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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창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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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회복하십시오! (창 13:1~4)  
 
   
: 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 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 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 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강에서 태어나 바다로 갔다가 다시 강으로 돌아온다는 ‘연어’ 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겨울 강바닥 자갈 틈에서 연어 알이 자랍니다. 연어는 겨울철에 알에서 깨어납니다. 봄이 되면 연어의 새끼들은 점점 자라 강을 따라 내려가 초여름쯤이면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다로 나온 연어는 차츰 북쪽을 향해 올라갑니다. 

북태평양에서 자란 연어는 바다에 나온 지 3년에서 5년이 되는 해의 가을 자기가 알에서 깨어났던 고향 강줄기를 찾아 돌아옵니다. 그리고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것이 연어의 일생입니다.
북태평양을 수 천 킬로미터나 여행을 하고 4, 5년이나 지난 뒤에 어떻게 제가 난 강을 기억하고 되돌아올까요?
   
연어는 태양을 기준 삼아 방향을 정하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는 물고기가 지구의 자기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제가 난 강의 냄새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연어가 어떻게 제가 난 곳을 찾아 돌아오는지를 다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제가 난 곳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로 돌아가는 존재입니까?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은 일요일에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주님의 날로 삼아 소중하게 예배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바로의 신하들은 아브람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아브람이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모든 재물을 거두어가지고 그 아내와 함께 애굽에서 나와 그가 내려왔던 곳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에서 ‘올라가다’[hl;[;/아라]는 말은 스스로 일어나 올라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애굽에서 쫓겨나서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처지였지만 그는 자리를 털고 스스로 올라갑니다. 내려가던 삶에서 올라가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삶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상황에 지배 받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하던 추락하는 삶에서 상승하는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1. 예배에는 혁명적 결심이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떠밀리듯이 살더라도 그 속에서 스스로 결심하십시오. 비록 낯 뜨거운 일을 겪었더라도 스스로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떠말려 가고 있다’고 수군거린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야 합니다. 기왕에 하여야할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총소리 한번 나지 않았어도 혁명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스스로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올곧이 살겠다고 결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일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예배의 감격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점점 관심이 없어지게 합니다. 결국 모이기를 폐하는 장기 결석자가 되게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에 속지 마십시오.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사는 삶이라도 호흡이 있다면 호흡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기왕 예배드려야 한다면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010년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예배하며 살겠다고 결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심만으로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에는 우리의 결심과는 다른 차원에서 예배 되어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2절입니다.
   : 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람이 오히려 가축과 은과 금을 많이 가진 큰 부자가 되어서 가나안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왠지 어색합니다. 여기에서 ‘풍부하다’는 말은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내를 수치스럽게 하고, 애굽의 왕을 속이는 일을 하고도 무사하였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악한 사람이 상 받고 선한 사람이 벌 받는 것이라고 분개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사실 아브람은 왕을 속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아니면 빨가벗겨서 내어 쫓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잃은 것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풍성해졌으니 말입니다.
   
바로를 속인 것이 드러났을 때 아브람의 목숨은 바로의 한마디에 달려있었습니다. 바로가 정말로 사래를 탐냈다면 아브람을 죽이고 차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과 왕실에 재앙을 가져온 사래와 아브람을 함께 죽일 권세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는 떠돌이 아브람의 생명은 바로의 손에 달려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심을 쓰듯이 아브람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움직여 모든 문제를 단지 아브람을 추방하는 것으로 매듭짓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잘못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죄를 들추어내셔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아브람이 더 이상 잘못되지 않도록 막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지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아는 것보다 아브람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믿음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예배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2. 예배에는 긍정적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믿음입니다. 비록 실패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역사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고 고백하였습니다.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두려움에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산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새로운 희망이 넘쳤습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는 실망할 수밖에 없지만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하였습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마귀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 상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만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벌 내리실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벌 내리실 것을 두려워하여 하는 봉사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수하는 아브람의 얼굴을 뜨뜻하게 하셨습니다. 바로의 입을 통하여 아브람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할 때 사랑의 매를 드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책망도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결심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로써 마땅히 좋으신 하나님을 더욱 깊이 믿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결단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3절 말씀입니다.
   : 3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애굽을 떠나는 아브람은 내려갔던 길을 되짚어 올라왔습니다. 아브람은 네게브에서 베델 쪽으로 옮겨가다가 전에 천막을 쳤던 베델과 아이 사이에 이르렀습니다. 내려갔던 길을 되돌아 전에 말뚝을 뽑았던 곳에 다시 말뚝을 박았습니다. 여기에서 ‘전에’[hL;jiT]/테히라]라는 말은 단순히 전에 지나갔던 곳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에는 ‘시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여행에서 첫 출발을 가리킵니다. 아브람은 처음에 장막 쳤던 곳 즉 첫 출발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원점,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하여 내려갔던 길을 되짚어 올라왔습니다. 그에게 결심도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었지만 몸을 움직여 올라오지 않았다면 그의 예배는 회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예배에는 구체적 행동이 필요합니다. 

