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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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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눅 9:57~62)

     
2009년을 마무리하는 52번째 주일입니다. 연말이 되면 사회 각 분야에서 지난 1년간 일어난 가장 좋은 일, 가장 나쁜 일 10가지를 선정하며 지나 온 날들을 회고합니다. 2009년의 마지막 주간은  21세기를 여는 첫 10년을 마감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21세기의 첫 해 2001년 9월11일, 미국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대한 테러 사건을 시작으로 지난 10년은 테러와 테러에 대응하는 양 세력 간의 힘겨루기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았던 우울한 날들이었습니다.    더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면 알겠지만 영국 UCL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나이지리아 출신 청년이 성탄절날 암스텔담에서 미국 디트로이트 공항으로 향하던 여객기를 폭파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여 2000년대 첫 10년의 마지막을 끔찍한 테러 소식으로 마무리할 뻔 하였습니다.

서남아시아에 발생한 거대한 쓰나미와 중국의 대지진, 미국의 허리케인 등 정신없이 몰아친 자연재해는 현대 문명세계의 자존심을 여지 없이 짓밟아버렸습니다.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 불황은 물질 풍요를 누리며 잘 나가던 선진 서방 나라들조차 고개를 떨구고 깊은 한숨을 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국제관계와 자연 환경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 편안한 분야가 없고 어느 하루 조용한 날 없이 참으로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10년 세월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아프칸에 피랍되었던 자원봉사단 사건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2007년을 앞두고 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부흥 2007년’ 을 외치며 100년 전 평양에서 일어난 신앙대부흥을 재연하려고 대규모 집회들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여름에 아프칸에 피랍된 자원봉사팀 일로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렸고 공격적 선교정책을 펼치는 한국기독교를 향한 비판으로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팽배했던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진정한 신앙부흥은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여 체육관이나 광장에서 모이는 인위적인 대형집회와 행사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겸비한 각 개인의 심령들을 통해 시작되며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1년 혹은 10년 세월을 하나로 묶어 매듭을 짓고 또 새로운 1년과 10년을 향해 조심스럽게 출발하려고 합니다.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인류만이 과거를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뉘우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다짐하고 다시 일어서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우리가 걸어온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잘못된 것은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고쳐나가고 좋은 점은 서로 격려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기회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일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성경말씀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가 뒤를 돌아 보면 제대로 밭을 갈아엎을 수 없습니다.  이때 뒤를 돌아본다는 말은 한눈을 판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혹은 과거에 미련을 두고 현재에 불성실하여 내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이 말씀은 뒤돌아보는 일에 대하여 또 다른 관점에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선택하여 곁에 두고 일하셨는데 열 두 제자 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첫째는, 스스로 따라 나서는 사람입니다(57절).
둘째는,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 하고 부른 사람입니다(59절).
셋째도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61절). 

그런데 세 종류의 사람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쓰임 받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아닌 듯 합니다.

첫번째 사람이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했지만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람으로부터 좋다 나쁘다 아무런 대꾸가 없이 생략되었습니다.  묵묵부답으로 슬그머니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예수께서 부르신 것도 아닌데 자청하여 선생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과 겉으로 보이는 영광스런 모습만 보고 그 길을 따르려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네가 따르겠다고 하는 나의 길은 그렇게 쉽고 편하지 않다.   편히 쉴 곳도 없는 거칠고 험한 길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만 아무런 말 없이 슬그머니 뒤로 빠지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좋은 집이 생기고 편안한 삶이 보장될 것이라 기대하여 따른다면 처음부터 잘 못 생각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일시적으로 감동을 받고 즉흥적으로 헌신을 각오하였지만 ‘내가 받는 고난과 죽음도 함께 받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즉흥적 신앙인의 모습을 이 사람으로부터 찾아보게 됩니다.   

두번 째 사람은 제자의 길을 자원한 첫째 사람과는 달리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불러내신 사람입니다.   이 사람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여겨 부르셨는데 ‘먼저 아버지 장사지내고 돌아와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세번째 사람은 가족들에게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와서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사람에게 ‘손에 쟁기를 잡은 자가 뒤돌아보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되는 구절입니다.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주십시오’ 말한 이 사람의 말에 무슨 잘못됨이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하라니요? 이때 죽은 사람이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들 곧 예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 자기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도록 하고 너는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주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의 부친이 그날 돌아가신 것도 아닙니다. 연세 많으신 부친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 모시다가 돌아가시면 그때 따르겠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네가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이 사람은 먼저 세상의 일부터 해결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겠다는 대답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해석하면,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장례 풍습은 시신을 굴무덤에 안장하는 몇일간의 장례식으로 끝이 아니라 장례식을 치른 후 1년이 지나 유골을 거두어 유골함으로 옮기는 기간 전체를 장례기간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먼저 부친을 장사지내고 오게 허락해 달라는 말은 지금 즉시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1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정중히 거절하는 핑계에 불과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처음부터 제자의 길을 따를 마음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주님을 따를 마음이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사람 말이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과 작별하도록 허락해주세요’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에게마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하고 냉정하게 대답하십니다. 최소한 가족들과 작별인사는 하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기본적인 인간의 정마저 매몰차게 끊고 따라야 제자다운 것이라는 말일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부모자식과 가족간의 기본적인 도리마저 무시하고 집을 나와 예수를 따라야만 한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혹시 여러분 마음에 그러니까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비판을 듣는거라는 공감이 막 생기려고 합니까? 예수께서 어찌 그런 당연한 인간의 도리를 무시하고 사람들을 광적인 추종자들로 만드시려는가 의혹이 생깁니까? 이건 요즘 한국 사회를 어지럽히는 신천지집단이 하는 짓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제자도의 우선순위가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하시려는 강조법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지만 이 사람 역시 가족을 핑계삼아 지금은 헌신할 수 없다는 의도에서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제자의 길을 가겠노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마음에는 누군가 자기를 강력하게 붙잡고 가지말라고 설득하면 주저앉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았다는 뜻이고,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세상 일을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손에 쟁기를 쥐어주고 지금부터 밭을 갈라고 하시는데 이 사람은 가족을 구실삼아 뒤를 돌아보고 있으니 ‘쟁기를 손에 잡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을 그때에 헌신하겠다는 대답은 지금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적당한 응답이 아닙니다.    

