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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전의 하나님 (창 41: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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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하나님 (창 41:41~43)             
  

들어가는 말

운동경기에서 가장 짜릿한 승리감을 느낄 때는 역전 승리를 거둘 때입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 때 우리나라와 이탈리아 8강전.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려 그 때를 회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예콰도르 주심의 휘슬소리와 함께 이탈리아와 우리나라의 8강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피드와 조직력에서는 우리가 앞선다고 했지만 역시 이탈리아는 빗장수비와 세계적인 공격수 비에리와 토티의 활약으로 분명 우리보다 실력이 한 수 위에 있었습니다. 
초반부터 어렵고 힘든 경기는 계속되었고, 전반 4분 안정환의 패널티 킥 실축은 우리나라의 불행을 예고하는 듯 했습니다. 
곧 이어 비에리의 헤딩골은 온 국민의 심장을 멈추게 했습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들이 흘러갔습니다. 

어려운 상황은 계속되었고, 그 상황은 후반이 되어서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몇 번의 위기와 몇 번의 기회가 찾아왔으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경기는 그대로 끝날 것 같았고 희망은 점점 사라져갔습니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후반 종료 3분전! 
설기현의 천금 같은 동점골은 이탈리아의 빗장을 열었습니다. 

선수들과 온 국민은 기뻐하고 열광했습니다.
저도 아이들을 서로 부등켜 안고 어린이처럼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실제로 그 순간 심장마비로 4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 후 연장 후반전에서 이영표의 센터링을 받은 안정환이 머리로 골든골을 만들어 경기는 우리나라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다 생각나시지요?
실로 대역전의 드라마였습니다. 
오늘은 축구 경기 같은 우리의 인생을 요셉의 삶에 비추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대역전 드라마의 명감독이십니다. 

기독교는 끝이 좋은 종교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대역전 드라마의 명감독이십니다. 
마28:18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주님은 모든 일을 콘트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셨는데, 드라마로 말하면 감독이라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하나님은 happy ending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셉을 예로 들어보지요. 
요셉의 인생은 역전의 인생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요셉은 야곱이 나이가 많이 들어 얻은 자식이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더 끔찍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른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형들이 양을 치는 들판으로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을 왔을 때 그 형제들은 차마 요셉을 죽이지는 못하고 이스마엘 장사꾼에게 팝니다. 
창 37:28절 “그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그 후 13년간 요셉은 갖은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대역전 드라마의 명감독이신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창 41:41-43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수레에 그를 태우며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요셉은 어떻게 해서 성공했습니까?
지식이 많았습니까? 경험이 많았습니까? 힘이 장사였습니까?
창세기 39:2-3절은 그 성공요인을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창41:52절에서 요셉은 아들 둘을 낳고 그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습니다.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자식을 낳아 그 동안의 자기 인생살이를 결산하면서 지은 이름이겠지요?
‘에브라임!’
나 자신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 번성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드라마의 명감독이셨습니다.

삼상18장 이하를 읽으면,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는 재미있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그의 손에 수금을 가졌습니다.
수금이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하는 악기입니다.
손에 수금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의 손에 창을 가졌습니다.
손에 항상 창을 지니고 다닌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몇 군데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삼상 18:10절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 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삼상19:9절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삼상 22:6절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다윗의 손에는 수금이 있었고, 사울의 손에는 창이 있었습니다.
결국 누가 이겼습니까?

수금이 이겼습니까? 창이 이겼습니까?
손에 수금을 가진 다윗이 이겼습니까 아니면 손에 창을 가진 사울이 이겼습니까?
창을 든 사울이 이길 것 같지요?
다윗이 이겼지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이겼습니다.

신천옹이란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새 중에서 가장 오래 살고, 오래 날고, 멀리 난답니다. 
이 새의 날개 길이는 3미터 정도 되는데, 날 때의 에너지를 보면, 10%는 자기의 힘이고, 나머지 90%는 바람의 힘이랍니다.
바람의 힘으로 나니 힘이 들지 않아요.

그래서 오래 날 수 있고, 멀리 날 수 있고, 에너지 소비가 적으니까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믿을 신) (하늘 천) (늙은이 옹)입니다.
하늘을 믿고 나는 새입니다.
그런데 벌새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참새와 같은 작은 새인데 날개 짓을 1초에 80번을 한답니다.

