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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 (요 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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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 (요 4:23~24)


年末이 되면, 각 텔레비전 방송사들마다 연기대상자들을 뽑습니다. 연기대상을 받은 분들의 수상 이유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역을 할 때, 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를 버리고(성격, 외모,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도), 철저하게 드라마 작가가 쓴 ‘작품 속의 人物’에 자기를 동화시켜서, 작품 속에 설정된 그 인물역할을 잘 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사실은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 연기대상(방송대상)과 관련 된 프로에 꼭 등장하는 방송메뉴가 하나 있습니다. NG모음이라는 겁니다. NG가 뭡니까?(no good) 연기자가, 劇 中 人物 役割을 할 때, 감독이 보기에 연기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촬영중단을 시키는 것을 NG라고 합니다. 탤런트가 연기를 제대로 못하면 마음에 들 때까지, NG를 냅니다. 잘 안 된다고 몇 번 하다가, 대충 넘어가는 법은 없습니다(그게 한두 번 쌓이면, 시청자들로부터 곧바로 외면당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하나님 나라 운동)를 시작하신 지 제1년 째 되던 해 年末쯤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공생애 첫 해, 예수님은 약 8개월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공생애 첫해 사역을 하셨습니다. 8개월 간의 예루살렘 사역을 마치고, 본격적인 북쪽 갈릴리(가버나움) 사역을 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북쪽 갈릴리지방으로 올라가시던 旅行 中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영상, 지도) 아시는 대로,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 시작은, 고향 나사렛으로부터 요단강으로 내려오셔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부터 하시지 않습니까? 그 후, 유대 광야로 나가셔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십니다. 마귀의 시험도 받으십니다. 시험 받으신 후, 다시 북쪽 갈릴릴 지방으로 잠시 올라가십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 가셔서, 축복하시고, 물로 포도주 만드는 첫 표적도 행하십니다. 

그리고는 공생애 본거지였던 가버나움을 一次訪問하십니다. 가버나움에는 얼마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곧바로, 공생애 중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지요.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시자, 때 마침 성전 안에는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차서 난장판이 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십니다(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 다 내쫓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엄청난 사건을 벌이셨습니다. 공생애 활동 시작치고는 매우, 과격한 출발이지요.

예루살렘은, 정치․종교․사회․문화․경제 각 분야의 중심도시입니다. 예루살렘 중에서도 ‘예루살렘 성전’은 중심 중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을 예루살렘, 그것도 중심 중의 중심, 心臟部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전청결케 하시는 일로부터 시작하셨다는 것은, 그 의미가 대단히 큽니다. 그 사건 이후, 예수님은 말 그대로 一躍 폭풍 속의 인물, 유대종교에서 주목하는 요주의 인물, 그러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인물로 급부상합니다. 폭풍 속의 核이 되어, 8개월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 활동을 하십니다(이 기간, 니고데모 방문). 

이와 같은 예루살렘에서의 초기 사역이 끝나자, 드디어 공생애 主活動舞臺인 북쪽 갈릴리로 다시 이동하십니다. 갈릴리로 가시던 길에, 의도적인 방문이 있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3), 사마리아를 通過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 4). 사마리아로 가신 이유가 있었다는 겁니다. 거기, 수가 성 야곱의 우물에, 每日 正午가 되면 물 길러 나오는 한 女人이 있었습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던 여인, 지금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여인과 대화 중에, 그 여인이, 의도적으로 자기를 찾아 야곱의 우물까지 오신 유대인 남자,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기름 부음을 받은 자,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신 바로 그 분, 그리스도). 그러자, 그 여인이 예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가장 궁금했던 문제…). 그가 던진 질문이 뭡니까? 

예배장소의 정통성 문제였습니다. 주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패망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북 이스라엘의 수도가 사마리아입니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 제국은, 정책적으로 자국민들을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강제이주정착을 시킵니다. 혼혈정책을 편 것이지요. 앗수르 사람들의 피를 강제로 섞어버린 것이지요. 그 일로, 남쪽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같이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왕래가 없는 것은 물론, 상종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를 300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도, 자기 나름대로 사마리아 그리심 산에다 ‘사마리아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예배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였지만 궁금했던 거지요. 사마리아 성전에서의 예배가, 과연 정통성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 산, 사마리아 성전)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어디가 진짜 예배할 장소입니까? 예배장소의 정통성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한국교회장로교 분열사를 보면, 분열 당시, 두 측으로 나뉘어 모이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합동측이 된 승동측이 있었고, 지금의 통합측이 된 연동측이 나뉘어 모이게 되었습니다. 각각 조금씩은 다른 스타일의 신앙전통과 예배전통을 가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요즘도, 한국교회 안에는, 합동측이 정통인가? 통합측이 정통인가? 따지는 사람들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느 교단이 정통성이 있는 교단 같아 보이십니까? 어느 교단에 정통성이 있느냐? 없느냐?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며칠 전, 지역교회 목사님들 함께 모임).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山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靈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 21-24).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은 장소적인 문제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배의 차원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장소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교단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교단이 정통성 있는 교단이냐?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자기들만 정통이고, 자기들의 예배장소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부질 없는 주장입니다.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이 그렇게 동경하면서 물었던 유대인들의 예배장소, 예루살렘 성전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 성전세를 내려고 ‘세켈’ 돈으로 換錢하는 자들에게 고액의 환전수수료를 챙기던 장사꾼들을 다 내쫓으셨던 곳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던 곳 아닙니까?