한 손에 쟁기를 쥐고 또 한 손에는 막대를 들고 소를 몰며 밭을 가는 농부는 오직 앞에 있는 목표물을 보고 전진해야 밭이랑을 똑바로 일구게 됩니다. 얼마나 많이 일했는가 확인하고 싶어 뒤를 돌아다 보는 순간 쟁기가 돌뿌리에 걸려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밭가는 소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 밭이랑이 비뚤어집니다. 노련한 농부, 전문가 농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농부는 진정한 농부의 정신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한 번 목표로 정한 그 길을 갈 때 뒤돌아보거나 한 눈을 팔지 않습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씀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과거를 회고하고 정리하는 의미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을 금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람이 세상 재미와 옛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련과 아쉬움에 발목을 붙잡혀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두 발을 담그고 어정쩡한 태도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제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몇 주 혹은 몇 달간 제자훈련반에 등록하여 제자훈련 코스를 수료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구절 많이 암송하고 교회 안 빠지고 잘 나오며 봉사생활 앞장서 잘 하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훈련 프로그램 수료증을 받았어도 전과 다름 없이 가정에서 불성실하고 직장과 학교에서 이중인격자로 낙인 찍히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제 잘난 맛에 사는 고집불통 예수쟁이라는 소리를 듣고 산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자칭 제자일 뿐입니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의 삶을 나의 삶으로 받아 불편하고 힘들고 손해가 될지라도 일평생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런 자격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씀은 어쩌면 세속 직업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로 훈련받고 목사가 될 사람들이나 선교사들에게 주시는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꼭 목회자와 선교사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일까요?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됨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전에는 세상의 즐거움과 재미가 우선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우선순위로 두게 되었습니다.        

지금 각자의 손에 쟁기가 들려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밭에서 일하는 농부로서 내가 할 일은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오직 앞을 바라보며 거칠고 험한 밭을 부드럽게 일구어 그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내가 주를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먼저’ 하며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농부는 되지 말기 바랍니다. 한 손에 전에 즐기던 세상의 일도 꼭 붙잡고 다른 손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도 함께 얻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의 부르심을 최선으로 두지 않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두 발 담그고 머뭇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부류의 사람에 속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늘로부터 내린 유황불에 불타 무너질 때 롯과  아내와 두 딸들은 천사의 손에 이끌려 황급히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성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불타 죽게된 그들을 불쌍히 여겨 건져주신 하나님은 목숨을 건짐 받은 그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앞만 보고 달리며 절대로 뒤를 돌아다 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보존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도망쳐나오게 된 롯의 아내는 성읍에 두고 온 모든 것들이 생각나 그만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습니다. 절대로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씀이 있었지만 두고 온 집과 재물과 피땀 흘려 모아놓은 삶의 터전이 아깝고 아쉬워 잠간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금기둥으로 변하였습니다. 결국 롯의 아내는 과거의 것은 물론 목숨까지 모든 것을 영원히 잃고 만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마지막 날이 롯의 때와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롯의 때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다가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멸망한 것처럼 세상 마지막 날이 갑자기 임하리니 세상 사는 재미에 흠뻑 빠져 그 날이 옴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허둥대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지붕에 있는 자는 세간살이 가지러 집으로 내려가지 말고 밭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뒤로 돌아오지 말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 하셨습니다.    

롯의 처는 목숨이 달린 긴박한 순간에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영원을 잃어버린 불명예스런 사람의 모델입니다.  주님은 롯의 처를 예로 들어 영원한 생명을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건가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세상의 재물이나 업적이나 나의 이익을 위한 인간관계 같은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생명을 소유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고 따르는 순종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불편함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이고 그리스도를 가장 우선으로 둘 수 있는 각오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다는 역설입니다. 부담스러우십니까?    

지난 해를 돌이켜 생각해봅시다. 나는 앞을 향해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왔는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목표를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로 정하고 힘껏 달려왔는가?  갈팡질팡 우왕좌왕 뒤를 돌아보고 한참 되돌아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방향을 잡고 있는 중인가?    아니 처음 결심을 포기하고 들판에 머물렀거나 뒤를 돌아보며 두고 온 세상 것들이 아쉽고 아까워 눈물 흘리고 있는가?  어떻게 해서든 낡은 세계의 한 부분을 움켜쥐고 있으려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주시려는 더 영광스런 새로운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가?  제자인가?  지나가는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만 보는 행인인가?  눅9:51에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가까워졌음을 아시고 최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그 길을 머뭇거리거나 지연시키고 한 눈을 팔지 않으시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굳은 각오가 엿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바로 그런 자세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주께서 앞서가신 길을 따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먼저 앞서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면 됩니다. 2009년의 남은 시간은 물론 새해에도 주님께 부름받은 영광스런 제자의 삶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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