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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 (눅 18: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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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 (눅 18:35~43)


I. 소망의 줄

영국 런던 어느 박물관에 “죠지 프레드릭 왓츠”가 그린 「소망」이란 그림이 있답니다. 둥근 지구 위에 한 젊은 여인이 앉아 하프를 연주하는 그림입니다. 눈은 수건으로 싸맸는데 앞을 보지 못합니다. 밤하늘엔 희미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연주하는 하프의 줄들이 다 끊어졌고 마지막 한 줄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진지하게 하프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화가는 이 모습을 「소망」이라고 본 것입니다. 

세상의 줄이 다 끊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다 눈을 감고 지구 위에 혼자 버려졌다 할지라도 예수 줄을 놓지 않으면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네로와 히틀러가 머무는 그곳에 살상과 폭행이 일어났고, 미국 청교도들이 머무는 그곳엔 교회가 서고 광산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발길이 머무는 그곳엔 언제나 사랑이 전파되었고 구원의 역사가 있었으며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예수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는 가운데 이 설교가 마쳐지기 전에 예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머물러 계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2000년전 맹인 바디매오 곁에 머물러 서신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외치는 사람들 곁에 머물러 서 계십니다. 한 맹인이 주의 이름을 부르짖었던 여리고 성은 바로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요, 내가 기도하는 그 자리입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면 여리고의 기적이 오늘도 일어나게 됩니다.


II. 예수께서 머물러 서셨다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머물러 서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 분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움직이시고 활동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거처를 정하고 기다리신 분이 아니라, 그 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 부지런히 다니시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잠시라도 머물러 서 계신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한곳에 머물러 서 있거나 할 일없이 배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자신의 활동과 걸음을 멈추고 서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은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심각한 이유가 없이 사역을 중단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선포를 멈추고 발걸음을 멈추셨다고 하는 것은 뭔가 의미심장한 일이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여리고 성 출구에 발길을 멈추시게 했단 말입니까?

오늘 본문은 종려주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행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호산나 호산나 찬송을 하며 따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머물러 서신 것입니다. 모든 행렬이 중단되었고 열 두 사도와 군중들도 발길을 멈추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리속에서 들려 오는 외마디 절규를 듣기 위해 멈추어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간곡하게 부르짖는 그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귀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오는 한사람의 부르짖음에 집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또한 불쌍한 거지 맹인에게 머물러 계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부르짖음이 예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순간 예수의 발걸음은 그곳에 머물러 서서 이 불쌍한 사람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간에 기꺼이 도와주시고자 했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이 말씀은 여호수아의 기도를 연상케 해 줍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기도할 때에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맹인은 의의 태양인 예수를 바로 자기 곁에 머물러 서게 할 만큼 위대한 기적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이 사람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발휘했습니까? 거지 맹인의 외침이 주님의 발을 멈추어 서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성도들의 부르짖음은 이러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맹인처럼 예수님을 우리 곁에 머물러 서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도 간구하는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머물러 서 계시게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눈물이 있는 곳에 예수님의 관심이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예수님은 부르짖는 교회가운데 거하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며 불쌍한 영혼을 건져주십니다. 여러분의 간구는 주님을 붙들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과 설교를 통하여 또 하나의 맹인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맹인은 곧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누구나 장애인 일 수 있습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고통이지요.

캐나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천적 장애로 날마다 고통에 울부짖는 딸을 5년 동안 보다 못하여 뇌성마비 장애인 딸을 아버지가 살해를 하였습니다. 12살 뇌성마비 딸을 수 차례의 대수술을 시켰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 날마다 고통의 비명을 지르기만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보다 못해 자신의 트럭에서 가스 중독사시켰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경찰에서 그는 『죽이는 길만이 딸의 고통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라고 말했답니다. 결국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딸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알려주는 수많은 이웃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용기가 있었다면 내가 먼저 딸아이를 죽였을 것』이라는 아내의 절규가 법정을 울렸다고 합니다. 


III. 장애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란 “상해, 질병, 유전적 결함으로 말미암은 만성적인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되고 있습니다. 정신 지체 (지능지수 69 이하), 시각장애, 청각 장애, 지체장애, 정서장애(행동 장애, 부적응 행동, 미숙아), 언어 장애, 특정 학습 장애, 복합 장애, 자폐증 등 모두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식의 장애가 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사람을 기피합니다. 죄의식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정을 탓다고 합니다.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버립니다. 

