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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행 1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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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행 10:1~48) 
 
 
생명의 말씀은 개별적으로는 빌립을 통해 이방인에게 이미 전파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이방인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넬료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의 의식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합니다.

1-8절은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소개합니다. 그는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2)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3시 경(구시)에 고넬료는 환상 중에 천사의 지시를 받습니다. 그의 오랜 기도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게 되었으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내용이었지요(5). 고넬료는 즉시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알리고 욥바로 보내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는 50km가 넘기 때문에 10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립니다. 본문을 보면 1박2일 동안 걸어간 것 같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뭔가 사건이 발생되었음을 말한 후에 장면은 욥바로 바뀝니다. 베드로가 정오(육시)에 옥상에서 기도하는 중에 비몽사몽간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요(9-17). 고넬료의 환상이나 베드로의 비몽사몽은 둘 모두 무아지경 상태가 아니라 뚜렷한 자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지시에 즉각 순종하는 고넬료와 계시를 거절하는 베드로 사이에 뚜렷한 대조가 있지요.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하실 때에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반응합니다(13-14). 말씀하시는 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면서도 ‘결코 아니다’(메다모스, mhdamw'")는 뜻의 강한 부정어를 사용하여 거부했지요.

베드로는 일종의 시험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 참 배가 고픈 상태에 있는데 부정한 음식으로 시험해서 자신의 신앙을 테스트하려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러한 대답 속에는 ‘유대인 베드로’의 모습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베드로의 사고에 가장 강렬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정체성은 ‘나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대표하고 있듯이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과 식탁 교제를 하지 않는 까닭도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함이지요. 이 환상은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지 말고 영접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베드로는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과는 구별된 삶, 곧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지요.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 세계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그림자요 모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체요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정결 예법의 기능들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까다로운 규례들을 지켜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공로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하는 말씀을 주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성은 기독교적인 의식들을 행하는데서 생기지 않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 모두 열심히 기도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베드로보다는 오히려 고넬료가 더 하나님 백성답습니다. 베드로에게서는 ‘유대인’의 모습이 두드러지지만 고넬료에게서는 ‘로마 장교’의 모습보다는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가죽 제품을 만드는 피장은 늘 죽은 시체를 만지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사람이었고 피장인 남편과는 이혼도 허락 될 만큼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라면 피장일지라도 속되다는 차별 없이 영접하고 대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방인에 대해서는 속되다는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베드로의 의식은 좀 더 복음의 가르침에 맞게 진전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베드로가 ‘유대인’이라는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확립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유대 문화 속에서 자라면서 뿌리 깊게 형성되었던 반복음적인 사고가 뽑히고 복음적인 관점을 형성하는 이 일은 베드로의 노력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유교문화 속에 자란 한국인에게도 뿌리 깊은 반복음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서열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인데요, 그러다보니 교회의 직분도 감투나 계급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복음적인 진전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베드로가 고집을 꺾기까지는 “이런 일이 세 번”이나 있어야 했습니다(16). 그 후 베드로는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17). 이 때 고넬료에게서 온 자들이 베드로를 찾아 왔고, 성령님께서는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하셨습니다(20). 이 환상은 기도실에 가만히 앉아서 머리로 깨닫기 힘든 계시였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계시를 이론적으로 일일이 다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이해되지 않지 않는 상태에 있지만 그러나 ‘순종함’을 통해서 깨닫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론보다는 행동에 강점이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인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일단 순종하여 이방인을 속되게 여기지 않고 영접합니다. 이제 정통 유대인과 유대인들이 거북하게 여기는 피장과 더 거북하게 여기는 이방 군인들이 한 지붕 아래 유숙하게 되었습니다(23). 보편성을 갖춘 교회의 모습이지요. 완벽하게 깨달아야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도 완벽하게 깨달을 수는 없겠지요. 언제나 성도는 지금까지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신 만큼에 충실하게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마치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짙은 안개 속에서 인도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눈앞에 보여주신 한 걸음을 순종하고 나면 그다음 발을 옮길 곳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튿날 베드로와 형제들이 고넬료 집을 방문했습니다(24-33). 고넬료는 베드로를 맞이하면서 “발 앞에 엎드리어 절”했습니다(25). 그의 겸손과 사도에 대한 존중심을 발견할 수 있지만 지나친 감이 있지요. 아마 이 역시도 로마문화나 군대문화 속에서 형성된 상급자와 하급자의 개념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경건한 고넬료 역시 복음적인 사고나 행동에서 진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26)고 합니다. 사도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지만 상급자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서의 존중이어야 함을 잘 가르쳐 주었지요. 그러면서도 ‘나는 유대인’ 너는 ‘이방인’이라는 구별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28).

베드로의 말 속에서 사회적 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분명한 태도가 보이지만 2% 부족함을 느끼게 되지요. 베드로는 초청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고넬료는 모든 것이 천사의 지시였으며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33). 고넬료는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백성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그에게도 2% 부족한 것이 있었지요. 베드로에게는 유대인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필요했다면, 고넬료에게는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각자를 적절하게 인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먼저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고 말합니다(34-35). 10장이 고넬료의 회심을 다루지만, 숨은 주제는 베드로의 ‘생각의 틀’이 깨어지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는 중에 자기 고집을 꺾었습니다.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순종하면서 점점 계시의 의미를 깨달아가지요. 그는 외모를 취하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그분께서 전하신 복음의 특성을 “화평의 복음”으로 소개합니다(36). 실상 주님께서는 유대인만의 주가 아니라 이방인의 주가 되셔서 둘 사이를 화평케 하셨지요.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께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설교 형식에 있어서는 역사적 사실부터 죽 서술했지요. 예수님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해석이나 적용 없이 간단명료하게 서술만 했습니다. 그 후 사도들이 그 일에 대한 증인이며 모든 선지자들도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언했다고 말했습니다(42-43). 흐름상 이제 사실에 대한 해석과 적용이 이어질 순서입니다. 그런데 이 말까지 했을 때 갑자기 설교가 중단되었습니다.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44)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설교가 중단되게 하심으로 43절 말씀이 자연스럽게 강조됩니다.

고넬료와 그의 집안 식구들은 설교를 듣는 도중에 성령님을 받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자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놀랐다’(엑시스테산, evxe,sthsan)는 단어는 놀라서 정신이 나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으로 개종하지 않고서도 구원을 경험한다는 사실에 대단히 놀랐습니다. 이를 보면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설교하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정작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와 청중들의 부족함 속에서도 당신님의 뜻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인 베드로의 의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지요.

성령님께서 고넬료에게 가이사랴에 살고 있던 빌립이나 이방인 사도로 준비된 사울 대신에 베드로를 부르게 하신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보편성을 갖추는 일에 먼저 베드로의 의식부터 바꾸셨습니다. 유대인 베드로는 이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48). 베드로는 ‘만유의 주님’과 ‘화평의 복음’의 의미도 보다 충분하게 깨달게 되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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