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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하나님의 나라의 끝없는 전파 (대하 20:5~6, 행 28: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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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의 끝없는 전파 (대하 20:5~6, 행 28:30~31)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더 나은 새해를 기대합니다. 나무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의 시간을 알 수 있습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나면 줄기가 뻗고 잎이 나고 열매가 맺힙니다. 고목이 된 나무는 죽지만 다시 씨를 땅에 뿌려 새로운 나무가 나게 합니다. 우리 인간의 일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하루하루 자랍니다. 성인이 되어 결혼하면 아기를 낳고 늙으면 죽습니다. 나는 늙어 이 세상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죽지만 나의 자녀가 나의 대를 이어갑니다. 
  
세상에는 끝인 것 같지만 계속 이어지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시간이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끝이 없다’ 또는 ‘무궁하다’는 말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런 시간 개념은 하나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끝이 없으시니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기다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계속됩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는 끝인 것 같지만 끝이 아닌 것이 세상에는 수두룩합니다. 
  
요한복음 20:31에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끝맺음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21장에 계속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요한복음 21장을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고 합니다. 내용적으로는 ‘베드로의 위임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므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락방 강화에서 “내가 가면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계시므로 우리를 감동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의 시대의 시작이었습니다.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므로 성령의 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은 사도들, 제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사역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적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끝이 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는 절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 이어, 루터와 칼빈, 이후에 많은 개혁주의자들을 통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교적으로는 리빙스턴, 스탠리 존스, 윌리엄 캐리, 슈바이처 외에 지금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신학을 지키기 위하여 고난을 당했고,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순교하면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도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다 끝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고, 야고보의 목을 배면 복음이 잠잠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고 바울을 참수하면 복음이 멸절하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끝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4장에는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총독 베스도에게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그 때 변호사 더둘로는 5절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복음은 마치 전염병과 같더라고 합니다. 
  
전염병이 얼마나 힘이 있게 전염됩니까? 14세기 흑사병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국까지 엄청난 사망자를 냈습니다. 그 당시에 유럽인 3천만 명이 흑사병으로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의 신종 플루를 보세요. 신종 플루는 아무나 들어가기 힘든 북한에도 들어가 북한에도 신종 플루 환자가 생겼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백신을 보내지 않습니까? 신종 플루는 백신으로 막을 수 있지만 복음은 막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끝없이 전파되고 있고, 앞으로도 전파될 것입니다. 

첫째, 전파는 가르침과 함께 합니다. 

28:31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고 합니다. 전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함께 해야 합니다. 전파 없는 가르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파 없이 가르친다면 인간의 지식만 전달할 따름입니다. 가르침 없는 전파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르침 없이 전파한다면 순간적인 감정만 충동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전파하며 또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전파가 깊이가 있고, 복음이 변하지 않게 됩니다. 전파와 가르침은 언제나 상호작용하게 됩니다. 선교와 교육은 서로 순환관계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이 오면 그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사람들을 잘 가르치면 다시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마테복음 9:35에는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포와 가르침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선포와 가르침은 항상 병행하였고 이 둘을 동시에 하신 것을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처음 선포는 획기적이었고 이전의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한 선포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런 선포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7:28에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획기적이었고 이전에는 이런 가르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도 가르침도 다 이전의 것과는 다른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은 누가복음 23:27에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기록한 대로 자세히 가르치셨습니다. 32절에는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마나 꼼꼼히 가르치셨나를 말합니다. 
  