예배드리기 원하신다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리에 몸이 나아와야 합니다. 몸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결심이 아닙니다. 몸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믿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회복을 위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예배는 이미 하나님을 만나 새사람이 되었다는 믿음과 확신의 자리입니다. 예배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의 자리입니다. 예배는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들어갈 희망을 다지는 자리입니다. 예배는 그 날까지 살아갈 용기를 얻는 소망의 자리입니다. 특히 주일을 지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출발하는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고, 새로운 삶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예수님을 믿은 순간 부활의 주님은 내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음으로 믿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십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로 이 부활의 신앙을 다시 기억하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체적인 몸짓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말씀을 마음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평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죠.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타성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잠언 말씀은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잠24:33) 라고 했습니다. 한 번 빠지면 두 번 빠지게 되고, 두 번 빠지면 세 번 빠지고 싶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타락한 인간의 속성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철근 한 개나 두 개를 덜 넣었다고 금방 표기가 납니까? 시멘트 몇 포대 빼먹었다고 금방 표시가 납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부실한 것이 드러나고 맙니다. 무지하게(=겁나게?) 바쁘고 분주해도 예배는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한번 빠진다고 금방 큰문제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부실한 것도 언젠가는 드러나고 맙니다. 그러면 아브람처럼 망신당하고 창피 당하고 힘들게 돌아오게 됩니다. 
   
지킬 수 있을 때에 지키십시오. 조금만 힘쓰면 돌이킬 수 있을 때 회복하십시오. 나중에 애쓰고 힘쓰고 어렵게 회복하게 되는 때가 없기를 바랍니다. 흔히들 사람은 가꾸기 나름이라고 합니다. 미장원에 가고 화장하면 사람이 달라져 보입니다. 속이 텅텅 비어 있는 사람도 가꾸어 놓으면 그렇듯 하게 보이는데 하물며 이미 그 속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신앙을 가꾸어 놓으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결심과 믿음이 행동으로 보이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배를 위한 결심과 믿음 그리고 우리의 행동으로 예배가 완성된다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4절 말씀입니다.
   : 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은 내려갔던 길을 되짚어 올라와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였던 일은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부르다’[ar;q/카라]는 말은 ‘오히려 만난 사람에게 가서 말을 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밀함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4. 예배에는 근원적 갈망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간섭하거나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며 갈망할 수 있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여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여야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른 예배는 우리의 행동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심 없이 우리의 행동만으로는 결코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한때 중국에 기근이 들었을 때 중경에 난민수용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팩스톤 부인이 그들 중 병든 난민들을 치료해주고 있었습니다. 팩스톤 부인이 그 비참한 난민들을 둘러보았을 때, 그들은 차가운 땅바닥 위에 밀짚으로 된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굶주림으로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팩스톤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이제 식욕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호품으로 갖고 온 쌀로 밥을 지어 수북이 담아 한 그릇을 가져다주어도 그들은 먹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굶주렸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음식에 대하여 갈망하는 단계를 이미 지나쳐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영적인 만족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나 관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영적인 형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이상 그 사람의 능력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너무 영적으로 허기가 져서 영적인 것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원하는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갈망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결심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우리의 행동과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함께 어우러져 온전한 예배가 됩니다. 우리의 결심과 행동 없이 예배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동하시지 않으면 예배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망하여야 합니다.
   
매일 제자는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매일 똑같은 신비스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갈망함으로써”
“그렇지만 저는 온 마음을 다 해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분을 못 찾았는지요?”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와 함께 강에서 목욕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물속에 밀어 넣고 눌렀습니다. 그 가엾은 제자는 풀려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리고 스승이 물었습니다.
“자네 머리를 물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숨이 막혀 그랬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숨 막히게 찾으면 하나님을 찾게 될 걸세.”

바른 예배를 위한 결심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순종하는 행동과 하나님께서 행동하시기를 원하는 갈급함을 가지십시오. 이를 통하여 예배가 회복되기를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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