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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출 40:38, 행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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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출 40:38, 행 16:1~5)


지난 해 말 캐나다 앨마의 성안드레 장로교를 찾았습니다. 이 교회는 게일 목사님을 한국에 파송한 교회입니다. 우리교회 1대 목사님을 파송한 그 교회는 너무 작아 은혜로웠습니다. 7년 전 영국 웨일즈의 하노버교회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목사님을 파송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도 작은 교회인데 그 날 30여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날은 아주 많이 모인 날이었는데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했다가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영어로 설교하는데 사실은 회중석에는 한국인이 더 많았습니다. 이 작은 교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는 사이즈(규모)가 아닌 내면의 믿음과 열정 때문입니다. 
  
교회의 원형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의 성막입니다. 60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은 턱없이 작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길이가 100규빗이었으니 50미터 정도밖에 안되었고, 너비가 50규빗이었으니 25미터 정도였습니다. 아주 작은 집이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세우고 정착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성막을 대신하였습니다.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완공하였을 때 하나님은 또 그렇게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초대교회는 무형적인 교회였고, 가정이 교회였고, 지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 이후에 교회는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현재와 같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런 교회의 변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집이 그 때마다 모습을 달리했지만 하나님은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성막이나 성전이나 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공통점은 하나님이 그 집을 완성한 다음에 기뻐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집에 영광이 가득하게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교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은 집입니다. 성경에는 반복해서 성막을 짓는 과정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하였더라”는 말씀이 계속됩니다. 
  
지금도 이 땅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가 설 때마다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인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를 보세요. 그 당시의 교회들은 규모로는 엄청났습니다. 외형적인 화려함을 갖추었습니다. 갖출 것은 죄다 갖추고 빠진 것이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눈에는 가난했고, 가련했고, 부족했습니다. 화려한 외형에 비하여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지금의 터키인 옛날 소아시아에 가보면 옛날 화려했던 교회의 폐허가 남아 있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의 폐허에 가보면 기둥 하나가 두 사람이 껴안을 정도로 굵고 큽니다. 그 기둥으로 봐서 그 교회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빌라델비아교회에 대한 말씀은 칭찬밖에 없습니다. 아마 당시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그 좋던 교회가 사라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을까요?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는 성 소피아 사원이 있습니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이 세운 화려한 성당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투르크족에 의해 이슬람에게 넘어간 교회입니다. 아름다웠던 성화들이 다 훼손되고 지금은 이슬람의 흔적들이 내부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보실 때마다 하나님이 슬퍼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형편없는 인간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하고 교회 안에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제외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나의 불완전, 나의 부족, 실수로 하나님의 교회가 기쁨이 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합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 우리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우리가 교회를 잘 지켜나가고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규례를 잘 지키는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4절에는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라고 합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이방인의 할례문제로 총회에서 결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 엄수를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가서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이 유대주의적 폐쇄성을 버리고 이방인을 한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결정 사항을 의미합니다. 총회가 결정한 것을 자키게 하였습니다. 
  
규례-란 말은 헬라어로 ‘도그마타’로 누가복음에 3회, 바울서신에 2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생각한다’는 의미의 ‘도케오’에서 나온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로마 황제의 칙령을 뜻했으나 여기에서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사항을 가리킵니다. ‘교리’를 뜻하는 ‘도그마’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결정사항을 준수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사회에서 서로가 지켜야 할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이 시민의식입니다. 서로가 지켜야 할 규칙들은 서로의 약속입니다. 초록 불에는 가고, 빨강 불에는 서는 것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안 지키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거리를 우측보행하자고 합니다. 이것도 서로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서로가 불편합니다. 규칙을 뜻하는 ‘rule’의 어원은 회초리(rod)를 뜻하는 라틴어 ‘rugula’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신 것이 규례입니다. 이 규례는 잘 지켜야 합니다. 출애굽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율법조차도 필요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규례가 필요합니다. 규례를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10계명입니다. 이 10계명을 613개의 계명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의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의 조례는 39가지나 되었습니다. 200규빗 이상 걷지 말라는 조례도 있고, 안식일에는 우물에 물을 깃지 말라는 조례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셨습니다. 밀밭 사이를 가시가다 밀을 따서 손을 부벼 드셨습니다. 손으로 따는 것이 계명을 어긴 것이고, 부비는 것이 또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6에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다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보장 없는 명령은 없습니다. “보모님을 공경하라 그리하면 장수하리라”고 하십니다. 
  
시편 89:31-32에는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규례를 어기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하신다고 합니다. 레위기 4장에는 누구든지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면”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이 계명을 범하면 수양을 잡아야 합니다. 회중이 계명을 범하면 수송아지를 잡아야 합니다. 족장이 계명을 범하면 숫염소를 잡아야 합니다. 평민이 계명을 범하면 암염소를 잡아야 합니다. 왜 잡아야 합니까? 잡는 게 뭐지요? 죽인다는 뜻입니다. 왜 짐승을 죽입니까? 나를 죽이는 대신 짐승을 죽이는 것입니다.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면 이것은 하나님께는 큰 죄입니다. 
  
수도승의 격언에는 “방법이 없이 싸우는 자는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사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필요한 규례가 필요합니다. 라틴어의 규율이라는 뜻의 ‘disciplina’는 가르침, 수업, 훈육, 질서 그리고 무엇에 다가가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규율이란 질서와 방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규례는 지켜야 의미가 있습니다. 규례는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키지 않는 규례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우며 방해꺼리가 될 뿐입니다. 
  
규례 혹은 규율은 훈련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훈련이란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discipline’이란 말은 훈련이라는 말인데 책벌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책벌은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훈련의 의미입니다. 
  