오로지 자기 힘으로만 날려고 하니 멀리 날 수도 없고, 오래 날 수도 없습니다.
전깃줄에 앉았다가, 울타리에 앉았다가, 땅 바닥에 앉았다가 10미터를 못 날아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힘으로 살려고 하면 오래 못 갑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야 오래 갑니다.
그런데 성도가 자기 힘으로 살려고 발버둥 쳐요.
“예수가 밥 먹여주나?”라고 빈정대면서 말입니다.
매사가 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치유하심이, 열어주심이, 구원하심이, 승리케 하심이, 역전되게 하심이, 열광케 하심이 우리 주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2. 승리의 결과를 확신하면 과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그날 저녁 재방송을 통해 다시 한 번 봤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침의 긴장과 초조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여유를 가지고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까지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가 아무리 잘해 슛을 쏴도 떨리지 않았고, 우리나라가 문전의 위기상황을 맞아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2:1로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난리를 쳐도 우리는 2:1로 이깁니다. 
무엇이든 결과를 알면 불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불안은 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질병 때문에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러다가 망하는 것은 아닌가? 
이 길로 가다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요셉의 과정을 보십시오.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과 질시로 애굽에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는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머지않아 그곳에서 총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는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머지않아 그곳에서 총리로 발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알면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질병, 가난, 실패, 고난, 역경-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이미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 시나리오에 좋은 것으로 마감해놓았습니다. 
롬 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good=좋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이미 우리 삶이 좋은 것이 되도록 마침표를 찍어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번 ‘감리교 선교사후보자 현지 집중훈련’ 강사 중에 ‘예산 제일 교회’의 이기철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신학대학원 한 학기를 남겨 놓고 목회를 위하여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춘천지방 감리사로부터 개척할 곳이 있으니 방문해달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감리사가 안내하는 곳은 농촌마을이었습니다.
개척할 장소는 어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고 있는 농가였습니다. 
안방에는 할아버지 내외분이 사시고 사랑방에서 교회를 개척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사가 살 사택은 거기로부터 50미터 정도 떨어진 외양간에 붙은 단칸방이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부엌이 없어 부엌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여름철에는 바깥에서 밥을 해먹기 때문에 부엌이 필요 없고, 겨울철에는 비닐론으로 바람막이를 하고 쓰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랍니다.
감리사님이 ‘개척해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도저히 대답할 자신이 없어서 삼일만 시간을 주시면 기도해보고 전화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도저히 갈 자신이 생기지 않더랍니다.
자기 자신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아내가 12월이면 첫아기를 낳게 되는데 부엌도 없는 데서 아기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일 수 없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삼일 후에 감리사님께 ‘못 내려가겠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한테 말했답니다.

“나 신학 공부하는 것 그만두겠다. 나는 목회자 감이 못된다.”라고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그곳보다 여건이 더 좋은 목회지가 나와서 내가 가게 된다면 그게 무슨 목회자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는 여건 때문이라면.......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러니까 나는 목회자감이 아니다. 그러니 당신도 이해해라.” 
남편의 얘기를 다 들은 아내가 이런 질문을 하더랍니다.
“당신, 그러면 앞으로 예배를 드릴 거냐?”
“그럼, 내가 사대 째 신앙인인데 예배를 드려야지.”
“그러면 예배를 드릴 때 기도할 거냐?”

“당연히 기도해야지”
“찬송을 부를 거냐?”
“찬송 불러야지.”

“그러나 당신은 평생 찬송가 387장은 못 부를 꺼다.”
옛날 찬송가 387장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라는 찬송 아시지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그곳에도 안 가면서 어떻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라는 찬송을 하겠느냐?”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평생 죄의식을 가지고 살겠더랍니다.
찬송가를 찢어버리기 전에는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겠더랍니다.
아내의 그 말 한 마디에 꼼짝 못하고 농촌에 가서 개척을 시작했답니다.
그분이 고백합디다.

“하나님은 좋은 곳으로 나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할 곳으로 나를 보내시더라.”
그분은 지금 ‘예산제일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규모가 작지 않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런 믿음 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을 텐데........”
사실 이 마지막 고백을 여러분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삶의 시련에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께는 승리의 마침표가 찍혀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불안합니까? 
긴 터널을 지날 때 두렵습니까?
아무리 인생의 터널이 어둡고 길다할지라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께는 승리의 마침표가 찍혀있습니다. 
여유를 갖고 기도하고, 기다리고, 기대하십시오. 
그런 새해가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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