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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손에 (삼상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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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손에 (삼상 1:1~28)


오늘 읽은 말씀은 구약성경 사무엘상의 첫 장 전체입니다. 한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배출한 가장 걸출한 사사인 동시에 사사시대의 마지막 주자였던 사무엘을 아시지요? 바로 그분의 어머니인 한나 이야기입니다. 한나라는 여성이 없었더라면 사무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무엘이 없었더라면 다윗의 등장도, 다윗 왕가의 탄생도,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위대한 일의 근원에 한나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사무엘상 1장 전체와 그 다음 장 절반을 차지합니다. 특별히 사무엘상 2장 전반부에 있는 ‘한나의 노래’는 누가복음 2장의 ‘마리아의 노래’(the Magnificat)를 미리 보여 주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사무엘서는 그 첫 한 장 반을 한나를 위해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렇다고 한나가 순박한 여인이며 효성이 지극했던 효부 룻이나 “믿음으로”로 시작되는 히브리서 11장의 신앙의 전당에 등록된 음부(淫婦) 라합과 같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는 여인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2:21에서 한나는 성경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히, ‘파카드’, 찾아오시다)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온갖 우여곡절과 비애와 고통의 터널 끝에 하나님께서 그녀를 ‘기억’하시고 ‘찾아’와 그간의 마음고생을 위로하시며 사무엘을 대신할 자녀들을 넉넉하게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 다음으로, 사무엘을 대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사무엘상 첫 한 장 반 안에 한나의 일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 그녀가 증언하고 있는 것들, 그녀가 보여주었던 신앙에 대한 것들이 전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한 장 반이었지만 한나와 하나님과 그녀의 삶에 관한한 모든 것은 오케이였습니다. 비록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라는 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잘되었습니다. 

이제 사무엘상 1장 전체를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읽고 난 후에 본문은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무엘서 1장은,

․ 한나의 가족에 대해, 
․ 그녀의 고통스런 불임에 대해, 
․ 처절하고도 솔직한 그녀의 기도생활에 대해, 
․ 애처로워 보이는 그녀의 ‘홀로서기’에 관해, 
․ 그녀의 신앙 밑에 흐르는 물길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는 이러한 질문들이 계속해서 떠오릅니다. 어찌 보면 여러분들이 별로 말하거나 입에 담고 싶지 않는 주제들입니다. 여러분의 고통스런 가족이야기, 누구에게 감히 말 못할 사연들, 고민하고 분노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께 외치는 기도들, 혼란스런 주변형편과 사람들 사이에서 당하는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서려고 애쓰는 모습, 그러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도도하게 흐르는 확신 등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터놓고 편안하게 이야기 하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무엘서 1장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어색하고 껄끄러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별로 들쳐 내고 싶지 않은 것들, 그러면서도 가장 우리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장 안으로 여행하는 것은 마치 추석에 시댁이나 처가에 가는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여러 식구들이 모여 저녁식사 중입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가정불화로 인해 깨어지기 일보직전에 있는 처남댁이나 시댁의 큰집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본문 안에 들어있는 일부다처제, 불임과 출산의 신학, 짐승제사, 여호와께 서원하여 아이를 바치는 풍습 등과 같은 것들은 아마 여러분에게 매우 이상하게 들리는 고대 풍습이겠지만, 그런 것 말고 오늘의 이야기의 나머지는 전형적인 가족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는 마치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신앙이 놓인 주변 환경

구약성경의 순서에 따르면, 사무엘서는 룻기 다음에 나옵니다. 그리고 룻기 바로 앞에는 사사기가 있는데, 사사기의 끝 절은 이렇게 읽혀집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아니면 사무엘상 초반부에 기록되었듯이, “이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영적으로 말해, 이스라엘, 하나님, 공동체, 삶, 예배, 신앙 등이 상당히 엉망진창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사무엘상 1장은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전개되는 한 가족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풍성한 삶이나 열매로 가득한 신앙적 삶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척박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며 우리의 삶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1장은 신약의 사도행전과 같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수천 명이 함께 모여 세례를 받는 것 같은 감동적이고 영적인 장면이 아닙니다. 아니면 항상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격하며 사는 어떤 허풍 대는 신앙 간증자의 가정모습은 더더욱 아닙니다.

