는 영원히 지속된다는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 신앙이 남았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성전에 대한 신앙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여호와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여호와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적들이 쳐들어와도 안전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저토록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붙잡고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대한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믿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실로의 성소가 무너졌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있던 여호와의 성전에 대한 신앙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한 마디로 여호와를 믿기 보다는 여호와의 성전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성전에 대한 맹목적이고 미신적인 신앙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하고 그 안에서 제사가 철저하게 드려지게 되면 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시며 그 성전에서 자기들의 제사를 받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는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저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대한 미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 모태신앙으로 50년 넘게 신앙생활 해 온 분이 신앙상담 차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 성령체험을 하면서 이전과는 완전하게 다른 신앙인으로 거듭났다고 간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전 신앙생활의 모습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고백하셨습니다. 

이전에도 철저하게 성수주일을 했답니다. 아마도 단 한 번도 주일을 범한 일이 없을 것이랍니다. 만일 주일을 범하면 하나님께 벌 받을까봐 주일을 지켰답니다. 그런데 주일 교회에 와서 예배 시간 내내 졸았답니다. 이전에도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답니다. 아마도 단 한 번도 십일조 헌금을 빠뜨린 일이 없을 것이랍니다. 만일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재정문제를 힘들게 하실까봐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드리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 일이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하나님께 벌 받지 않으려고 성수주일을 했고, 하나님을 달래기 위해 십일조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신앙이 미신적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서 자기에게 화가 임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사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이런 미신적 신앙에는 하나님과의 복된 만남과 관계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내가 변화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이런 미신적 신앙이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미신적 신앙을 철저하게 떨쳐버려야 합니다.

둘째, 예배와 삶을 하나로 해야 합니다.

본문 8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 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한 마디로 예루살렘을 여호와의 성전이라 믿고 예배드리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면서 그 삶이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처럼 드리면서 삶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와 삶이 분리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예배 따로 삶 따로의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은 역시 저들의 잘못된 성전관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출 25:8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머물 수 있도록 그들에게 내가 머물 성소를 지으라 하여라” 하나님께서 출애굽하여 저 시내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세로 하여금 성전의 전신인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성막 안에 거하시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막을 짓게 하신 목적은 성막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임재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시려고 성막을 짓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다윗의 간청과 솔로몬의 열심 앞에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통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역시 성전을 짓게 하신 목적은 성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장치를 마련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자주 오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 안에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안 곧 ‘우리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성전 곧 ‘그곳’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금 여기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의식이 점점 약화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곧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 함께 하신다는 의식이 약화되니 저들의 삶 속에 어둠이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들 생각대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생각하시는 일들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와 삶을 하나로 하려면 우리 삶의 현장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한스 뎅크라는 분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은 그토록 크신데 아무도 당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당신은 그토록 큰 소리로 부르시는데 아무도 듣지 못하고,
  당신은 그토록 가까이 계신데 아무도 느끼지 못하고,
  당신은 모두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는데 
  아무도 당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당신을 멀리하면서 당신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께 등을 돌리고는 당신을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귀를 막고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분의 시선을 느끼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이 함께 하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길이 잘못되었고 하는 행위가 바르지 못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가는 길을 바로 잡고 또 하는 행위를 바르게 고치라는 명령입니다.

‘신바람 건강학’으로 유명한 황수관 박사의 강의 내용 가운데 의미심장한 것이 있습니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돈으로 마련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뇌물로 한 턱을 내는 음식을 먹으면 결코 건강할 수 없답니다. 도둑질 한 돈으로 차린 진수성찬은 몸에는 독이 된답니다. 그래서 누가 밥 사준다고 생각 없이 받아먹지 말랍니다. 그 돈이 어떤 돈인가를 따져보고 받아먹으랍니다. 어떤 음식이 몸에 좋은가만을 따지지 말고 어떤 돈으로 장만한 음식인가를 따져보랍니다.

실제로 바르지 못한 돈으로 자녀를 교육시키면 아이가 사기꾼이 되기 쉽습니다. 바르지 못한 돈으로 아내에게 옷사주고 차 사주면 그 옷 입고 그 차타고 딴 남자 만나러 다닙니다. 더 무서운 것은 바르지 못한 돈으로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 헌금을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르지 못하면 결국 나중에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와 삶을 하나로 하려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르게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배와 삶을 하나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현장에 늘 함께 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하루의 삶을 예배드리듯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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