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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마지막 때를 사는 지혜 (마 24: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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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를 사는 지혜 (마 24:36~51) 
  

벌써 한 해가 다 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 해를 보낸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아쉬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철이 든다는 얘기겠지요?
아무튼 12월은 성탄절기가 있는 기쁘고 즐거운 달임에는 분명하지만, 뭔가 아쉬움을 남기는 달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두 해 보내다가 「기러기 울어 에는 하늘 구만리…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하는 노래의 주인공이 되어 이세상이란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하는 서글픈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1. 본문에는 ‘마지막 때’임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날’, ‘그때’, ‘인자가 오리라’ 등의 말씀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말씀들입니다.
36절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40절 “그때에........”
42절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른지........”

43절 “.......어느 시각.......”
46절 “주인이 올 때에........”
50절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이 ‘마지막 때’는 주의 백성들에게는 ‘승리의 날’이고, ‘상 받는 날’입니다. 

계 22: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됩니다. 

암 5:18-19절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같도다.” 
사자를 피하여 죽으라고 도망을 갔는데 그곳에 곰이 있어요! 
‘집에 들어가면 좀 쉴 수 있겠지’ 하고 집에 돌아와 숨을 돌리고 있는데 그곳에 뱀이 있어요!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이란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의미의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으로 오는 개인적인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재림으로 오는 우주적인 종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두 가지 종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가 피할 수 있겠어요?

2. 그런데 ‘그때를 모른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재림의 불예측성’이라고 합니다.
36절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본문에 보면, 그 재림의 불예측성을 강조하는 표현인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무려 다섯 차례나 나옵니다.

36, 37, 42, 44, 50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강조하고 싶으셨으면 이렇게 반복하셨을까?’ 하는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살전 5:1-3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3. 주님은 그 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1)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37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절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노아의 때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문제였습니까? 
먹는 것도 죄고, 마시는 것도 죄고, 장가드는 것도 죄고, 시집가는 것도 죄입니까? 

그것은 일상생활일 뿐입니다.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의 문제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상생활에 정신이 팔려 종말의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종말의식이 없다.’는 말씀은 마지막 심판과 영생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눅16:10-31절에 여러분이 잘 아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말씀이 나옵니다. 
그 비유의 1막은 이 세상에서 부자는 먹고 잘 살았고, 거지 나사로는 못 먹고 병들었다는 것이지요! 
둘 다 죽었습니다.

2막은 거지는 천국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손가락 끝에 찍힌 물 한 방울을 애타게 기다릴 만큼 뜨거운 지옥 불 한가운데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눅 16:25절에 보면, 부자의 인생을 평가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잘 사는 것도 죄가 됩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받았다.’라는 희랍어는 ‘아펠라베스’로서 ‘좋은 것에 자기를 붙들어 맨 상태’를 말합니다. 
이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거지 나사로를 더럽다고 대문간에서 내어 쫓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밥상 가에 더러운 거지 나사로의 손이 닿았을 때 상을 찡그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남모르는 도덕적인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좋아하는 것에 붙잡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재미에 정신이 팔려 영생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니 하나님에 대하여, 영생에 대하여 완전히 스위치를 꺼버렸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나사로는 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줄 아십니까? 
예수님의 비유 말씀 중에 ‘이름’이 나온 예는 이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란 이름의 의미가 중요하겠지요? 
나사로란 ‘엘리야 자알’이란 히브리어를 희랍어로 옮겨 쓴 말로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이 세상에 자기를 맡겼다면 나사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 사람입니다. 
부자가 이 세상의 좋아하는 것에 붙잡혔다면, 나사로는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천국에 간 것입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았다는 것이지요!

강화도에서 전도사 시절 목회할 때 농촌에 사시는 분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애를 많이 썼습니다. 
매해 한 번씩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가호호 방문하여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전도가 제일 안 되는 분들이 누구였느냐 하면 땅마지기나 짓는 농촌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분들 얘기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됐지. 예수는 무슨 얼어 죽을 예수냐”는 것입니다. 
“내가 왜 그 추운 겨울날에 교회에 가서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생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날이 오면, 이런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심각한 분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40절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밭에 있는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일까요? 
부자일까요? 형제일까요? 
41절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집에서 맷돌을 가는 두 여인은 어떤 사이일까요? 
고부일까요? 자매일까요? 
아무튼 가까운 사이임이 분명합니다.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면 같이 데려가시지 왜 하나만 데려가실까요? 
뭔가 못마땅하여 버려두시려면 같이 버려두시지 왜 하나만 버려두실까요?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각자의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저를 만나면 늘 이런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목사님 저가 천국 가는 것은 따 논 당상입니다. 제 집사람이 집사인데 설마하니 남편 버려두고 혼자 가겠습니까?” 
우스갯소리지요? 

목사에게 교회 안 나오는 것에 대하여 미안해서 해본 소리지요?
그러나 부부라도 종말에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부자라도 종말에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형제라도 가는 길이 다릅니다. 
고부일지라도 가는 길이 다릅니다. 
자매일지라도 가는 길이 다릅니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합니다. 

눅17:29-35절은 본문과 병행구절(같은 내용)인데, 누가복음에서는 롯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눅17:32절에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 롯의 가족들은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롯의 처만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가족이 다 구원받았는데 그 아내를 빼놓을 수가 있을까요? 
그 어머니만 빼 놓을 수가 있을까요? 
‘롯의 처를 기억하라!’ 

개인의 신앙태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강화에 한 권사님이 계셨는데 이분은 설교만 시작하면 좁니다. 
찬송 부를 때에는 눈이 초롱초롱하다가 설교를 시작하면 좁니다. 
그리고 언제 눈이 번쩍 뜨이느냐 하면 설교 끝나고, 설교자가 기도한 다음 ‘아멘!’ 할 때 정신이 번쩍 듭니다. 

어느 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아멘’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고 얼굴이 환해져서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똑같이 교회 와서 다른 사람들은 은혜 받아 기뻐하고 찬양하고 있는데 나는 뭐냐?”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한심스러워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교우들은 다 돌아갔는데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권사님은 예배당 안에서 엉엉 울었답니다. 
의자를 치면서 울었답니다. 
“나는 뭡니까?”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졸음이 오지 않더랍니다. 

개인의 신앙태도가 중요합니다. 
내가 구원받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듣고 은혜 받아야 합니다.
그날이 오면 각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심각한 분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4. 그렇다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항상 깨어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42절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른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대하여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가끔 TV보면,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갑자기 TV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지요? 
뒷문으로 도망가는 사람, 윗도리를 벗어 얼굴을 가리는 사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사람, 급한 나머지 카메라 렌즈를 손바닥으로 막는 사람....... 
그때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위 밑에 숨어도 바위가 그 사람을 내주고요! 
땅속에 숨어도 땅이 그 사람을 토해 내고요! 
우주 끝으로 도망가도 그곳이 바로 주님의 코 앞이고요! 
그러므로 깨어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이란 신앙잡지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소돔성에는 성경이 없었습니다. 목사도 전도사도 없었습니다. 교회도 없었습니다. 전도지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정상을 참작하시지 않고 무섭게 심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수백만 권의 성경이 있고, 수천 개의 교회가 있고, 수만 명의 교역자가 있는 우리 사회는 무슨 수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소돔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창궐하는 이 세대의 죄악을 무슨 형벌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마지막 주일에 인생의 마지막, 그리고 주님이 오실 마지막 때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깨어 준비하는 성도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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