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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예수를 바라보라 (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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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라 (히 12:1~2)


희망의 2010년 새해 첫 주일을 맞이한 이 시간 본문에 기록된“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씀을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학자였던 맹자를 키우기 위해 노력한 맹자 어머니의 자녀교육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맹자가 자랄 때 공동묘지 근처에 집을 두었더니 늘 장례 지내는 광경을 본 맹자는 장례지내는 흉내를 냅니다. 벌레를 잡아서“아이고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땅을 파서 묻습니다. 맹자 엄마가 이를 보고“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집을 시장가로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본 맹자가“어~물건 사세요. 진짜에요. 가짜 아닙니다. 진짜요.”하면서 장사하는 흉내를 내면서 노는 것입니다. 이를 본 맹자의 어머니는 이 역시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서당 근처로 집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매일 듣는 것이 글 읽는 소리였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맹자는 늘 글 읽는 흉내를 내면서 자랐습니다. 그가 나중에 장성하여 위대한 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은 무엇을 바라보고 듣는데서 엄청남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도 시작부터 끝까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늘 보고 듣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면서 한해를 살아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기를“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셨습니다.“예수를 바라보자.”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헤아리면서 살아가자 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하셨을까요?

一.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마음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유혹에 강한 사람이라도 자꾸 유혹을 바라보고 유혹하는 말을 들으면 그 마음이 시험에 들게 됩니다. 늘 세상 소식을 듣고 보면 불안 초조, 공포, 좌절, 염려, 근심이 마음에 가득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소식만 들으면 그러한 염려와 절망이 우리 마음에 안개와 구름처럼 덮여서 짜증이 나고 우리의 삶도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마음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1. 불안과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신약성경 빌립보서 4장 6절~7절에 말씀하시기를“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셨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지켜야지, 세상이 마음과 생각을 붙들면 우리는 혼돈과 파괴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기를 바라보고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면 마음이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신 그 은총을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지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을지라도 예수님 보혈로 용서해 주시는 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보혈의 은혜가 넘쳐나서 나의 죄를 다 씻어 버리고, 용서해 주시고, 의롭게 되는 생각이 들어와서 죄의 억압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젊어지고 가셨다는 것을 바라보고 늘 생각하면 자연히 마음속에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누구나 다 불안하고 괴롭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하여 죽었다가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셔서 그 보좌 우편에 앉은 것을 바라보면서, 나도 예수님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함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면 마음이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넘쳐나는 용서와 성령의 은혜와 치료와 축복과 영원한 천국의 소망이 마음에 기쁨이 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바라보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말씀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셨습니다.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니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마음이 불안하면 행복이 없습니다. 초가집에 나물을 먹고 살아도 마음이 평안하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평안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어떠한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부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평안이 제일입니다. 이 평안이 어디에서 올까요?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무거운 짐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을 때 우리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바라보면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자유가 어디서 옵니까?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리가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십자가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위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아~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다 청산하셨구나.”하는 생각을 할 때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마귀와 세속을 다 이기셨구나.”하는 은혜를 헤아릴 때 세속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내 병을 다 젊어지고 가셨구나.”하는 약속을 믿을 때에 질병의 고통과 불안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저주를 다 젊어지고 가셔서 내 인생에 다가오는 가시와 엉겅퀴를 청산해 주셨구나.”하는 은혜를 헤아리면 마음에 희망이 생기고, 자신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죽음을 멸하고,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고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망의 권세가 다 사라지고 없구나. 예수 안에서는 영원한 천국과 영생만 있구나.”하는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마음에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좌우편에 강도 두 사람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들이 거의 죽어갈 때, 한 강도는 예수님 을 쳐다보고 깨달았습니다.“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 메시아시다.”라고 깨닫고 말하기를“주님, 주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예수님께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응답 하셨습니다. 당장 구원을 받고 낙원이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강도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운영에 처했지만 한 사람은 깨달음으로 죽음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고 천국의 영광을 얻었지만 다른 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므로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깨닫는다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똑같이 교회에 와서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깨달아 자유를 얻게 되고. 어떤 사람은 깨닫지 못하므로 왔다 갔다 하나 아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내가 깨달을 때 자유와 해방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종의 멍에가 벗겨집니다. 깨닫지 못한 인생은 짐승과 같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二. 예수님을 바라보면 긍정적인 꿈을 갖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밝고 희망찬 내일에 대한 꿈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을 때는 내일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새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은 불안하기 때문에 점쟁이를 찾아가고 사주팔자를 봅니다. 모든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마음에 평안만 얻는 것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찬란한 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기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택을 헤아리면 마음속에 꿈이 생겨납니다. 내일에 대한 꿈이 마음속에 생겨나서 꿈 가운데 살게 되고 자기에 대한 자화상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달라지고 운명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꿈이 새로워져야 되고 자화상이 새로워져야 되는데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가 있어야 꿈이 생겨나고 이유가 있어야 자화상이 달라지지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흑암의 세력을 멸해 주셨기 때문에 미래의 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우리가 범사에 잘되기 위해서 저주를 젊어지셨고, 우리가 강건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아 주셨으니 우리는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굉장한 자화상을 가졌습니다. 