한나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말하고 행동하였던 그런 시기에, 그런 장소에, 그런 문화 속에 살았으며 그런 시대에, 그런 장소에서, 그런 문화 가운데서 갈등하고 고통하며 기도하고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고대 세계는 우리가 보기에도 전혀 생소하거나 이상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와 너무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닌데!”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들!

이제 여러분은 한나 가족 이야기를 들으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 똑같을까 하고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엘가나가 희생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한나에게 갑절을 주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4-5절)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한나의 적수인 브닌나가 이 사실을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한나에게 두 배를 주었다? 물론 엘가나는 한나의 마음이 불임으로 인한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녀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 본문은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엘가나, 이 남자는 한나를 사랑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 착한 남편 같습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그 정도면 충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보다 어떻게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말입니다. 물론 저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8절에서 엘가나는 한나를 위한 따스한 위로의 말을 더 잘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약간 아쉬워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확신시키고 싶다면 “나는 당신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하지 않소?”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당신은 내게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귀하지 않소?”라고 말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엘가나의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더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합니다. 사랑 표현에 있어서 약 2%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한나에게 갑절을 준일은 결국은 아주 이상하고 어정쩡한 일이 됩니다. 

그리고 한나와 브닌나 사이의 팽팽한 갈등과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고,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성경은 브닌나를 가리켜 한나의 ‘적수’(rival)이라고 부릅니다. 자녀를 낳지 못하는 본처와 후처로 들어온 여자 사이의 갈등은 이미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그의 첩 하갈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서 잘 나타난 것을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브닌나는 한나의 속을 쑤셔댔습니다. 스쳐가는 말로도 한나의 깊은 상처에 소금을 넌지시 뿌리기도 했습니다. 한나로 하여금 비참과 굴욕과 수모를 당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엘리는 어떻습니까? 그는 제사장으로서 한나가 슬픔에 겨워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모습(13절)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여자가 대낮부터 술에 취해 중얼거린다고 비난했던 사람입니다. 포도주를 끊으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나가 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내 주여,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입니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입니다.” 종교적으로 높으신 분이 이 여자에게뿐 아니라 모든 여자들에게 거침없이 하는 말, “여자가 왜 이래? 여기 말고, 지금 말고, 가시라! 당신의 신앙은 구경꺼리밖에 아니야!”라는 말이 지금도 여기저기에서 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것이 엘리라는 인물입니다. 