장애로 말미암아 자칫 경제적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맹인처럼 거지가 되어 사람들의 동정에 의하여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소외되어 살아갑니다. 도와야 할 가족에게는 큰 부담으로 느끼게 됩니다. 장기 치료를 위해 정작 물질이 필요하지만 물질을 소유하기에 많은 장애 요인이 있습니다. 사회 저소득 층에 속하게 됩니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에다 경제적 빈곤으로 말미암아 2중 3중의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치며 주님을 부릅니다. 그때 사람들은 무엇이라 말합니까?(48) 시각 장애를 입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소리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이기 때문에 바로 앞에 계셔도 소리를 쳐야만 합니다. 어디 계시는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꾸짖습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로, 어리석은 존재, 열등한 존재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환영받고 사랑받아야 할 가족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단란한 가정의 칩입자나 파괴자의 취급을 받습니다. 특히 선천적 장애인의 경우, 집중적 보호를 받아야 할 신생아 시절에 장애아 탄생의 충격에 빠져 있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장애 자체에 대한 관심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됩니다. 장애 아동의 부모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인은 가족 구성원끼리의 관계를 통해 인생을 배우는 기회에서도 소외되고 성장해서 자신의 가정을 이루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는 그것이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장애인은 이 세상의 출생 또는 장애 발생 시기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더 더욱 심각한 것은 영적 소외, 영적 침체입니다.

장애인은 신앙을 갖는 확률이 적습니다. 때문에 심각한 것이 바로 영적 장애입니다. 물론 교회의 무관심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장애라는 것은 쉽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장기화되면 믿음의 사람도 영적 침체가 옵니다. 신앙의 열정이 사라지고 되는대로 살자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믿음의 정열이 사라집니다. 만성적이기 때문에 절망하며 낙담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고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장애라는 것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상대적입니다. 장애의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보건사회부 통계의 의하면 1995년 1,053,000명이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UN에서는 세계 인구의 10%정도를 장애인으로 보고 있고 그것이 타당하다면 대한민국에는 약 4백 40만 정도가 장애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 중 대부분의 장애인 90%는 후천적인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 교통사고가 장애 발생 원인의 25%를 차지하는데 1996년에는 55,070명이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었고(경찰청 보고서, 1997) 산재 사고로 인한 장애인은 해마다 약 3만 명 이상 발생한다고 합니다.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온전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고 장애의 가능성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체적으로는 온전한 것 같아 보이지만 각각의 기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고,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질 수도, 정서적으로 장애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결함의 요소를 결함으로 여기지 않고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장애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세상을 의식하며 소극적, 부정적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소경이고 거지라고 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모습을 본문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만 ‘예수님께 가면 될 텐데...’ 생각하며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겠습니까? 자기는 예수님께 나갈 수 있는 조건이 분명 잘 갖추어 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예수님께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어도 입은 열려 있었습니다. 없는 것 보며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일 뿐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으로 장애받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만큼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장애를 장애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발전하면 차이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장애 역시 하나님이 주신 기회요, 은혜이며, 선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겠지요. 그러나 장애는 결코 내가 장애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적어도 내 자신에게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장애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 

시각 장애를 가지 바울의 자세를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고 했습니다. 

얼마전 팔 다리가 없는 중증 장애를 극복한 [오체 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 씨가 장애인의 날(20)을 앞두고 방한하였습니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장애인과 고령자들을 위한 [마음의 장벽 없애기(Barrier Free)]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출산 후 그의 어머니는 처음 그를 보고 “어머, 귀여운 우리 아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4년간 담임을 맡았던 다카기 선생님는 그에게 휠체어를 못 타게 했고, 반 아이들에게도 특별 대우를 하지 않도록 했다고 합니다. 남의 도움 없이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는 법을 배웠습니다. 술에 취한 친구를 전동 휠체어에 태워 지하철까지 바래다줄 정도였습니다. 

그는 “신체는 불만스럽게 태어났지만, 인생은 행복하다”는 자서전을 써서 일본 열도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그의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하다. 하지만 장애자란 생각은 한번도 안해 봤다. 난 성격상 튀는 놈인가 보다.” “처음부터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이런 생활이 불편하지 않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말라깽이, 뚱보가 있듯 팔다리 없는 것은 나만의 개성”

찬송가를 보면 ‘화니제인 크로스비’라는 이름을 자주 발견할 것입니다. 그녀는 약 9천 편의 찬송시를 작곡했고 이 중에 약 35 편이 우리 찬송가에 실려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매우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의 동정을 받아가면서 연명을 하였습니다. 생후 1개월 반만에 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후 1개월 반만에 크로스비는 감기에 걸리고, 눈병이 났는데, 식모가 뜨거운 겨자 파포를 크로스비의 눈에 댄 것이 화가 되어 크로스비는 이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크로스비는 일생동안 세상의 광명을 본 기억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크로스비는 그의 실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실명했기에 세상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시를 쓰는데 지장을 초래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영의 눈이 더욱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은 보지 못했지만 참된 빛인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IV. 누가 어떻게 하여 예수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의 발길을 붙들면 온갖 핸디캡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의 발길을 머물러 서게 했습니까? 헤롯의 권력도 이 일만은 할 수가 없었고 빌라도나 대제사장의 폭력도 이 일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주님의 발길을 하여금 멈추어 서시게 했단 말입니까?

