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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이티 재난을 통한 하나님의 교훈 (고전 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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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재난을 통한 하나님의 교훈 (고전 10:1~13)


아이티에서 일어난 지진은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십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또 살아남은 사람도 굶주림과 목마름과 슬픔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돕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해야 되는가?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결국은 같은 맥락일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온 세계의 시선은 테러 ․ 문명의 충돌 ․ 전쟁에 집중돼 있었는데 아이티의 지진으로 말미암아 모처럼 이웃을 돕는 일에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같은 나라는 이제 우리의 관심에서 좀 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 중의 하나는 싸우는데 힘을 쏟지 말고 사랑하는데 힘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베트남전쟁 반전 구호에 ‘make love, not war - 사랑을 하고 전쟁을 하지 말자’는 구호가 있었던 것처럼 이번 재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싸움과 갈등에 힘을 쏟을 게 아니고 사랑하는데 힘을 쏟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메시지입니다만 이보다 강력한 메시지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차이점, 이질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같은 면과 동질성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아이티 사람들은 우리와 인종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지진으로 이렇게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다른 점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다른 점은 사라지고 우리와 같은 면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요 형제요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우리도 마음이 아픈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우리는 평소에는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다가 누가 재앙을 당할 때만 그런 진리를 깨닫는다는 사실이에요. 평소 우리의 마음은 돌처럼 꽁꽁 닫혀 있다가 누가 이런 큰 환란을 겪는 것을 봐야 비로소 마음이 열리고 긍휼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되니 이런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심각한 빈부의 격차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심각한 빈부의 격차. 이것은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빈부의 격차입니다. global, 지구촌 차원에서의 빈부의 격차입니다. 아이티 국민의 60가 하루 2달러로 생활하고 또 인구의 반이 문맹이고 그리고 진흙과 버터를 섞어서 만든 쿠키를 먹으면서 배고픔을 달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빈부의 격차를 이 시대에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직시하고 여기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되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 자체가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누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저 간절한 마음, 도와야 되겠다는 그런 간절한 심정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스마트한 방법을 강구해야 됩니다. 아이티가 당면한 문제는 아무리 사람들이 도움을 주려고 해도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구호품을 전달해주려고 해도 비행기 활주로가 모자라서 비행기가 내릴 수가 없어요. 비행기가 내려도 구호품을 옮길만한 트럭이 없어요. 트럭에 싣고 옮기려고 해도 휘발유가 없습니다. 휘발유가 있더라도 그것을 펌프할 수 있는 전기가 없어요. 어디에서부터 시작할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려고 해도 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저 돈을 주고 잊어버리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체계적이고 구조적이고 스마트한 방법을 강구해야 됩니다. 

요즘 스마트폰이 인기를 끄는 것처럼 구호활동도 스마트해져야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이웃을 돕는 모든 것도 스마트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이 사랑으로 다 전달되지 못하고 또 우리의 순수함을 사람들이 순수함으로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기반 시설, 인프라, 이런 것부터 갖춰 나가면서 기본적인 제도와 시설을 마련해 주어야 고질적인 가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스스로 도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티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도 그렇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국제 구호를 받는 것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근본적인 차원에서 가뭄의 문제 ․ 물 부족의 문제 ․ 에너지 ․ 교육 ․ 부패 ․ 폭력 ․ 혼동 ․ 질병,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전에는 고질적인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아이티의 상황을 북한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휴전선이 열리고 남북이 통일되는 날이 올 텐데 통일 이후에 우리의 과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우려면 아이티 재난 복구하는 법을 지켜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티와 북한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아이티는 국가 자체가 존립을 위협받을 수 있는, 국가 자체가 무너진 상태이지요. 북한과 비슷한 것입니다. 

