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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란 중 부르시는 하나님 (시 10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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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 중 부르시는 하나님 (시 107:10~11)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I. 본문해설 

본문 말씀은 찬송시로 분류됩니다. 특별히 시편 가운데서도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격조 높은 찬송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앞 절을 보면 시인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시 107:8)라고 영혼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며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인은 어둠 속에서 곤고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II. 어둠 속에서 곤고할 때 

시인은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온 땅에 가득하고 언약백성들에게 햇살처럼 내리는 때에 지하 동굴에서 속박되어 있는 것과 같은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처한 어두움은 크게 두 가지로 묘사됩니다. 

A. 환경의 어둠 

먼저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입니다. 흑암은 절망의 상태이고 사망은 죽음의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아무 희망이 보이질 않고 견딜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하여 소망이 끊어진 상태를 시인이 그와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환경 속에 처하면 필연적으로 마음도 영향을 받습니다. 

B. 영혼의 어둠 

따라서 그는 또한 곤고와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어둡고 마음이 속박 당한 상태입니다. 사실 우리가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자유롭고, 정신으로는 무슨 일이든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하고자 때는 힘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일의 행동과 뜻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연적으로 흘러나오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하는 믿음의 행동은 특히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새의 자유가 나는 데 있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자유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잘 잊어버립니다. 그런 자유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환경이 막힌 것 같아도 영혼이 묶여 있지 않아서 말씀 속에서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은혜가 있다면, 넉넉히 그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귀의 전략은 항상 우리의 이런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영적 전쟁이라고 묘사하는데,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전투력이기도 하지만 보급로가 차단당한다면 전혀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며,말씀에 의해 깨뜨려져 은혜를 받고, 받은바 위로를 가지고 주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할 때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시련도 넉넉히 감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끊어지면 능히 감당할 것 같은 시련에도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고난의 길을 아주 훌륭히 헤치고 나온 사람이 이후에 아주 작은 시련을 만나고는 신앙에서 물러나고 미끄러지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시련을 극복하는 능력이 그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절대로 마귀는 전면적으로 여러분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참여하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게, 기도는 하지만 근심의 검은 구름아 마음을 하나님께 모아지지 못하도록, 또한 설교는 듣지만 유혹과 정욕의 안개가 피어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영혼 깊이 새기지 않으려는 마음과 정신으로 만들려는 것이 언제나 마귀의 간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깨어서 근신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한 사람이 영혼의 곤고함을 느끼고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III.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 

그런데 우리가 환경적으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 같은 영혼의 상태가 될 때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A. 인간의 생각 

우리는 항상 고난과 시련의 모든 원인을 물리적인 환경 안에서 찾습니다. 그러면 쉽게 발견이 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면 사업에 손해를 끼친 인물이 있을 것입니다. 거기가 끝이라면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원하게 됩니다. 또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에서 심히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일의 근원을 미루어보면 뭔가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헤아려 보십시오. 그때 자기는 항상 자기의 편이기에 어떤 문제에 대하여 공정하게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는 생채기까지 기억하면서 자신이 남을 창으로 찌른 것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고치려 하거나, 다시는 안 보려고 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둘 다 그를 미워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말하곤 하지만, 그렇게 갈등은 눈덩이처럼 쌓여 또 다른 갈등을 가져옵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허물은 일급비밀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를 비껴간 곳에서 그 원인을 찾고 거기서 모든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그러면 마음에 먹구름이 피어올라 하나님 앞에 절대로 마음을 모을 수 없습니다. 급기야 자신이 놓여 있는 환경이 가장 불행한 환경이고, 이 엉클어진 환경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은 모든 영적으로 좋은 것들을 키우는 토양과 같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B. 하나님의 판단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만나는 이유이고 본질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대충 타협하며 살면 어려움이 없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신앙의 정절을 굳게 하려고 할 때 신자는 핍박을 당하게 되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사람과 원수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지존자의 뜻을 받들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는 내 힘으로 섬기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연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보면 내 스스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이 붙드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끔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할 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포기하고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주님을 멀리 떠난 다음에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아버지는 탕자가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할 때 안 된다고 거절할 수도 있었고, 집을 떠나겠다고 할 때 하인을 시켜 못 떠나도록 가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체의 감사함 없이 허랑방탕한 꿈을 꾸고 있는 아들을 단지 옆에 두고 있는 것을 아들과 함께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먼 나라로 떠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자기가 당연히 누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고난의 의미가 자기의 죗값에서 그친다고 생각하고, 또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않을 때 각성한 후 그것들이 하나님의 보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은 복수나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고통을 받게 하시지 않고는 그 마음을 당신에게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사랑으로 매를 대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거룩한 자를 더 정결케 하시고, 신실한 자들을 더 굳센 믿음 위에 세우시며 주님 앞에 자기를 바치는 사람들을 보다 더 티 없이 맑아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에게 가시와 같은 고통을 주시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며 살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넘어짐과 미끄러짐, 신앙이 부패하는 원인이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자기가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게 된 환경의 어려움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셧을 때 우리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물론 인생의 문제 가운데 둘러싸인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는지 그가 잘못했는지 따져보십시오. 그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사람이나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설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에 잃어버린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신 것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나님만 여러분들에게 영적인 새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죽어가는 여러분들의 영혼을 소생시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빛으로,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여러분을 자유로 풀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것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V.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렇다면 우리에게 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나고 그때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며 행동하며 살지는 실은 우리 마음 안에 고히 접혀 있다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요체는 이 펼쳐짐이 아니라 펼쳐지기 전에 인간의 마음속에 집약된 요소를 신앙 안에서 진리와 성령으로 변화시키고, 그로 인하여 새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의 성령의 은혜가 우리를 바꾸고 고쳐서 새 삶을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인생의 대박은 복권에 당첨되거나 죽을병에 걸렸을 때 명의를 만나거나 벼락으로 출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불행이 펼쳐지기 전에 말씀으로 그것을 찾아내서 진리로 치료하는 것이 인생의 대박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결국 깨달았다고 하는 것들도 결국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보게,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대!” 이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렇게 엄청난 과외비를 지불하지 않고도 말씀을 통해서 나를 비추실 때 아멘으로 순종함으로써 자기의 그릇된 것들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만나지 못한 환경과 사람을 사용하셔서 “내가 굉장히 좋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시간에 펼쳐지기 전에 먼저 찾아서 여러분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길 원하십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도록 오늘도 잘못된 길에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때리고 어루만지셔서 고통 가운데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진리를 굳게 붙들고 날마다 우리를 낮추시는 주님을 굳게 붙들고 새로운 한 해를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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