자, 그리고 엘리의 두 아들들을 보십시오. 성경에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의 두 아들보다 더 행실이 나쁜 난봉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나를 술주정꾼이라 하다니 도대체 엘리는 누구란 말입니까? 그가 제 정신이 있는 제사장이었는가요? 그런데도 전혀 이상하지 않군요.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의 간청을 허락해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17절). 최소한 제사장의 역할을 잊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여러분은 한나가 “더 이상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마치 그녀는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것을 즉시 알았던 것 같습니다. 때가 되자 그녀는 임신을 하였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 펀치라인이 되는 구절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녀를 기억하셨더라”(19절)는 말씀입니다. 그녀의 임신에서 하나님이 하신 부분, 즉 성경을 통해 드러나는 불임과 생산의 내러티브(사라, 리브가, 라헬, 엘리사벳)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 하나님의 백성들의 언약적 삶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그녀를 기억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 희망 가득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말, 이 보다 더 좋은 말은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의 모든 신실한 성도들은 그들의 고난과 괴롬의 한 복판에서 언제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제발 저를 잊지 마세요!” “하나님, 부디 저를 기억해 주세요.” “하나님, 저의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새로운 창조의 출발점입니다. 마치 노아 홍수의 절정에서 온 땅이 죽음으로 덮여있을 때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더라.”(창 8:1)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사무엘 1장이라는 방에서 어색하고 이상한 부분은, 우리의 삶의 가족 이야기 중에 대부분들, 즉 우리의 기도들, 우리의 협상들, 우리의 간청들과 탄원들, 우리의 분노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상대하는 것들인데, 이것들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두 어렵고 힘든 일들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녀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의 결과로 그녀는 임신하게 되었고 그토록 기다렸던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를 사무엘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그를 달라고 간구했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무엘만의 출생은 아니었습니다. 한나의 오랫동안의 고통과 기도와 인내는 하나님의 기억의 뇌관을 당겼고,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새로운 창조 세계를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윗과 다윗 왕조의 출현, 그리고 마침내 다윗 왕조를 통한 메시아(그리스도)의 출현이 가능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 끝에 한나는 그곳 성소에 그 아들을 여호와께 놓고 갑니다. 이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무엘 1장의 맨 끝부분에서, 그녀가 격동적인 음색과 박동소리로 기도하고 노래하여 나중에 ‘마리아의 찬가’가 된 그 ‘한나의 노래’ 바로 앞에, 한나는 어린 아이 사무엘을 그곳에 여호와를 위하여 두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갓 젖을 뗀 어린아이를 말입니다. 아마 그 당시 사무엘은 서너 살 정도였을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성전에서 자라도록 두고 나온 것입니다. 그녀는 그를 엘리에게 맡겨두고 나온 것입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엘가나가 그의 가족들과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나는 아이와 함께 실로 성소에 남아있었어야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이별의 눈물과 절규가 없느냐고 이상해 합니다. 성경의 한나는 그녀의 슬픔과 괴로움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어린아이를 하나님께 맡기고 여호와를 위해 그것에 두고 떠나면서 어떻게 우리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마지막 반절은 의미심장한 문구인 동시에 다루기 힘든 본문이기도 합니다. 영어성경(NRSV)는 이렇게 1장을 끝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사무엘은 그곳에 여호와를 위해 두었습니다.”(She Left him there for the LORD). 분명히 그 구절에 무엇인가 들어 있습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말입니다. 1장의 마지막 끝 반절 말입니다. “그녀는 그를 그곳에 여호와를 위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성경번역만큼 마지막 반절 해석도 가지각색입니다. 

․ “그가 거기서 여호와를 경배하니라.” (한글개역개정, NIV, KJV) 
․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글개역, 쉬운성경) 
․ “그(엘가나)는 거기서 여호와를 경배하였다.” (NRSV의 해석)
․ “그들은 거기에서 주께 경배하였다” (표준새번역)
․ “그러자 일행이 야훼 앞에 엎드리고” (공동번역)
․ 다른 고대 사본은 아예 이 구절을 생략했습니다.(LXX) 

거기서 여호와를 예배하였다고 한 ‘그’는 누구입니까? 당시 4살 정도였던 아이 사무엘이 실제로 여호와께 ‘경배’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여호와를 예배하였다고 한 ‘그’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남성 3인칭 대명사(‘그’)를 안다고 해서 엎드려 예배하는 문제를 풀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마지막 구절 “한나는 그를 그곳에 여호와를 위해 두었다”(NRSV, LXX)는 말씀에 초점을 두려고 합니다. 가슴 뭉클한 그 무엇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 장면은 한나에 관한 것이지 엘가나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여호와를 위하여 사무엘을 그곳 성소에 두었습니다. 좀 더 넓은 내러티브 안에서 바라볼 때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 어린아이 사무엘이 하나님께 되돌려지고 있다는 사실, 
․ 그의 전 생애와 삶을 하나님께 바쳐지고 있는 일, 
․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한나는 그를 그곳에 여호와께 맡겼다.” 성경학자들과 고대 서기관들은 이 얽힌 절의 어색함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매듭이 있을까 둘러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매듭을 풀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나는 그를 그곳에 여호와를 위해 두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한나의 신앙과 삶

삼상 1장을 여러 번 읽고 생각하면 할수록, 한나의 행동이 갑작스럽거나 일시적 충동에 따른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나는 충동적으로 사무엘을 그곳에 두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겨우 성경의 한 장과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러분은 그 가족이 매년 실로에 예배하러 가고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쳤다는 것을 놓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속적이고 꾸준한 예배생활과 기도생활이 그녀 인생의 날줄과 씨줄이었습니다. 그뿐 입니까? 