아이티가 이런 재난을 당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혼자 방치돼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나라와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염려하고 또 도우려고 모여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그리고 죽도록 방치돼 있었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그를 도와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기적을 일으켜서 그 사람을 도와준 게 아니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보내서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선한 이웃이 있었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불쌍히 여기고 다가가서 도와주는 선한 이웃이 있었어요.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도우면서 살라는 그런 인본주의적인 가르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선한 이웃이 돕고 싶은 마음을 갖고 불쌍한 마음을 갖고 또 도와줄 수 있는 입장에 있고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그건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 사람 마음속에 돕고자 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잊지 않으시고 도와주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게 아니고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아무도 찾아와주지 않고 아무도 돕지도 않고 도울 수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없든지 하나님이 무력하다는 얘기가 되겠지만 누군가가 찾아오고 도와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은 거기에 벌써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는 것입니다. 열왕기상을 보면 바알의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뛰놀면서 바알의 이름을 불렀는데 아무도 듣지도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바알은 도와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돕고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 거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많이 있는데 그중의 한 자식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형편이 넉넉한 형님 ․ 누님 또 동생, 이런 형제들이 많이 있다면 그 부모님은 별로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도와주기만 해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고 형제도 없고 누이도 없고 도와줄 수 있는 형제는 아무도 없고 자식 하나뿐이라면 그렇다면 부모가 염려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티가 큰 고난을 당했지만 아이티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그 많은 나라와 많은 사람들이 돕고자 하는 것 우리는 사람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기 쉽지만 원래 사람은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 예외적인 것입니다. 돕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그게 그래서 선한사마리아 사람 비유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관심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았어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갔어요. 두 명이 지나가고 한 명이 관심을 가졌어요. 거기에서 인간의 선한 면 그리고 그 선한 면은 결국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비극이나 재난을 접할 때 ‘아, 이런 일을 보니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세상의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정작 고난을 당한 당사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데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있다 없다, 이렇다 저렇다 말하느냐.’ 정말로 그렇습니다. 

욥기를 보면 고난을 당한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데 정작 아무 고난이 없는 세 친구가 찾아와서 하나님이 있으면 왜 이런 일이 있느냐는 둥, 당신이 뭘 잘못한 게 있으니까 이런 일이 있다는 둥, 이런 식으로 떠벌리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교만이요 지적인 허영인 것입니다. 이번 아이티 재난도 정작 아이티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당하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고 개중에는 우리가 회개해야 됩니다 라고 믿음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멀찌감치 서서 자기는 아무런 고난을 겪지 않은 팔자 좋은 사람들 중에 아,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너무하지 않느냐, 이런 식의 논리를 펴는 사람이야말로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이고 교만한 것입니다. 

이차 세계대전 중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프랑클 박사처럼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 깊어지고 신앙의 힘으로 절망을 이긴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걸 당해보기 전에는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반드시 자기의 소원을 이루고 자기의 환경이 좋아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슬픔을 겪고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팔자 좋은 사람들은 왜 교회 안 나가고 왜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을 텐데 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논리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원래부터 예수님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씀하시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이든 질병이든 아픔이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을 낳는 게 아니고 오히려 성경적으로 봤을 때는 그런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간의 연약함으로 방치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없다는 얘기가 되겠지만 인간의 연약함을 통하여 자기보다 더 크신 분을 의지하고 알게 된다면 그것은 숨겨진 축복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민주주의와 인권과 경제가 발전하고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그것이 인류에게 큰 혜택을 준 것은 사실인데 동시에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면 고통을 용납할 수 있는 분량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옛날에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사람들은 그걸 그냥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였어요. 요즘에는 한두 명만 굶어죽어도 사람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옛날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었어요. 요즘에는 한두 명만 죽어도 여론이 떠듭니다. 오죽하면 무인항공기 ․ 무인정찰기 ․ 무인로봇 ․ 무기를 가지고 사람을 대신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을 연구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이제는 인명피해라는 것이 큰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됐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어떤 불편함, 작은 희생이 있어도 여론이 그걸 참지 못하고 들끓어요.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이 정부에 대하여 또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은 극대화되는데 본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극소화되는 그런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천년 전에 사도바울은 오늘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5절 말씀에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8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9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리고 11절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 말세를 당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 주장을 펴는 사람이 다름이 아닌 사도바울이에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준 사도바울도 이런 말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십일 세기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목회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이런 말을 담대히 할 수 있을지. 우리는 움츠려들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거부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무하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간이 부은 것입니다. 우리의 간이 부었어요. 우리는 너무 편한 것, 쉬운 것, 비위에 맞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과거에는 하루에 이만 삼천 명씩이나 벌을 받아 죽을 때가 있었고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모순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래야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 이런 일을…,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만 13절의 말씀을 유념해야 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랍비 쿠시노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고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넉넉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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