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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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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 5:16~18)
 

성경은 우리에게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만일 우리가 이 말씀대로 실천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이 행복하고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은총입니다. 성도들에게 이 같은 은총이 허락된 것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살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마음에 기쁨이 없이 우울하게 살고, 하루 종일 기도를 않고 지내며, 그 입술에서 감사의 말을 듣기 어려운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원칙적으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있으나,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믿기는 믿는데, 그 심령 속에 주님을 모시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혈로 사신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교회의 신자들은 주님을 ‘문밖에 세워 둔 채’ 이 정도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자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시간, 혹시라도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었거든 즉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가장 귀한 자리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셔서 우리와 더불어 동거동락하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살아갈 때 어떠한 처지에서나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 끊임없이 주님과 사랑의 교통을 나누는 성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니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세 주일에 걸쳐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을 본문 삼아서 말씀을 전하되, 오늘은 그 첫째인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기뻐할 때 얻는 유익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현대 의학은 사람이 사랑을 한다거나 무슨 기분 좋은 일을 경험할 때 뇌에서 베타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이 베타 엔돌핀은 마약의 수백배에 달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즐겁게 해 줄 뿐 아니라, 인체의 각 기관의 노화를 방지하고, 병에 대한 면역력을 높이고, 암세포를 파괴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베타 엔돌핀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지만, 잠언 17장 22절에 보면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에 솔로몬을 통해서 마음의 즐거움이 건강을 증진시키고 병을 낫게 한다는 사실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요즘은 큰 병원에 가면 환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서 노래와 춤, 연극 등과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의료진과 환자들이 함께 어울려 공연을 하면서 즐거워하는 동안에 병에 대한 치료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마음이 즐겁다 보니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고, 그 결과 치료를 낙관하고 의사의 처방에 적극 협조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게 되어서 일반 병자보다 훨씬 빠른 치료 효과를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전문적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직업인 웃음치료사라는 민간자격증도 생겼습니다. 웃음치료의 요점은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 지므로 웃을거리를 찾아내서 많이 웃으라는 것으로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스트레스는 질병이나 암 발생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웃을거리를 찾아서 많이 웃으므로 마음을 쾌활하게 만드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기쁠 때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해 나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기쁘면 얼굴이 밝고 웃음을 머금게 되는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웃는 얼굴을 대하면 이쪽에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원만한 대인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우울한 사람보다 성격이 밝은 사람이 더 인정을 받게 되고, 이는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우울한 사람과는 거래할 마음이 생기지 않지만, 성격이 밝은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끌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마음이 슬프면 얼굴에 슬픈 표정이 나타나고,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러기에 잠언 15장 13절에 이르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슬프고 우울하면 세상이 희망 없는 잿빛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마음이 기쁘면 모든 것을 희망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도 겁내지 않고 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뻐할 때 얻는 유익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크고 다양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려는 선하신 뜻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쁜 일이 생기면 기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쁜 일이 생겨서 기뻐하는 것이야 누군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기쁜 일이 없는 중에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더러 슬픔의 감정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증언합니다(마 26:37). 그러므로 우리가 슬퍼할 때 슬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슬퍼하는 중에도 그 슬픔을 이기고도 남는 기쁨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것에 대하여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만 생각하고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을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게 될 것을 바라보시면서 즐거워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자들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심한 환난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환난이 극심했던지 사도 바울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을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고후 1:8-9). 그러나 그는 고린도후서 7장 4절에서 간증하기를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슬픔의 감정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은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위로와 기쁨으로 슬픔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능히 이겨낼 수 있으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기뻐하면서 살려면 “나는 어떤 형편에서도 항상 기뻐하면서 살겠다”는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려는 각오를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주님을 믿고 나아갈 때 얼마든지 가능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항상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므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로 결심할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과 같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항상 기뻐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어떠한 여건 가운데서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한 집에 사는 식구들이 화목할 줄 모르고 다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 돈이 없어서 그런다고 대답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답입니다. 

그 이유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한 가정이 있고, 매일같이 고기를 먹으면서도 불화하는 가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화목과 불화를 결정짓는 것은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에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도 맛을 모르고, 사사건건 불평하고 다툽니다. 반면에, 가족들의 마음이 기쁘면 형편이 어렵고 힘들어도 서로 격려하며 화목하게 지내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항상 기뻐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성도들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먼저 ‘나에게 기뻐할 무슨 근거가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차분하게 살펴보면, 누구나 기뻐할 수 있는 얼마간의 근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승진한 것이 기쁨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대학에 합격한 것도 기뻐할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기뻐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처럼 기뻐할 일이 연속적으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기쁨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도 않습니다. 한 동안 기뻐하고 나면 더 이상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이 줄 수 있는 기쁨의 분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500밀리리터 들이 병에 든 생수가 몇 번 마시면 금방 동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위한 팬클럽을 만들어서 활동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동향을 미리 파악해서 공항에도 몰려가고 공연장에도 몰려가서 환호합니다. 그 연예인의 사진을 수집하면서 기쁨을 만끽하는가 하면, 핸드폰에도 저장해 두고서 수시로 보면서 미소를 짓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에는 호감을 갖고 있는 연예인과 상호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고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행복해 질 수 있으므로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은 우울하게 지내면서 가족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느니보다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이 기쁘고 행복해 져서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한다면 그 편이 훨씬 낫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으로 얻는 기쁨은 허물 많은 인간의 매력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 토대가 너무나 부실하고 빈약합니다. 이처럼 세상이 주는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쉬 사라지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뻐할 수 있는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기쁨은 영적인 기쁨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기쁨이 언제나 지속되는 것은 이 기쁨의 근원이 유한한 사람이나 변화무쌍한 세상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주고받으신 대화가 나옵니다.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는 정오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들어가고 예수님 홀로 우물곁에 앉아 계셨습니다. 조금 있으니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오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말하기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시니, 여자가 말하기를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여자는 귀가 번쩍 뜨여서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여자가 놀라며 말하기를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하고, 계속해서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셨습니다. 

이에 여자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자가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물에 와서 물을 길어다가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 편력을 통해서 그의 내면적인 갈증을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 여자는 매일 같이 뜨거운 대낮에 우물에 물을 길러 왔고,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방법으로는 결코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가련한 여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은 다시 목마르게 되는 물과 같습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는 절대로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의 심령 속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셨습니다. 이 생수의 샘은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탁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고 나서 열흘 만에 성령을 보내주셨으며, 지금도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심령 속에 계시면서 영적인 기쁨의 원천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영적 기쁨은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한 영원토록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 안에서 받은 구원을 생각할 때 영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참 기쁘고 복 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이 찬송이 저와 성도님들의 진심어린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구원의 기쁨이 없다면 그 때에는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회개함으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일로 범죄했을 때 그 심령이 지옥과 같이 되어 고통 가운데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면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사귐을 가질 때 영적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했든지 “7)…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 3:)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처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면 어떤 처지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고 나서 곧 이어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고 하셨는데, 이로써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때 영적 기쁨을 누리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생각을 품으면 그 시로부터 기쁨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려면 우리 마음속에서 미움을 제거하고 형제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성도들은 주의 일을 함으로써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강림과 부활과 영원한 상급과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그 날을 생각할 때 우리가 처한 사정과 형편을 초월하여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항상 기뻐하는 삶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의지를 가지고 항상 기뻐하면서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결단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순종할 때 우리 심령에 기쁨의 강수가 솟아나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경청하신 성도님들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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