바울이 사도행전 9:20에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전서 4:13에는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하여 가르치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선포와 가르침을 적절히 병행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아홉 가지 교회의 직분이 있습니다. 사도, 예언자, 교사, 감독, 장로, 집사, 목사, 말씀전하는 자, 전도자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자인 교사는 당시에 굉장히 중요한 직분이었습니다. 말씀전하는 자는 말씀을 선포하고 외치는 자를 의미합니다. 교사는 가르치는 자인데 사도와 같이 어느 교회에서나 그 직분을 수행할 만큼 교회가 인정했고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였습니다. 신약의 직분을 봐도 선포와 가르침은 어느 하나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병행했습니다. 특히 교사의 위치는 사도, 예언자와 더불어 보편적 직분이라고 하여 모든 교회에서 그 역할이 통용될 만큼 중요한 직책을 가졌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며,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삶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은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해방을 고대하고,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일은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지식은 가르쳐 알게 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신앙의 기초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에서 무조건 믿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알고 믿어야 합니다. 지식적 신앙이어야 합니다. 지식은 신앙을 깊이 있게 합니다. 신앙은 지식을 확실하게 합니다. 지식과 신앙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13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라고 합니다. 신앙과 지식의 일체를 의미합니다. 
  
고대의 걸출한 교부였던 털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지식의 조건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세의 대 학자 안셀무스는 “신앙은 지식을 더 찾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앙과 지식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과 지식은 보충적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 없는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닙니다. 
  
루터나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은 진실한 교회를 표시하는 몇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둘째는 성례전에 대해 올바르게 관리합니다. 셋째는 교회의 치리를 올바르게 행사합니다. 특히 칼빈은 교회는 훈련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잘 가르쳐야 합니다. 선포한 다음에는 잘 가르쳐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늘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와서 왜 복음전파와 함께 하는 일이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일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의문이 북한을 지원하면서 분명히 알았습니다. 학교를 세워 가르치면 변화가 있습니다. 가르침을 통하여 사람은 변화됩니다. 병원을 세우는 것은 병원에서는 고칩니다. 그런데 고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져야 합니다. 손을 대고 만지고 흔히 말하는 스킨십이 있고 휴면 터치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사람의 변화에 중요합니다. 예수님께도 사람들을 고치실 때에 만져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나를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만져보는 것은 확실한 변화입니다. 만져보는 것도 아주 소중한 교육입니다. 복음은 선포되고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선포와 가르침은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 전파는 거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복음이 “담대하게 거침없이” 전해졌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는 언제나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자를 담대하게 하고, 복음이 거침없게 하여 주십니다. 
  
이전에 우리가 보던 개역성경에는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전파는 거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파되지만 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끝이 없이 전파됩니다. 
  
기독교가 날로 전파되자 로마에서는 엄청난 복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역사적으로는 로마 황제의 10대 박해는 250여 년 동안 교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었고 복음에 대한 방해였습니다. 

첫째는 네로의 박해입니다. 네로는 로마시를 방화하고 기독교인에게 그 책임을 돌렸습니다. 네로에 의해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였습니다. 
둘째는 도미티아누스의 박해입니다. 이 때 기독교인들이 지하 동굴인 카타콤에서 은둔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트라야누스의 박해입니다. 
넷째는 하드리아누스의 박해입니다. 
다섯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박해입니다. 
여섯째는 셀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박해입니다. 
일곱째는 막시미누스의 박해입니다. 
여덟째는 디키우스의 박해입니다. 
아홉째는 바렐리아누스의 박해입니다. 
열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입니다. 

그런데 지금 로마에 가보세요. 기독교 없이는 로마를 해석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로마에 가면 기독교 유적을 빼놓고는 볼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극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기독교를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로마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의 종교와 문화가 온통 그리스 전체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신전들이 있었고 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름 없는 신도 있었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하여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하였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 “아덴 사람들아 내가 보니 너희가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외칩니다. 그 곳에서 스토익스 철학자들과 에피큐로스 철학자들과 변론합니다. 바울이 아테네를 다녀간 후에 기독교 없이는 그리스를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동방정교회인 희랍 정교회의 본산이기도 하지만 이제 그리스는 기독교 유산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되자 일제 강점시대가 시작됩니다. 일제 강점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순교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자마자 공산주의의 물결이 한반도를 덮습니다. 유물사상을 가진 공산주의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고 복음이 방해를 받고 순교자를 양산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125년의 역사 가운데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독교 역사 가운데 우리나라처럼 많은 순교자를 낸 나라가 없습니다. 순교는 복음의 씨앗입니다. 박해를 받았지만 복음의 전파는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더 확장되어 지금 전 국민의 4분의 1이 기독교를 믿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전래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막으면 막을수록 더 맹렬하게 번져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막을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유행하던 말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런 유머에 너무 민감하지 마세요. 특정인을 비하하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시각장애인이 이깁니다. 왜냐하면 눈에 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시각장애인과 소방수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 지 아십니까? 소방수가 이깁니다. 왜냐하면 물불을 안 가리기 때문입니다. 소방수와 할머니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할머니가 이깁니다. 왜냐하면 막가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물불을 안 가린다고 하는데 물과 불 가운데 어는 것이 더 무섭습니까? 물이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번 태국의 쓰나미를 보세요. 물은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명 피해를 본 것입니다. 
  