①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주님은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내려가십니다. 가난한 심령이 있는 곳에 주님은 계십니다. 이 맹인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빵을 살 돈도 벌 수 없어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해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에 도무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재단사는 여러분의 옷차림에 관심을 갖고, 구두방 주인은 여러분의 신발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절망과 낙심에 처하여 “나사렛 예수여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찾을 때 이미 그곳에 와 계시는 분이십니다. 고통 당하는 성도들을 보살펴 주시고 절망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주님은 그곳에 발길을 멈추어 주십니다. 

한 사람 맹인, 그는 불행을 극복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성공자들은 난관에 부딪혔을 때에 낙망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부르짖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애들러는 “이 땅의 모든 성공자들은 자신의 인생에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스파르타의 한 장군의 아들이 칼이 짧다고 불평했을 때에 아버지는 충고했습니다. “한 걸음 더 앞으로 전진하려므나!” 

당신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당신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뛰어넘는 용기가 지금 당신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를 직면하십시오. 주님께 한걸음 더 전진하십시오.


② 부르짖는 사람 곁에

둘째 맹인 부르짖음이 예수의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름다운 목청과 매혹적인 곡조로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부르짖다’로 되어있는 원문 ‘크라제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소리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외마디 비명입니다. 살려달라는 애원이요, 몸부림입니다. 이러한 맹인의 부르짖음은 최상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살고 봐야겠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우러나온 부르짖음이 능력 있는 기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9)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여러분 묻습니다.
정말로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하나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영적인 몸부림이 있습니까? 간절한 요청이 있습니까?

③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긍휼을 구할 때

셋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구할 때 예수의 발길은 멈추었습니다. 우리는 공적을 내세워 주님께 무엇을 구하려고 할 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은총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시고 지나가 버리십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유창한 기도를 못하거나 긴 시간 동안 기도를 못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 간구하기 위해 유능한 웅변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통회하고 자복하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④ 예수의 이름이 불려지는 곳에

넷째 이 맹인은 간구할 때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기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온 천지에 예수의 이름보다 더 능력이 많은 이름은 없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아버지가 너희에게 그것을 주시리라”  하늘 아버지를 기쁘게 만들고 악마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죄를 도말하여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세상의 모든 복을 주시고 이 모든 문제도 해결하여 주소서.  예수의 이름! 그것만이 그 분의 발을 붙들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하늘의 권위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약속입니다. 능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랑입니다.


IV. 공관복음 본문 비교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즉, 공관복음에 다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세 본문을 비교해 보면 또 다른 심오한 진리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 마가복음에서는 이 맹인의 이름이 바디매오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② 특별히 마태는 맹인이 하나가 아니라 두 맹인이 있었다고 말해줍니다. 

마태복음 20:29-30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한 사람의 맹인이 있었는데 마태복음에는 두 사람의 맹인이 등장합니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언급된 바디매오는 담대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나 마태가 언급한 제2의 맹인은 대단히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여기 제2의 맹인 즉, 바디매오 뒤를 따라만 갔던 그도 눈을 뜬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바디매오처럼 부르짖지는 못했어도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제2의 맹인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소심하여 하나님의 교회에서 적극적인 사역자가 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주의 은총을 덧입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언제나 앞질러 달려가며 부르짖고 외치며 전진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소극적이고 조용하게 뒤를 따라오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서 이 모든 사람들을 능히 구원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메시지에 상당히 여러분이 위로를 얻고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③ 이 본문들을 비교해 볼 때 한편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누가복음의 본문과 마태복음의 본문은 계속된 다른 두 사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3명의 맹인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먼저 바디매오가 예수께 부르짖어 고침을 받고 이 소식을 들은 다른 두 맹인이 여리고 성 출구까지 뛰어나와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한 것처럼 똑같은 방법을 쫓아 같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은혜 받았다는 간증과 소식을 들을 때 나도 그곳에 몸을 담고 달려가는 것. 참 귀한 믿음입니다. 


