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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전 2: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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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전 2:13~16)
  

시작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도 모여 예배하는 이 예배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또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여러분들에게도 느껴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예배는 여러분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관람하듯이, 연극을 구경하듯이 팔장을 끼고 앞에 선 목사를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목사가 대표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도 여러분이 기도와 찬송과 감사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느낌이 있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절대 다리 꼬고, 팔장 끼고 구경하듯이 앉아있지 마십시오. 뭔가 하나님에게 내가 드리는 느낌이 있는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는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내가 받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 앞에 절하고, 일방적으로 복을 빌기만 하고, 앞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는 그런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달리,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에게 대답하시고, 무엇을 구하면 우리에게 주시고 하는 서로 교통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라 그렇게도 표현합니다. 인격적인 목사님 앞에 나와서 여러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그 목사님이 눈감고 가만히 있으면 그게 인격적인 목사님입니까? 그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그 이야기에 대답해주고, 기도해주고, 같이 슬퍼하고, 아파해야 인격적인 목사님 아닙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이 시간, 더 넓게는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전체가 그저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섬기듯이 일방적으로 나 혼자 복 빌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그런 죽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무언인가 드리고 고백하고 찬양하고 바치고, 하나님께서는 내게 말씀을 주시고 뭔가 은혜를 주시고 주시는 것이 느껴지는 그런 신앙생활을, 그런 살아있는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배 순서에도 보면, 서서 찬송하고, 앉았다 다시 일어서고, 드리고 하는 것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겸손히 받고, 또 서서 드리는 것이 모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통함의 느낌이 여러분에게 느껴지는 예배이어야 살아있는 예배이고, 그런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 모두가 극장에 오듯이 구경만 하고 가면 아무런 은혜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여러분 하나마나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서로 가고 오고, 주고받는 것이 느껴지는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시간이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우리의 음성으로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이 이런 음성으로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이런 음성으로 대화하는 모습이 구약성경에 나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점점 죄가 쌓이면서,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하나님과 사이에서 희미하고 흐릿한 것이 생기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도 처음에는 귀가 참 밝다가, 나이가 들고 문제가 생기게 되면서 귀가 조금씩 안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도 지금 약간 안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TV의 볼륨도 나도 모르게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도 처음에 하나님의 음성을 인간이 듣게 되어 있었는데,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점점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시고, 특별한 소수의 영이 맑은 사람을 세우시고, 그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시대가 구약시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그 말씀을 잘 안 듣습니다.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중에 비상수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말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을 내가 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 스스로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 우주나, 자연의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을 수 있지만,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동안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도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들을 수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들도 이 땅을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 사도들이 문자로 남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 이 땅에는 예수도 없고, 선지자도 없고, 사도 없지만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하여 일주일 내내 살아도 성경 한구절도 안보고 그리고 다시 교회에 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사 어려운 성경 말씀을 해석하여 전하는 설교를 듣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성경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 어려운 성경말씀을 해석하고, 또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동떨어져 있는 배경을 가진 말씀을 우리 삶의 현장에 재해석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이 예배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몸 말

참 쉽지 않은 것인데, 이 성경말씀이 해석되어지는 설교를 통하여 말씀을 들음에 있어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내가 받아들임에 있어서 가장 문제 되는 것이 그 말씀을 전하는, 중계자의 역할을 하는 소위 목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를, 그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여기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인정하느냐에 따라 내게 전하여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지나가는 말로 들려지기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하는 바울의 편지를 인용하여 참 아름다운 믿음의 관계와 열매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13절의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가 쉬지 않고 감사한다’는 주체는 바울이고,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는 너희는 이 편지를 받는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멀리 떠나있게 되는데, 멀리 떠나 있으면서 바울이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함께 말씀을 전할 때, 너희가 나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은 것을 감사한다’그렇게 바울이 편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에 보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말하기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내 육체에 너희가 시험들만한 요소가 있었다. 어떤사람이 말하기를 바울이 어떤 때는 설교를 전하다가 간질이 와서 쓰러지고 그랬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모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나를 천사와 같이 대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된 것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이런 내용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다음의 문제이고, 내 마음의 자세가 그 말씀을 받는 내 마음의 자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도여러분, 이 목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고, 그것은 하나님과 목사와의 관계 문제이고,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이 설교의 말씀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지방에 있는 어떤 교회 장로님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장로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목사님, 우리교회 목사님은 설교에 문제가 있어요’ 설교를 잘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느날 책방에 가서 좋은 책들을 골라서 목사님께 전해드렸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그 책을 읽은 것 같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말씀 때문에 몹시 고민을 하고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반 농담으로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저는 그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장로님, 장로님이 지금 큰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병을 빨리 고치십시오. 그 병을 빨리 고치지 않으면 더 큰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심각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대조적으로 우리교회는 이거 제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럽습니다만, 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우리교회 어느 권사님이 자랑스럽게, 자신있게 어디에서나 말하는 말이 있는데, 20년전에 조목사님이 이 교회에 오신 것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자기는 그렇게 철썩같이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자기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고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누가봐도 그의 인생은 바뀌고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목사님을 보내셔서 말씀을 전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이 인간적으로 말하기를, ‘그래서 지금 내가 기도하기를 목사님의 노후를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오늘 설교하시는 목사님을 나를 위하여 보내셔서 오늘 말씀을 주신다는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데, 은혜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아무리 귀를 막고 안 들으려고 해도 은혜가 될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셔서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신다는 그런 믿음으로 받게 되면, 목사가 강단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는 영혼이 메마르고 강팍하여 성경의 표현대로 말하면,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라고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넬료는 그 당시에 로마군, 점령군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고넬료는 그런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이 경건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어엿이 여겨 환상을 보게하고, 천사의 음성을 통하여 저 남쪽 시몬의 집에 가면 베드로가 있을텐데, 그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그래서 고넬료가 그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순종해서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데리고 옵니다. 