이런 모두가 막을 수 없습니다. 현대 우리 말 가운데 ‘못 말려’라는 말을 아주 많이 사용합니다. 지나치게 행동하는 사람에 “못 말려”라고 합니다. 감정이 뛰어난 사람에게도 “못 말려”라고 합니다. 심지어 끔찍한 애정표현에도 “못 말려”라고 합니다. 막을 수 없을 만큼 튀는 사람에게도 “못 말려”라고 합니다. 막을 수 없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절대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그가 기도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다가 불 풀무 속에 들어갔지만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지만 돌의 위협도 그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어 헤롯에 의해 참수를 당했지만 그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도 받았지만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유배도 가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매를 맞고, 태장에 맞고, 돌에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사자 굴에 들어가서 찢기고, 화형을 당하고, 카타콤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도 하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막지는 못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혀를 자르고, 손톱을 뽑고, 기름 가마에 넣어도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온갖 것으로 위협을 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면 가장 각광 받을 곳이 제가 볼 때는 비무장지대(DMZ)입니다. 이 지역은 세계자연환경보호구역으로 지구의 보고가 될 것입니다. 지구상에 일반인들이 60년 동안 접근하지 못한 데가 있을까요? 있을지 모르지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새나, 짐승이나, 생물들은 막지 못합니다. 그 곳에는 천연기념물 새들이 겨울을 나고 있고, 희귀한 동물과 식물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막을 수 있지만 동물과 식물은 막지 못합니다. 동물들이 사람들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막아도 들어갑니다. 동물들이 이 지역에 사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번 캐나다에 갔을 때에 어느 동네에 가니 ‘웨인 그레즈키 가’라는 길이 있었습니다. 북미 아이스하키의 전설적 골잡이입니다.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이라는 선수도 있습니다. 미국 대학 풋볼의 전설적 공격수 하이즈만이란 선수도 있습니다. 축구에는 브라질의 펠레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단거리 선수인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 선수가 있습니다. 이런 선수들이 질주하게 되면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선수들이 들어오면 수비수가 먼저 겁을 먹습니다. 

기독교에도 전설적 복음전파자가 많이 있습니다. 막을 자가 먼저 겁을 먹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하지 말라고 위협합니다. 왜요? 강하니까 그렇습니다. 강자에 대하여는 먼저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감정입니다. 사도행전 2:43에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했습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초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힘 때문입니다. 복음의 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의 당당함 때문입니다. 
  
찬송가에도 있듯이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이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지금도 복음은 전파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리 막아도 막아지지 않습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자마다 잘 못되었습니다. 복음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던 헤롯은 벌레가 먹어 죽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네로는 폭정을 거듭하다 자살했습니다. 세계를 엄청난 전쟁 속에 휘말리게 하고 600만 유대인을 학살했던 히틀러는 결국 자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론 

  사도행전은 성령의 행적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하나님의 시간은 무시간적입니다.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행적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21:25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합니다. 오늘로 저의 하나님의 나라 설교는 끝이 나지만 하나님의 나라 설교는 아마 끝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성령의 행적, 하나님의 나라 전파는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성령의 행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행적이 성도행전입니다. 우리의 삶과 교회의 행적이 사도행전의 연속으로 지금도 기록되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을 하나님의 이야기가 우리를 통하여 전해지고 기록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입니다.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나라의 증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가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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