우리교회의 1914년 얘기는 감동적입니다. 그 옛날에는 교적부 제일 뒤쪽에는 책벌부가 있습니다. 그 해에 두 사람이 벌을 받았는데 한 분은 음주하고 부녀자를 희롱하므로 출교를 당했습니다. 또 한 분은 집사인데 주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벌을 받았습니다. “집사로서 주인을 불수하므로 책벌함”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원래 칼뱅이 훈련을 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크고 작은 규례를 지키지 않는 것은 벌을 주었습니다. 벌은 곧 훈련이었습니다. 그 때는 벌을 주었고 벌을 받았습니다. 
  
치리가 살아야 교회가 삽니다. 훈련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벌을 줄만한 권위가 있어야 하고, 벌을 받을만한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벌도 주지 않고 벌을 받고 있을 교인도 없습니다. 우리교회 가까이에도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는데 벌을 받고 우리교회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규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든 규례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만든 규례지만 성경에 근거하여 만든 것입니다. 총회나 노회가 당회가 만든 규례도 모두 지켜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 만든 법을 지키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말을 잘 들으면 아버지가 기뻐하듯이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가 말을 잘 들으면 기뻐하십니다. 규례를 잘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됩시다. 

  
둘째, 믿음이 굳건해 지고 성장하는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5절에는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고 합니다. 규례를 잘 지키는 교회의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사항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의 결과는 믿음이 굳건해지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총회, 노회, 당회의 결정은 순종하여 지켜야 할 책임이 모든 성도에게 있습니다. 이런 순종하는 자세가 교회가 굳건해지는 비결입니다. 
  
어떤 결정이 있으면 온 교회가 하나가 되어 일사분란하게 일치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의 몸을 보세요. 다리가 둘이지만 한 방향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눈이 둘이지만 같은 쪽을 봐야 바르게 보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가 되고 일치해야 몸이 건강한 법입니다. 
  
빌립보서 2:2에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합니다. 마음도 사랑도 뜻도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면 교회가 재미있고, 일이 잘 되고, 믿음이 굳건해지고, 교회가 성장합니다. 
  
에베소서 4:3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가 될 때에 기뻐하십니다. 몸인 교회는 몸이 하나 되어야 성장합니다. 우리 몸의 장기가 각각 다르게 움직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 건강하지 못합니다. 
  
최근에는 건강한 교회를 많이 말합니다. ‘교회건강’이 화두입니다. 일반적으로 요즘에는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부자 되세요”를 제치고 “건강하세요”가 차지했습니다. 요즘에는 웰빙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웰빙이 돈이 많은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화목하고, 평안하고, 질서 있고, 조화를 이루고, 관계가 바르게 설정되어 있는 상태가 웰빙입니다. 
  
교회성장은 이루었지만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건강한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성장에 대한 비전을 가진 목회자가 있어야 하고, 교회성장에 대한 비전을 가진 성도가 있어야 하고, 절대 고칠 수 없는 고질적 병(terminal illness)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건강과 장수의 비결을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어느 왕이 모든 의사들을 모아놓고 건강과 장수에 대한 모든 지식을 책으로 집필하라고 하였습니다. 1만 페이지가 없는 많은 양의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왕은 너무 많으니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두꺼운 책이 되었습니다. 왕은 다시 요약해서 오라고 했습니다. 1천 페이지의 긴 글을 한 페이지로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페이지도 많았습니다. 왕은 다시 간단히 한 줄로 줄여서 오라고 했습니다. 의사들이 모여 건강과 장수의 비결을 한 줄로 만들었습니다. “발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우리 할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머리는 차갑고, 발은 따습고, 배는 좀 골아야 한다고요. 머리는 항상 이성적이고 냉철하고, 발은 부지런하고 뜨거워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믿음이 있지만 믿음이 약하면 금방 변질되고 맙니다. 굳센 믿음을 가져야 변하지 않고 든든합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령이 있다는 것과 성령 충만은 다릅니다. 우리는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건강수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최근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78.6세입니다. 그런데 건강수명은 68.6세입니다. 한국인들은 10년간은 질병과 사고로 인한 통증, 신체적 불편, 정서적 불안 및 우울감에 시달린다는 것입니다. 남성의 기대수명은 평균 75.1세이지만 건강수명은 67.5세로서 7.6세 차이가 납니다. 여성의 기대수명은 81.9세이지만 건강수명은 69.6세로서 12.3세 차이가 납니다. 국민 41%가 만성질환을 경험했고 비만도 23%나 된다고 합니다. 10년 정도는 아프게 살다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한삼서 2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믿음이 굳세어지고,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랜 세월 거룩한 장소였던 성전이 종교적 과시의 노천 화랑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대형건물을 보세요. 화려한 장식과 아름다운 건축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나라가 유럽교회처럼 쇠퇴하면 예배당은 박물관이나 관광지로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래학자 레너드 수윗은 ‘기성교회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교인수가 제일 적은 교회를 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요즘의 기성교회들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주류교단들은 전자기술이나 스크린이나 디지털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변화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교단은 경직성을 가지고 있고 배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교단을 탈퇴하기도 하고 교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병들고 죽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사람이 찾지 않는 곳으로 전락합니다. 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그러하고, 지금 유럽의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쇠퇴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건강하고, 믿음이 굳건하고, 성장하는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결론 

어느 목사님이 쓰러지셔서 증환자실에 계신 경험을 얘기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위로 가느냐, 아래로 가느냐 하는 초절박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로 올라가면 일반 병실이고, 아래로 내려가면 영안실입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삶입니다. 우리 사회는 중증사회입니다.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사회가 위로 올라가게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40:38에는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고 합니다. 교회는 삶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희망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온 세상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희망을 말하고, 교회가 가는 길을 세상이 좇아오고, 교회가 하는 일을 세상이 박수치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이 삶의 지혜를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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