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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물과 하나님 나라 (막 10: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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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과 하나님 나라 (막 10:23~31)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들의 어떤 모습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모습일까요?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이색적인 공모를 했습니다. 
‘영국 끝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비행기를 이용해서’라고 적어 보내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차를 이용해서’ ‘자동차를 이용해서’라고 적어 보내왔습니다. 
여러 가지 답이 나왔지만 영예의 1등은 바로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 손을 붙잡고 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의 손을 붙잡고 가면 아무리 먼 길도 가장 가까운 길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의 세상에 희망이 없어 보여도 힘들고 거칠고 험난해도 우리 주님의 손을 붙잡고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 손을 붙잡고 주님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왜 삽니까? 
한 사람이 예수께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한 자를 돕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만 있었다는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가난한 자들을 도왔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렇다면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법을 보게 되면 한편으로 생각할 때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선 학생들만 해도 이건 내 생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그렇게 여유 있게 살아가는 법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살아남는 법, 남을 뛰어넘어 앞서가는 법만을 배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잘 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웃을 생각해야 하고 이웃을 배려해야 하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훈련해야 하며 몸에 익혀야 합니다. 진짜로 우리와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세상은 결코 나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내 생각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조금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이웃을 먼저 생각해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웃을 위해 내가 양보할 수 있는 마음으로부터 질서가 세워지고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생겨지고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집니다. 하지만 나만을 먼저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 남는 것은 상처뿐입니다. 앞서 가는 자는 의기양양할 수 있어도 뒤처진 사람은 아픔입니다. 그러니까 앞서 가는 사람을 뒤에서 잡아당깁니다. 어떻게든 앞서가는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야 내가 앞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결코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기려고 하고 1등이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1등은 결국 1명뿐입니다. 나머지는 아무리 많이 있어도 다 이름도 없이 줄을 서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그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그래도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잘 했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주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하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재물이 있다는 것은 없는 자보다는 앞서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잘 살았기에 부모덕에 재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나은 직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업에 성공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지금 내게 재물이 있습니다. 재물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그 재물을 가지고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재물을 주실 때는 나만 위해서 내 가족만 위해서 쓰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이웃을 위해서 쓰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됩니까? 자식만을 위해서 한 평생 살았다고 하는 부모들 역시 그렇지만 자녀들이 그런 부모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을까요? 다 너희들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 한들 그들이 거기에 공감할까요? 결국 배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재물이 있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 재물을 가지고 풋풋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이 감칠 맛 나는 세상이 되도록 할 책임이 ‘있는 자’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기억할 것은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돈만이 아닙니다.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지혜 내게 있는 모든 기회 내게 있는 모든 은혜 남들보다 내게 더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재물입니다. 그것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이웃들의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게 되면 그로 말미암아 나는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이 사랑을 실천함으로 더욱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를 위하여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따라서 재물을 가지고 바늘귀를 크게 만들어나가는 일을 우리는 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심으라고 하면 그것을 부담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부담을 주기 위한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풍성히 거두게 되는 원리입니다. 씨앗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합니다. 심는 것과 먹는 것입니다. 농부치고 심어야 될 씨앗 다시 말해 종자를 먹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종자는 잘 간수하였다가 때를 맞춰서 파종을 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심는 것은 마치 종자를 논밭에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그리고 내가 심은 종자대로 거둡니다. 그러면 어디다 심습니까? 당연히 논밭에 심어야 되겠죠. 씨가 싹이 나서 잘 자랄 수 있도록 좋은 밭 옥토에 심어야 합니다. 그 옥토가 바로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세우신 주의 사자들이요 그리고 내가 붙잡아 주어야 하는 이웃들입니다. 심지 않고서야 어떻게 거둘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심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요셉이 칠년 가뭄으로 인해 헐벗고 굶주리게 된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종자를 먼저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뿌려 거둔 다음 오분의 일은 하나님 몫이요 나머지 오분의 사로 종자와 양식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적어도 오분의 일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십일조와 헌물입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복이냐 저주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부담을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버리라는 것은 그래서 없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백배를 주시고자 해서입니다. 한데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렇게 심는 것이 힘들다는 뜻도 됩니다. 그저 십일조와 헌물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젓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그래서는 결코 바늘귀가 커지지 않습니다. 바늘귀를 크게 만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주의 사자들을 잘 대접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가는데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놀려댑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그랬더니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다고 합니다. 아니 성질머리하고는 아니 그것 좀 그냥 참으면 어때서 그럽니까? 그 아이들이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거기다 대고 냅다 저주해 버려 아이들 사십이 명이나 곰에게 찢겨 죽게 만들어요? 하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부리시는 하나님의 종들도 존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하면 내가 두려워하고 높이는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종을 어떻게 얕잡아 볼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사장님을 존경한다. 아 그래서 오늘 점심 한 끼를 대접하겠습니다. 그래서 5만 원짜리 아주 고급 요리를 시켜서 대접을 잘 했습니다. 사장님 존경합니다. 대접 잘 받아서 고맙습니다 하고 작별을 하고는 사장이 돌아가야 되겠으니까 운전기사 차 가지고 나오라고 합니다. 근데 운전기사가 소식이 없어요. 알아봤더니 누구한테 맞아가지고는 마당에 쓰러져 있습니다. 