시편 103편 1절~5절에“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자화상 입니까? 왜 그런 자화상을 갖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런 이름다운 자화상을 가졌는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를 대속해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과 고난을 통해서 얼마든지 아름다운 미래의 꿈과 자화상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옛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사진틀을 바꾸어 걸어 놓으십시오. 옛날 사진은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새사람의 사진을 마음속에 걸어놓으시기를 바랍니다. 

三.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고 의지할 반석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반석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흔들리 지 않는 터전 위에 서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기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 돈, 지위, 명예, 권세, 쾌락 이것들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큰 경제적인 위기가 세상을 휩쓸고 나면 재벌의 판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떵떵거리던 재벌이 망해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재벌로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세상은 변화무상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 14절에 말씀하시기를“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안개를 믿고 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개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그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으니, 그 아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지 아나하시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날이 변하고 달이 변하고 계절이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내 모든 이웃과 형제와 잔구들이 다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서 6장 26절에 기록하기를“그는 사시는 하나님 이시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축복과 은혜를 주셨는데 그런 분이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과연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서 그 자식을 위해서 은혜를 예비하겠습니까? 십자가를 걸머지고 물과 피를 흘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예수님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는 우리와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는 굳건한 반석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2절에“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넘치는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어찌할 수 없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같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해 에베소서 1장 4절~6절에 기록하기를“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게 된 것은 창세전에 하늘과 땅을 짓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기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즘 자녀들은 부모 말을 잘 안 듣지 않습니까? 성인이 되면 자기들이 신랑, 신부 감을 택합니다. 어느 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금지옥엽으로 기른 딸이 부모가 원치 않는 남자하고 사귀면서 죽어도 그 사람하고 결혼하겠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혼처가 많이 나왔는데 보기도 싫고 만나기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 호박 같은 남자를 자기 딸이 너무나 좋아해서 말로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딸을 데리고 올 테니까 신앙상담을 좀 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자매에게 묻기를“왜 그 사람하고 결혼하려고 하니? 다른 좋은 사람이 많이 있는데… 좀 더 만나보고 선택하지 왜 마음을 정해버렸니?” 하고 묻자“목사님, 저는 그 사람을 죽도록 좋아해요. 제가 좋아하는데 무슨 말을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할 말이 없어서 “맞다. 네가 좋아하면 네 팔자 네가 선택하는 것이니까. 부모님이 좋아하는 것과 네가 좋아하는 것과 다르지 않느냐.”라고 했습니다. 좋아서 자기 신랑감 택한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했다가 나중에 불행해지면 두고두고 부모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좋아서 결혼했다가 불행해지면 자기 책임이지, 부모 책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한번 따라 해보십시오.“하나님이 나를 창세전에 좋아하셔서 기쁨을 못 이기고 택해 주셔서 지금 내가 믿게 되었습니다.”
할 말 없습니다.“하나님은 왜 나 같은 사람을 택했습니까?”라고 하다면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네가 좋아서 너를 택했다 왜 잔소리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셔서 나를 택하시고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영광을 값없이 받게 해주셨으니 이런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자연적으로 믿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큰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안아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돌봐주시는데, 어떻게 그 사랑을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주여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四.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언어가 달라집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의 말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3절~6절에“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우리가 말이 우리 몸을 굴레 씌운다는 것입니다. 말을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말의 입에 쇠를 넣어 끈을 묶어서 위에서 당깁니다. 아프니까 위에서 당기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의 입에 들어있는 이 조그마한 쇳조각이 좌우로 운전하는 것처럼 혀는 우리를 좌우로 굴레 씌워서 끌고 가는 도구입니다. 혀가 말하는 대로 우리가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혀는 삶의 방향을 운전하는 기구입니다. 큰 폭풍에도 거대한 화물선이 무사히 항구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은 밑에 있는 키 때문입니다. 키가 있어서 배의 방향을 잡는 것처럼 우리 혀도 우리 인생의 방향을 잡는 키라는 것입니다. 혀가 방향을 잡는 대로 인생은 그리로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실패로 방향을 잡으면 실패로 가고 성공의 방향을 잡으면 성공으로 가는 것입니다. 혀는 키입니다. 