그러면, 예배할 장소가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까? 禮拜 儀式, 매주일 드리는 정해진 禮拜時間,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흔히들, 그렇게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아닙니다. 예배장소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식 중요합니다. 정해진 예배시간,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장소, 예배의식, 정해진 예배시간, 그것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100%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것은 가변적인 조건일 뿐입니다. 거기에다(+a, 본질)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하는 예배란, 장소문제, 의식문제, 시간문제와 같은 가변적인 것과 더불어, 예배를 예배되게 하시는, 땅에 속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 오직 예수님 중심, 예수님의 생애, 가르침, 선포, 치유, 하나님 나라 운동,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 다시 오심, 그 예수님 안에서 하는 예배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장소문제, 의식문제, 예배시간문제, 이런 것들만으로 예배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次元이 다른 존재시라는 의미입니다. TV가 귀한 시절(가구), 오매불망 TV, TV하며 기다리던 TV를 샀습니다. 얼마나 좋든 지요? 여러 해 쓰자, 로터리 식 채널이 낡으면서, 한 번 돌려서는 방송채널이 딱딱 맞지 않더라고요(화면이 흐리거나, 타 방송국과 겹쳐 보이기도 지직거림…). 그러면, 좌우로 조심스럽게 돌려가면서, 채널을 꼭 맞추어야 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예배장소를 하나님 같이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성전주의, 성전종교화). 예배의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의 예배는, 하나님보다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더 중심이 된, 예배일 때가 많습니다. 예배자의 감정, 예배자의 생각, 예배자의 필요(need)가 중시됩니다(공연같이 화려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지요. 사람이 예배의 주인이 되어버린 거짓예배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예배 가운데 임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말씀 앞에 응답하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내가 감동 받았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교와 찬양이 내 마음에 들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세속적인 나를 꺼꾸러뜨리셨는가가 중요합니다. 나의 세속적인 우상(드라빔, 금송아지)을 버리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몸에 지니고 다니던 귀고리 우상(우상이 새겨진, 주문이 부조된 간이용 우상)을 빼어냈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속적인 삶에 찌든 내 의복을 바꿔 입었는가가 중요합니다. 

S. Kierkegaard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때, 크게 혼동하고 있는 역할문제에 대하여 일갈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자를, 흔히 청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혹, 예배자 아니라 예배의 청중으로 계신 적은 없으셨는지요?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는, 청중이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시청자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배자를 당연하게 그와 같은 청중으로 대우합니다. 목사를 예배자들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쯤 되실까요? 하나님은 그저 무대 뒤에서, 대사나 읽어주는 프롬프터(prompter)쯤으로 생각합니다(객석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대에 등장한 배우에게 대사나 동작을 일러주는 사람; 뉴스를 하는 아나운서들이 원고를 보지 않고 뉴스를 진행할 수 있도록, 시청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원고 내용을 써 놓은 장치). 

이 어찌 말이 됩니까? 주객전도도 有分數지요.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어찌 예배를 감상하는 자이고, 예배를 평가하는 자이고, 예배를 느끼는 청중이 될 수 있습니까? 청중은, 여러분들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zhtew, 집요하게 끊임없이 갈망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지켜보시는 청중이십니다. 

그러면 누가 예배의 俳優입니까? 예배자인 여러분이,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시는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입니다. 목사는 프롬프터입니다(배우인 예배자가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 하나님만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청중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그 귀한 예배시간의 청중노릇을 했습니까? 하나님 노릇한 겁니다. 이거 안 될 말입니다.

연극공연이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하지 않지 않습니까? 연극공연을 보려면, 정해진 시간, 지정된 장소에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정한 시간, 지정된 장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이, 우리의 全 生涯가,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라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 每主日 定한 時間에, 예배공동체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찮습니까? 주일예배를 소홀하게 여기면서,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의식,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된 정성된 예배의식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을 할 때에,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지 않지 않습니까?(儀式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러시아 정교회 예배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는, 시종의식만 있는 예배를 합니다. 조명이 전혀 없는, 깜깜한 예배당에 촛불만 밝히고,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중심으로, 의식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말씀선포시간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예배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선지자 이사야나, 선지자 예레미야 때, 유다 백성들의 제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앙 없이 의식적인 제사에 불과했습니다. 수많은 제사, 절기들, 무수한 제물, 숫양의 번제, 살진 짐승의 기름, 수송아지, 어린 양, 숫염소의 피는 넘쳐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와 제물이, 헛되다 하셨습니다. 헛될 뿐 아니라, 성전 마당만 밟는 악한 행위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제사 행위는 그만 치우고, 善行을 배우라, 正義를 구하라, 虐待 받는 者를 도와주라, 孤兒를 위하여 신원하여 주라, 寡婦를 위하여 변호해주라 하셨습니다. 진정성이 있는 예배행위를 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더 이상, 예배자인 우리가 예배의 청중이 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청중이십니다. 관객이십니다. 시청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 俳優입니다. 목사는, 교우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게 말씀을 선포하는 프롬프터입니다. 

이제부터 예배자인 우리는, 청중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배우 된 本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해 드립시다. 그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다 되십시다. 아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속적인 욕망, 기준, 나 중심적인 예배행위, 이제 다 내려놓습니다. 우리 예배의 시청자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연기하는 배우와 같은 예배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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