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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녀의 권세 (요 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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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권세 (요 1:12~13)


오늘은 2009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두렵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2009년을 시작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날에는 꼭 제 삶의 마지막 날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있듯이 반듯이 우리의 삶에도 마지막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이제는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그 날이 오면 제가 세상에서 인간적으로 귀히 여기던 모든 것들은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소유했던 모든 것들은 다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제가 소유했던 것으로 평가받지 않고 제가 존재했던 것으로만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의해 평가를 받습니다. 어디에 사느냐?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 그 아파트는 몇 평 짜리냐? 연봉은 얼마나 되느냐?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 등등은 살아 있는 동안 매우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 그런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한 평 남짓한 무덤 하나가 소유의 전부가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연봉은 없으며 좋은 차도 타고 다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덤 속에서의 평가가 진정한 평가가 될 것입니다.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을 때에도 가치 있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남겼는가가 평가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땅에 보물을 쌓아둔 사람보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 사람이 귀한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산 사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산 사람이 옳은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 하나님의 심판 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은 언제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죽음의 날 이후 백 년 후 또는 천 년 후가 된다고 하여도 죽음 이후의 날은 더 이상 시간적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상은 우리가 죽은 날과 죽음 이후 백 년 후 혹은 천 년 후 올지 모르는 심판은 날은 그냥 영원한 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릴 연옥 같은 곳은 없습니다. 저는 제 죽음의 날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라고 생각하며 긴장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습니다. 사람의 평가와 판단에도 민감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평가와 판단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세월을 열심히 살아 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상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축복을 영원히 누리며 천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심판 날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우리가 몇 평 아파트에서 살았는지 연봉이 얼마였는지와 같은 것들은 전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우리의 죄에 대한 것 뿐입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면 살인과 도적질과 간음과 같은 것들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들도 죄인 것이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가장 크고 무서운 죄는 그와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가장 크고 무서운 죄는 선악과 따먹은 죄입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유혹하면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속였습니다. 하와는 거기에 속아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한 죄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

세상에서도 가장 큰 죄가 있다면, 어느 나라나 정권에서도 사형으로 다스릴만한 큰 죄는 반역죄입니다. 세상에 반역죄 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죄도 크고 간음죄도 크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큰 죄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2001년 10월 7일 높은 뜻 숭의교회를 시작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였습니다. 사람이 주인이 되는 교회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지금까지 거의 극약 처방을 하다시피하면서 목회를 하여왔습니다.

저희 교회는 임직자의 정년과 임기가 우리 교회의 모법인 통합 측 장로교회의 헌법보다 짧습니다. 헌법은 70세가 정년인데 우리 교회 정관은 65세로 정년을 낮추었고, 헌법은 70세 정년 까지는 임기가 보장되었지만 우리 교회 정관은 임기를 6년 단임으로 한정하였습니다. 직분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 있는데 그 권력이 커져서 사람이 주인 노릇하는 교회가 될까 싶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목회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단의 헌법은 목회자의 정년도 70세 이지만 우리 교회는 목회자의 정년도 65세로 하였습니다. 5년 동안 합법적으로 생활비를 더 받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제한하였다는 것은 쉬운 일과 작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로 제도도 없이 하였습니다. 원로 목사가 되면 죽을 때까지 시무할 당시 생활비의 70% 정도를 죽을 때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 교회는 없이 하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목사가 은퇴한 이후에 원로 목사가 되어 계속 교회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게 되다보면 그가 교회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는 시작 된지 3개월 만에 장년 주일 출석이 천 명을 넘었던 교회입니다. 그 천명의 교인들은 대개가 다른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를 하시던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장로님들만도 30명 이상이 오셨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교회의 위기로 보았습니다. 교회가 개척되어 백지 상태인 상황에 다른 교회에서 장로와 권사와 집사의 직분을 맡아 크게 봉사하시던 분들이 갑자기 천 명이나 모였다는 것은 절대로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가 있어서 어디를 가거나 자기가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 법인데 높은 뜻 숭의교회 처럼 아무도 임자가 없는, 쉽게 말해 터줏대감이 없는 무주공산과 같은 마당에 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천 명씩이나 한꺼번에 몰려왔다는 것은 절대로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와 같은 위험을 막기 위하여 보통 교회들이 잘 하지 않는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그것은 2년 동안 직분을 임명하지 않은 것입니다. 직분을 임명하지 않기 위하여 조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흔한 남녀 선교회도 조직하지 않았고, 교회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구역도 조직하지 않았습니다. 조직이 생기면 직분이 생기고 직분이 생기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이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조직도 하지 않고 오직 주일 낮 예배만 드리는 이상한 교회를 2년 동안이나 하였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사람이 주인 노릇하는 교회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청어람을 매입하려고 할 때 약 30억 원 정도의 은행대출이 필요했었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의 교세와 재정을 생각하면 은행이 서로마다 저희 교회에 대출을 해주려고 경쟁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았습니다. 두 번이나 퇴짜를 맞았습니다. 은행이 우리에게 대출을 해 줄 수 없다고 결정을 내린 까닭은 우리 교회가 안정적인 교회가 아닌 교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은행은 높은 뜻 숭의교회가 김동호 목사라는 한 사람의 한 사람의 인간적인 영향력 때문에 쉽게 성장한 교회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한 사람에 의하여 쉽게 성장한 교회는 그 한 사람만 잘못되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는 교회라는 것이 은행의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은행은 정확히 그와 같은 이유를 내세우면서 대출을 거절하였었습니다.