그리고 혀는 온 산림을 불태우는 불씨와 같습니다. 조그마한 불씨로 붙은 불이 온 산을 다 태우는 것처럼 우리의 혀에 불씨를 잘못붙이면 우리의 온몸을 지옥불로 태우든지 온 몸을 성령의 불로 태우든지 두 가지 불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붙이면 천국이 우리 것이 되고, 세상 불을 붙이면 지옥이 우리 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가 온 몸을 굴레 씌우고, 삶의 방향을 운전하고, 온 산림을 태우는 불각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 생각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기 때문에 말도 자연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나는 의롭게 되었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말에 자연적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믿은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늘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달라져야 인생이 달라지는데, 말이 달라질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면 여전히 죄가 있고, 여전히 마귀가 있고, 유혹이 있고, 고통이 있고, 병이 있고, 가난이 있고, 슬픔이 있고, 낭패가 있고, 실망이 있고, 죽음이 있으니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되니, 자꾸만 부정적인 것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악순환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운명이 달라진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말이 달라지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어령 교수를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나라가 오늘날 그래도 이만큼 잘살게 된 이유가 코흘리개 아이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요새는 그런 아이들이 없지만 우리 어릴 때는 학교가면 전부 아이들이 누런 코를 흘렸습니다. 혀로 빨아 먹고 소매로 닦습니다. 그래서 늘 부모나 이웃 어른들에게 듣는 말이 “야! 코 흥 해라! 홍! 흥해라! 흥!”입니다. 이어령 교수가 말하기를“이 흥하라는 것은 잘되라는 말이 나닌가?”라고 했습니다. 시골이나 도시할 것 없이 부모들이 자식들 보고 모두“흥해라! 흥! 흥하라! 흥!”하니까 그 자식들이 다 흥해서 잘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머스러운 말이지만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흥하라고 하는 것하고 망하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망해라 이놈아! 빌어먹어라 이놈아”그러면 망하고 벌어먹을 것인데, 아이들이 그 뜻도 모르고 흥했는데 결국은 흥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깊은 어느 유명한 가수 집사님이 말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가수는 대개 자기가 가장 히트한 곡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히트를 해서 음반이 많이 팔리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그 노래대로 인생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수가 한 곡을 히트곡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대개 5천 번 이상을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5천 번 이상 그 노래를 불러야 히트곡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래를 계속 부르니까 그것을 입으로 시인해서 노래 가사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의 입에 있는 쇳조각 같이 되고, 배의 키같이 되고, 불씨가 되어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것 같지만 우리가 늘 생각하고 말하고 부르는 노래대로 되는 것입니다. 늘 슬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슬픈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늘 좋은 노래를 부르고 긍정적이고, 밝고, 맑고, 환한 노래를 부른 사람은 또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 합니까? 

우리 인생을 통째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갈보리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은혜를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85살 먹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내가 너에게 자식을 줄터이니 그 자식이 너의 후손이 될 것이니라. 그리고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라.”그러면서 밤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헤아렸습니까? 100살이 될 때까지 헤아렸습니다. 

1년을 헤아려도 아무것도 생기지 않고, 2년, 5년,10년, 15년 헤아리다 100살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별을 헤아리며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즉“많은 무리의 아버지”라고 말을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절대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통해서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늘 별들을 바라보고 헤아리며 믿음의 말을 했기 때문에 그의 믿음대로 그의 말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은택을 헤아려야 합니다.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되 그냥 가를 바라보지 말고“저 십자가에서 내 죄를 용서받고 내가 의롭다함을 입었구나. 저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이 오시고, 내가 거룩하게 되고, 깨끗하게 되고, 저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병 고침을 받았구나. 저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구나.”자꾸 십자가의 은혜를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만 바라보고, 힘든 세상만 바라보면서 원망과 불평을 일삼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보라 새것이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은택을 헤아릴 때 마음이 평안해지고, 내일에 대한 밝은 꿈이 생겨나고, 자화상이 밝아지고, 믿음이 생겨지고, 적극적인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총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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