V. 본문이 주는 의미

그렇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신 예수님은 두 사람도 구원할 수 있고,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께서 세 사람, 삼천 명, 삼만 명도 능히 살리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똑같이 눈을 떴지만 바디매오 한 사람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바디매오 한 사람만이 눈을 뜬 후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열 두 제자를 따라 복음을 전하며 따라 나선 것 같습니다. 그가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다. 내 영혼이, 내 삶이 어느 때 고갈되고 지칠지 모릅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은혜를 받아 두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은혜 받는 사람은 기회를 붙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바디매오의 생애에서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 이 여리고 성을 통과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이 길을 지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의 이름을 불러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여리고 성은 일찍이 여호수아를 통해 기적이 일어난 현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여리고 성에 머물러 서서 오랫동안 닫혀있던 맹인의 눈을 여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시간 그 예수님을 당신의 여리고 성 앞에 머물러 서게 하십시오. 시험은 물러가고 문제는 해결되고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VI. 사탄은 기적이 일어나도록 구경만 하고 있을까요?

① 보십시오. 역사를 방해하는 방해의 말들이 난무했습니다.

“잠잠하라.  시끄럽다.” 만약 바디매오가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듣고 ‘그렇다. 나는 팔자가 맹인이요 거지니 내가 무슨 큰 소리를 지르겠는가?’ 그냥 주저앉았다면 그는 평생 거지로, 맹인으로 보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보면 바디매오는 낙심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부르짖음이 예수께 들리게 되었습니다. 

공은 때릴수록 더 높이 튀어 오릅니다. 용수철은 힘있게 눌릴 수록 더 힘있게 솟아 오릅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려는데 방해들이 있습니까? 은혜를 무너뜨리려 하는 사단의 공격들이 있습니까? 무서운 핍박이 있습니까? 한 걸음 더 힘을 내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들으실 때까지 계속 부르짖어 보십시오.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한 악마가 은퇴하면서 그가 오랫동안 사용하던 무기를 경매에 붙여 팔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사 가지고 갔는데, 낡고 오래된 무기 하나는 너무 너무 비싸서 감히 아무도 사갈 수 없어 아직도 마귀들의 손에 들려서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낙심”이라고 하는 무기입니다.

힘없어 보이고 낡아 보이는 무기지만 이 낙심의 무기에 한 번 공격을 받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쓰러지고 맙니다. 지금도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실패자다.  너는 다시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 그러나 여러분, 사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구약의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가면서 갑절의 영감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두 번씩이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엘리야를 따라가므로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결국 갑절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은혜의 생활에는 언제나 방해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 넘지 못하면 신령한 은혜의 자리는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만나기를 원했지만 약점이 있었고 방해물들이 있었습니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예수를 볼 수 없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키가 작아” ;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들 때문에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 ; 환경 때문에 예수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삭개오에겐 어떤 약점도, 환경적인 제약도 은혜의 방해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의 발길이 멈추어 섰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예배가 바디매오처럼 여러분 모두의 영혼의 눈이 열려지고 엘리사처럼 갑절의 영감을 받고,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모시는 기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겉옷을 벗어 던졌다

그곳에 머물러 서신 예수께서는 드디어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바디매오는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자신의 겉옷을 내어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께로 달려 나갔습니다. 바디매오의 겉옷은 그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비록 냄새나고 더럽지만 그것만이 바디매오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름 앞에는 이것마저 초개와 같이 벗어 던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받고 성령받기 위해서라면 허위허식의 겉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장애물을 내려놓고 달려 나오십시오. 위신과 체면을 벗어버리고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십시다.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는 자기를 포기하는 용기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운명을 바꾸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낡은 옷 벗어 던져야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사는 사람 중 한 부류는 이북출신들입니다. 그들은 6.25때 유엔군이 북한에 있다 철수해 내려올 때에 가산도 토지도 일가친척도 다 버리고 오직 예수 잘 믿겠다는 일념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맨손 맨발로 달려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달려 나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풍성함으로 갚아 주셨던 것이지요.


VII. 결론 : 예수께서 머무는 그 곳에 나도

“예수께서 머무는 그 곳에!” 여러분 생애 최대의 역사가 일어 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머물러 서게 할 수 있는 기도만 내게 있다면 우리의 문제는 당장이라도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공의 사다리는 언제나 예수의 발길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올 새봄에 준비된 성공의 사다리에 여러분 모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알파코스 안에 찾아오신 예수님, 은혜의 동산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령 수양회 때마다 기뻐 춤추시며 임하시는 성령님을 저는 봅니다. 

치유수양회, 시냇가에 심은 나무 과정, 행복한 전도학교와 성경대학과정 등에 동참하시어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 한 심령에 머물면 그 사람에게서 부흥이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 한 교회에 머물러 계시면 그 교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 한 나라에 머물러 계시면 그 나라에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머무는 그곳에」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습니다.
  부흥이 있고 기적이 있습니다.
  오, 예수님, 지금 제 곁에 머물러 계시옵소서.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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