아니 누가 이렇게 내 운전기사를 두들겨 패서 이렇게 됐느냐? 알아보니까 그 사장에게 5만 원짜리 비싼 요리 대접 잘 한 그 사람이 사장의 운전기사를 그렇게 두들겨 패서 엎어 버린 겁니다. 그때 사장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내 운전기사 두들겨 팼거나 말거나 나한테 5만 원짜리 점심 대접했으니 고맙소 고마워 그러겠습니까? 아니면 여보시오 당신 날 가지고 조롱하는 거요 뭐요? 

아 당신이 나를 정말 그렇게 존경한다면 내 운전기사에게도 돈이라도 좀 줘서 설렁탕이라도 한 그릇 사먹도록 하든지 그렇게 안 할 테면 그냥 가만이나 두지 아 나한테는 오만 원짜리 점심대접하면서 내 운전기사는 이렇게 두들겨 패 가지고 내 앞에서 이 꼴을 만들어 놨으니 당신 날 대접하는 거야 날 조롱하는 거야? 사장이 어떻겠어요? 화가 날 거 아닙니까 그거는? 이 사람이 이거 참 우스운 사람이로구만. 이리 될 거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은 공경합니다 하나님은 높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 받듭니다 막 기도만 하면 청산유수처럼 엮어대고 앉는 자리마다 제 믿음 자랑을 하면서 정말로 하나님을 내가 이렇게 높이고 하나님을 내가 진심으로 높이고 공경한다면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하나님의 종도 내가 존경을 하는 것이 당연한 얘기가 아니냐.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부리시는 종도 대단한 게 못되겠지마는 내가 하나님을 정말로 높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그 높으신 하나님,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하나님의 종도 존경하는 것이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공경합니다. 하나님 자기가 잘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교회에서 교역자를 제일 괴롭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기도할 적에는 만날 하나님은 저 혼자 잘 믿는 것처럼 말하고 앉는 자리마다 제 믿음을 자랑하면서도 교역자 오는 사람마다 만날 쫓아내는 건 그 사람이 청부 맡아가지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거 어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거지 아니 하나님을 정말로 내가 대단하게 생각한다면 내가 대단하게 생각하는 그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 종이니까 그래도 대단히 대접은 못하지만 괴롭히지는 말아야 될 것이 아니냐 그말야. 그래 하나님은 자랑하고 뭐 자기가 제일 잘 섬긴다고 자랑하면서 교역자는 그냥 툭하면 괴롭히는 이건 뭐가 단단히 잘못된 얘기가 아니냐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회개할 사람들은 교회 밖보다 교회 울타리 안에 더 많다고 볼 수 있어요. 

반면에 보잘것없던 아주 가난한 사르밧 과부나 수넴 여인이 놀랍도록 복을 받은 것은 그녀들이 하나님의 종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기 때문임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한 성읍과 전토를 마련해 줄 것을 명령하셨고 또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제물을 가져다가 제사장의 몫으로 삼도록 하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이 축복의 바늘귀를 크게 키우는 비결이기 때문임을 기억하십시오. 