바위처럼 단단해진 그녀의 갈등과 괴로움의 밑바탕을 하나님께 내어보이던 수많은 날들, 수많은 밤들을 지새우며 까맣게 타버린 그녀의 간절한 기도들, 서원들, 이런 것들은 제사장의 사역이나 전통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깨어진 마음과 상한 심령과 눈물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신앙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 임신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던 어느 날, 임신 소식의 낭보를 접하던 그 아침, 
  아주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려고 서두르던 한나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 엘가나가 연례 제사를 지내러 올라갈 때 한나는 아이가 
  걸을 만하면 바로 아이를 하나님의 면전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하던 한나를 기억하십시오.

․ 그리고 그 아이가 아직도 어린데, 한나는 아이를 실로로 데리고 가서 필요한 제사들 
 드리고 하나님과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사신 것으로 맹세하노니, 주님, 나는 이제 당신의 앞에 이렇게 서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던 한나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한나가 어떻게 기도드렸으며 어떻게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지를 기억하십니까? 이 찬양의 노래는 후에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축하하는 장엄한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한 찬양입니다. 이것이 한 장 반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동하고 살았던 그 시대에 한나는 이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신앙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끝에 가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녀의 행동은 결코 갑작스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 한나의 삶, 
․ 그녀의 절망, 
․ 그녀의 심장과 마음, 
․ 그녀의 가족 긴장과 괴로움, 
․ 그녀의 신앙, 
․ 그녀의 불임, 
․ 그녀의 임신, 
․ 그녀의 예배하는 삶, 
․ 그녀의 남편, 그녀의 아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좋은 시절, 나쁜 시절, 가뭄과 풍작, 비와 눈, 통곡하던 밤과 즐거워 노래하던 아침, 분노하고 초췌하던 겨울과 남편 손에 이끌려 교회 가던 봄날 등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각각 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아버지의 따스한 손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정점을 찍듯이 그녀는 사무엘을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긴 것입니다. 자기의 고난스런 삶 전체에 종지부를 찍듯이 그녀의 슬픔과 괴로움과 야속한 감정과 후회, 원망과 기쁨 등 모두를 하나님의 손에 맡긴 것입니다. 마치 나일 강 위에 갓난아기 모세를 자그만 방주에 태워 보내면서 그의 운명과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던 모세의 어머니와 그의 누이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갑작스레 일어난 것인 아닙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세례를 주기 위해 물 그릇 둘레에 서 있습니다. 교회는 어린 아기를 안고 세례를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멈추어 부모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이것이 갑작스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다.” 길고 긴 기도 끝에 이 아이를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에 맡기는 것입니다.

예배에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가족이 여러분 옆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친절하게 한마디의 말을 건넵니다. “하나님의 집에 오셔서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것이 갑작스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수술을 받기 전에 침대 옆에 둘러서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확신에 찬 어조로 기도가 시작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당신께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당신의 손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 안에 두는 순간입니다. 

서로에게 결혼 서약을 하러 서 있는 두 사람은, 그들의 미래와 인생 전부를 하나님의 손에 두려고 이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장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서서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곳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곳에 그를 두었습니다. 그녀는 그를 하나님의 손에 맡긴 것입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소견에 따라, 자기의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생각에 따라 옳다고 하는 것을 하기에 너무도 쉬운 이 시대에, 그런 곳에서, 그런 문화 속에서, 이 모든 일들, 우리가 하는 것,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어떻게 되라고 하는 그 사람, 이런 것들은 그저 갑작스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한 장 전체와 절반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것을,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모든 것을 여기 ‘하나님의 손 안’에 두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갑작스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좌절, 우리의 가족,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교회, 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 그곳에 그렇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그곳에 하나님의 손안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나는 그를 그곳에, 하나님의 손에 남겨두었다.” 아멘. 
(류호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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