은행 직원으로부터 그와 같은 이야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그 때의 충격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교회가 되는데 있어서 일 등 가는 장해는 장로님도 아니고 권사님도 아니고 집사님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때부터 높은 뜻 숭의교회로부터 김동호를 제거하는 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첫 번 째 작전이 안식년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안식년의 목적은 쉼이 아니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으로부터 김동호 목사의 물을 빼는 것이었습니다. 제 안식년을 시작한 바로 다음 주일 약 천 명의 교인이 줄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교회가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 무너져도 안 들어간다. 내가 들어간다면 교회는 다시 수습이 되겠지만 내가 들어가면 수습이 되고,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무너지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그런 교회는 차라리 무너지는 것이 더 낫다. 다 무너져도 안 들어간다.”

저는 제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더 건강해졌습니다. 성장은 멈추었지만 오히려 교회는 더 건강해졌습니다. 저의 안식년을 통하여 교회는 좀 더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로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 9월 7일 설교 이후 교회는 넷으로 분립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넷으로 분립하면서 저는 교회 목회 일선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위험할 수 있었지만 여러분들은 자랑스럽게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를 더 건강하게 지켜내 주셨습니다. 목회 일선에서 손을 떼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이 있어서 한 주일에 한 교회씩을 돌아가면서 설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한 주일에 한 교회씩을 돌아가면서 설교하던 것을 한 달에 한 교회씩 돌아가며 설교하는 것으로 줄일 작정입니다. 한 달에 석 주일은 담임목사가 공석인 우리 노회의 어느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내년에 한 달에 한 번이 아닌 넉 달에 한 번 정도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결정을 하는 이유는 높은 뜻 교회에서 김동호의 물을 좀 더 빼기 위함입니다. 일종의 확인 사살 같은 것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그렇게까지 극단의 방법들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 높은 뜻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인이신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와 같은 우리 높은 뜻 교회의 전통과 정신을 이어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볼 때 지금 우리 높은 뜻 교회들은 위기입니다. 자신의 자리와 영향력을 증대하여 나름 교회의 권력을 잡아보려고 하는 무의식적인 행동들이 눈에 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모습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심해야만 합니다. 교회적으로 조심해야만 하고 개인적으로도 조심하여야만 합니다.

실제로 높은 뜻 교회에서 제 권력은 많이 삭감이 되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분립된 네 교회의 재정과 인사행정에 제가 개입한 일이 없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독립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때문에 이제는 제가 개입하고 싶어도 개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벌써 자리가 잡혔기 때문에 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게 되었습니다.

저도 권력이 좋습니다. 저도 제 힘이 센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그 힘을 포기하려고 힘썼습니다. 그것은 제가 욕심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혹 저를 모르고 욕심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정말 저를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욕심이 오히려 많은 사람입니다.

제가 부리는 욕심은 권력이 아닙니다. 제가 부리는 욕심은 권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영접하고 고백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말입니다. 저는 기껏해야 일 년에 100억 원 정도 집행하는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그것도 개척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의 권력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포기함으로 오늘 성경이 약속하신 권세, 높은 뜻 숭의교회가 줄 수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 힘은 오히려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제 자리를 내려놓으면서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권력에서 오는 힘이 아닌 권세에서 오는 힘을 느낍니다. 내가 쟁취하는 힘이 아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힘을 느낍니다. 

어렸을 때 줄넘기를 가지고 친구들과 줄다리기를 하던 생각이 납니다. 줄넘기의 줄을 각자 허리에 두르고 상대방을 넘어트리는 게임입니다. 줄다리기에서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잡아당기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잡아당길 때 줄을 놓아 버리면 상대방은 자기 힘에 넘어지곤 하였습니다. 욕심 사납게 함부로 줄을 잡아 당기면 위험했습니다. 줄을 놓으면 질 것 같았지만 때에 맞게 줄을 놓으면 오히려 승리하곤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려놓는 것이 마치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내려놓아야만 권력이 아닌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원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욕심이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자리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그 모두가 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욕심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되고 중심이 되려고 하는 욕심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자신을 위하여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자신과 교회의 주인을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세상의 권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더 강하게 될 것입니다. 더 부하게 될 것입니다. 더 훌륭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되어도 후회할 것이 없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 평 무덤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의 삶이 가장 부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고 욕심과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사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언제나 자신의 주로 영접하시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성경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력이 아닌 권세를 이 땅에서도 마음껏 누리며 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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