여기에 하나 더 이야기한다면 흩어 구제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부하게 될 수 있습니까? 이웃 사랑의 실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담아 내게 있는 재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를 부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부하기를 원하시면 흩어 구제하는 일 이웃에 대한 배려에 동참하십시오. 우리 교회가 결코 넉넉한 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제와 선교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쓰임 받는 방법이요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먼저 심음으로 말미암아 낙타가 통과하고도 남도록 바늘귀를 크게 만드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시원한 냉수가 뿜어져 나옵니다. 그러니까 동네 아낙들은 그곳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구어 깨끗한 옷을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 모습을 본 외국인들이 "당신들은 참 좋겠습니다.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쓰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모르긴 해도 당신들은 늘 하나님께 감사하겠군요?" 라고 묻자 뜻밖에도 멕시코 안내원은 "천만에요" 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 아낙네들은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온천과 냉천만 나올 것이 아니라 땅에서 비누까지 나와 주면 얼마나 좋겠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지요."
우리 속에 감사보다 불평이 많은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인해 감사하지만, 불신의 사람은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합니다. 우리는 평소뿐만 아니라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불평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할 줄 아는 자는 항상 그 은혜를 기억하며 여러 환난과 슬픔으로 고통스러울 때라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여호와께 구하게 됩니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 보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도우시고 순식간에 상황을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대저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했고 또한 이 말씀을 받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했고 또한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반응하십시오. 

양계장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 드립니다.
양계장은 크게 고기를 얻기 위해 닭은 키우는 육계가 있고 알을 얻기 위해 닭을 키우는 산란계가 있습니다. 보통 알을 얻기 위해 닭을 키울 경우는 처음 닭이 알에서 깨어나 육 개월 정도가 되면 알을 낳기 시작하는데 처음 난 것을 초란이라고 하고 아주 크기가 작습니다. 그리고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갈수록 소란 중란 대란 왕란까지도 낳게 되는데 그렇게 육 개월 내지 1년이 지나면 알을 낳는 수가 점점 줄어들기에 양계장 주인은 그때부터 닭을 처분하고 새로운 닭을 들여놓게 됩니다. 

그걸 노계라고 하는데 그런 노계들이 주로 길거리 튀김 닭으로 많이 팔려 나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 못할 경우는 노계로 하여금 다시 알을 잘 날 수 있도록 비상조처를 취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환우라고 해서 닭을 강제로 금식시키는 것입니다. 보름 정도를 금식을 시키는데 그러면 닭이 깃털이 다 빠져버립니다. 그런 가운데 약한 닭들은 죽어나가겠지만 살아남은 닭은 다시 모이를 주기 시작하면 다시 털이 나기 시작하면서 알을 낳게 되는데 마치 어린 닭처럼 그렇게 왕성하게 알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라 생각됩니다. 먼저 됐는데 지금까지 잘 해 왔는데 그만 믿음 생활이 타성에 젖어 버렸습니다. 감사도 그저 말 뿐이고 그렇다고 누구 하나 제대로 전도도 못하고 덕스럽지도 못하고 한 이들을 우리 주위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냥 용도 폐기해 버리고 말까요? 그럴 수는 없잖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복을 누리고 복의 근원되도록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마치 늙은 닭을 환우시키듯 우리를 환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다시 앞선 자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하면 하나님이 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이건 결코 겁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를 통해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불러 자녀를 삼으신 것은 나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요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앞서서 섬기며 나눔으로 앞서서 풍성한 복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의용 씨의 돈이 보낸 편지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움켜쥐고는 나를 당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신이 나의 것이지요.나는 아주 쉽게 당신을 지배할 수 있어요.
우선 당신은 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한히 값지며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물이 없으면 한 포기의 풀도 살 수 없듯이, 내가 없으며 사람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죽고 말 것입니다. 회사도, 정부도, 학교도, 은행도...
그렇다고 내게 어떤 신비의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지만, 이상한 사람들과 수없이 만납니다. 그들은 나 때문에 서로 인격을 무시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순전히 나 때문에 말이죠. 사람들에게 욕망이 없다면 난 어쩌면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는 선한 사람들,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려는 이들과도 만납니다. 나의 힘은 사실 무한하답니다. 부디 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나를 다루십시오.”

신앙생활을 잘 하는 두 집사가 어느 날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김집사가 말합니다.
“목사님, 요즈음 사업이 잘 되다보니 수입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도 전에 보다 많아졌는데, 가끔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이 집사도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도 요즈음 사업이 바빠져서 주일에 가끔씩 빠질 것 같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예, 집사님. 그러면 제가 김집사님 사업은 좀 줄어들어서 십일조가 적어지도록 기도하고, 이 집사님을 위해서는 사업이 바쁘지 않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두 집사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농담도 못합니까?”
모든 사업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 목적이 되고 사업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성도의 사업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사업이라면 그것도 성도가 할 사업이 아닙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기껏 수고하고 땀 흘려 놓고 바늘귀에 걸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탄식하는 어리석은 자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성하게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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