베드로도 동시에 다른 환상을 보고 그 사람을 따라 고넬료의 집에 들어갑니다. 고넬료가 자기의 가족 뿐 아니라 자기의 친인척을 다 불러놓고, 베드로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베드로 앞에 덥석 무릎을 꿇고 절을 합니다. 베드로는 깜짝놀랍니다. 아니, 도대체 내가 뭔데, 나는 지금 지명수배를 받아 도망다니는 신세인데, 점령군의 지휘관이 자기 앞에 절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놀라 그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웁니다. 

이게 무슨일입니까. 나는 사람입니다. 그때 고넬료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지금 모두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베드로가 하는 말을 하나님이 하는 말씀으로 받겠다는 말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을 때에,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시고, 그들도 방언을 하게 되었을 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그 자리에서 세례를 베풉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베드로가 그 집을 찾아 간 것도 위험하고 쉽지 않은 일이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 뿐 아니라 그들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사도행전 15장에 가면, 그 일이 예루살렘에서 큰 시비거리가 됩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다시 그 때 일을 회상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막겠느냐. 합니다. 하나님이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는 것을 베드로가 체험하였던 것을 많은 사도들 앞에서 증거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도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어떤 사람이냐, 어떤 말씀을 잘 전하느냐, 못 전하느냐, 하는 문제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차원이 다른, 다른 문제이고, 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교인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설교자를 통하여 내게 주시는 말씀을 받겠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 하십시오. 하는 고넬료와 같은 이런 믿음의 자세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전하는 자를 탓하기 전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의 자세가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받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인간의 말만 가고 인간의 말로 여러분이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는 성령의 역사 하심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제일 처음 마게도냐, 곧 유럽으로 첫 발을 내딛는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보통 도시에 가면, 유대교의 회당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시아에서는 바울의 일이었지만, 마게도냐로 건너간 빌립보에는 유대교의 회당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물가에 가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곳에서 만난 여인이 루디아라고 하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 루디아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리고 그 루디아에게서 경제적이고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서 빌립보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결과를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록하기를 그 루디아,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여기저기 7군데에서 놀라운 일이 있을 때마다 표현하기를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2010년 우리교회는 오순절 다락방 같은 교회 되게 하소서 라는 표어를 갖고 있습니다.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미 2010년 첫 번째 주일에 사도행전 2장 1-4절의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이 충만하게 되자,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각기 자기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었다합니다. 그래서 그 때, 제가 설교하기를 이 때 놀라운 역사는 입의 방언의 역사가 아니라 귀의 방언의 역사다라고 그런 표현을 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오늘 이 제단에서도 오순절 다락방 같은 교회의 모습으로 말씀이 전해지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들려지는 여러분들에게 꼭 필요하고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 같은 교회는 말씀을 전하는 목사도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말씀이 전하여 져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 여러분도 성령을 충만히 받아 전해지는 말씀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필요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지도록 성령의 역사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교회가 오순절 다락방 같은 교회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를 탓하기 전에 내 마음이 열려있고, 성령이 내 마음을 여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말씀이 내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들려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예배할 때마다 절대로 구경꾼으로 앉아있지 마시고 내가 드리는 것과 내가 드리는 찬양과 내가 드리는 기도와 아울러 응답하여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시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망망대해에 배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지나가는데 저 앞에서 작은 불빛이 하나 보입니다. 그런데 점점점 그 불빛이 크게 다가오면서 배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잘못하면 이 배와 충돌하겠다 걱정이 되어서, 이쪽 배의 선장이 불빛을 비추면서 무전을 합니다. 우리가 큰 배가 지나가니, 우리 앞에 작은 배는 빨리 남쪽으로 30도 피하라. 이렇게 연락을 합니다. 그랬더니 저쪽에서 네가 피하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쪽 선장이 화가나서 나는 선장이다. 나는 선장이다. 네가 피하라. 그랬더니 저쪽에서 나는 일등병이다. 나는 일등병이다. 그래서 이쪽 큰 배에서 이것은 군함이다라고 합니다. 군함의 선장이며 적어도 중령이나 대령은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군함이다 그러니 일등병 네가 피하라 합니다. 

그랬더니 다시 대답이 왔습니다. 여기는 등대다. 여기는 등대다. 저쪽은 일등병 여기는 대령입니다. 그런데 저쪽은 등대입니다. 누가 피해야 하겠습니까. 아무리 저쪽이 일등병이라해도 등대면, 대령이 피해야합니다. 아무리 전하는 사람이 시원치 않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그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말씀 13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사람이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러하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서 또한 역사하느니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마음 속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일로 움직이고 역사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순절 다락방 같은 우리 교회는 여러분 예배드릴 때마다 절대 다리 꼬고 구경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여러분이 드리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받으시고 찬송을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그냥 있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줄 믿습니다. 

목사를 통하여 설교를 통하여 해석되어지는 말씀을 통하여 성경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때 그 말씀이 여러분 속에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 주시는 말씀을 받으면, 우리는 피할 길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가게 되는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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