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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작은 고을 베들레헴, 위대하신 왕 (미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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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고을 베들레헴, 위대하신 왕 (미 5:2~6)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이번 주 12월 25일, 금요일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마구간의 아기 예수님, 어지신 어머니 마리아, 동방박사들, 황금과 유향과 몰약,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베들레헴 하늘에 나타난 천군천사들, 의로운 사람 요셉, 그리고 예루살렘의 헤롯왕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베들레헴 하늘을 밝힌 별,  그런 것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탄절이 되면 크리스마스트리, 크리스마스 캐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선물교환, 명동이나 시청 앞 광장의 루미나리가 생각이 날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정말 화려하고 찬란한 루미나리 장식을 보면 신비감이 일어날 만큼 아름답기만 합니다.   요즈음에는 시가지의 전 가로수를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하니 사람들이 들떠서 나돌아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적은 것이라도 받으려고만 하는 생각을 버리고 나의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베푼다는 생각만 가지면 얼마든지 산타클로스가 될 수 있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아이들에게는 아기 예수님보다도 더 친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굴뚝으로 몰래 들어와 착한 아이의 양말이나 신발 속에 선물을 넣고 간다는, 붉은 외투를 입고 지붕을 타고 다니는 흰 수염이 나신 전설 속의 노인입니다. 

산타클로스라는 말은 주후 270년 소아시아 지방 리키아의 파타라시에서 출생한 ‘세인트(성) 니콜라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는 남을 불쌍히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던 사람으로 후에 미라노의 대주교가 되었고, 남몰래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데, 그의 생전의 사랑의 자선행위에서 유래되어서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생겨났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기 자녀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그 분을 성인으로 숭배하는데,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상투스 니콜라우스’라고 불렀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산 니콜라우스’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하면서 ‘산테 클라스-Santa Claus’라고 불렀고, 미국 사람들은 이 발음을 ‘산타클로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흰털이 들어간 빨간 점퍼를 입고 긴 털모자를 쓴 멋진 할아버지로 그린 것은 1931년 미국의 ‘해돈 선드 블롬’이라는 분이 코카콜라를 광고하면서 그린 그림 때문에 그렇게 멋진 할아버지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서구 유럽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집을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은 마음을 들도록 장식을 합니다.   촛불을 밝히거나,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거나, 조그만 구유를 가져다 놓거나, 어떤 가정에서는 유모차를 놓고 선물을 담아놓거나, 12월 24일까지 온갖 것으로 장식합니다.  그러다가 12월 25일 되면 아기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형을 가운데 놓고, 그 모든 장식을 모아놓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때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 오 임마누엘”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우리도 기독교문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이 땅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말은 예수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장차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왕,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성별하듯이 택하신 사람을 메시아라고 했습니다.  메시아는 고통과 신음 속에 고통 받는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구약 성경에 곳곳에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 구세주가 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모세오경에서는 신명기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이스라엘은 그들이 고통 받을 때마다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사11:1에서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한다는 말은 다윗의 후손에서 한 인물이 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정적인 예언의 말씀은 사7:14절에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예루살렘 성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2)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소문이 헤롯왕에게 들어갔습니다.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박사들의 말을 듣고 소동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말하였습니다.    

박사들은 하늘의 뜻으로 알고, 찾아 왔는데, 그의 별을 보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유대의 왕이 나셨다고 하니 헤롯이 전전긍긍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려고 하면 지금까지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헤롯의 왕조는 무너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헤롯왕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성별하여 세우시는 사람, 기름을 부어 세우시는 이들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를 세울 때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였습니다.  그리스도는 3중직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 대제사장 중에서 하늘로서 내려오신 대제사장, 선지자중의 선지자였습니다.  

이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했습니다.  마2:5-6입니다.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성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믿고 살아가지 못하여 문제이지, 성경을 아는 데는 박사였습니다.

요한복음7장에 보면, 예수님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서서 외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고 했습니다.  그 때에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7:40-42)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구원하실 메시아,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미가5:2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유대의 모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미가5:2의 말씀을 새로운 왕,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가 탄생하는 곳, 유대인들이 믿고 고백하는 대로 만왕의 왕,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게 되었습니다.  

미5장의 모든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메시아는 누구이며, 그는 언제 어디서 태어날 것이며, 그가 이 세상에 와서 어떠한 사역을 하게 될 것인지를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이란 곳은 예루살렘의 남쪽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팔레스타인의 중앙산맥, 사해까지 계속되는 유대 광야의 끝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곳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 베들레헴이란 작은 동리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동리가 스불론 땅에도 있어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부르는데, 예전에는 ‘에브라다’라고 했습니다. 에브라다라고 불리는 베들레헴이라는 말입니다.    베들레헴이란 뜻은 ‘떡집, 빵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베트”는 집이라는 말이고, “레헴”은 빵, 우리말로는 떡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시고,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곳입니다.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유대 많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가장 작은 고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고을에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었기에 가장 작지 아니하다고 한 것입니다.  
초라한 동리,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셨습니다.  초라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왕은 위대하신 왕이십니다.  베들레헴이란 동리는 유대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동네였습니다.    그리 크지 아니한 농촌마을입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산동네였습니다.  그곳은 다윗 왕을 배출한 곳이지만, 엄청나고 크게 도시화된 것도 아니고, 초라하고 작은 고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새 왕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었습니다.  “그 분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하셨습니다. 

상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올람”이라고 하는데, “영원, 긴 시간 고대, 과거, 먼” 그런 뜻입니다.  태초라는 말, “케뎀”이란 말은 ‘이전, 고대’를 말하는 것으로 상고라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의 태초, 영원 전부터 계셨던 분이십니다.  주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태초에, 영원 전부터 계실 수 없으십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분, 영원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4절 말씀에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호와의 능력과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한다고 하셨습니다.  양떼를 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요10:10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5절 말씀에 “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던 대적을 물리치셨습니다.  여기 앗수르 사람은 적그리스도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악한 사탄, 우리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 평강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위하여 싸우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살펴본 베들레헴은 아주 미약한 마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화려한 도시를 사용하시지 않고, 보잘것없는 작고 미미한 동리를 사용하셔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고 계십니다.  

고전1:27-31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선택하셔서 지혜 있고, 강하고,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다는 도시나 그런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여 성령으로 잉태시킬 때에도 보면, 위대한 여성, 알아주는 여성, 잘 난 여성들을 제치시고 이름도 없는 여성, 순결한 여성, 주의 계집종이라고 인정하는 순박한 여성을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눅1:46-48에 보면 마리아의 찬가가 나옵니다.   마리아가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비천함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보잘것없으며, 세상적인 가치로 보아도 그렇게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였으며, 눈에 띄는 사람도 아니고, 알려지거나 중요하게 여김을 받거나 그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를 선택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보잘것 없는 시골 촌놈이었는데, 하나님 믿어서 횡재하였고, 이렇게 소중하게 쓰임받아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감사, 감격입니다. 무슨 다른 말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백골난망’이란 말이 생각났습니다.   “죽어 백골이 되어도 깊은 은덕을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알아줄 만한 사람, 대단한 귀족, 눈에 잘 띄는 그런 사람을 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비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비천함을 돌보시고 주린 심령을 좋은 양식으로 채워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가 받아야 하는 심판, 재앙, 저주를 당신이 몸소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인디언 추장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개척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쫓아내기 위해서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마을 주위에 불을 질렀습니다.  당시 인디언들은 사방에 옥수수를 심어놓고 그 가운데 부락을 만들고 거주하고 있었는데 사방에서 불길이 조여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시간 뒤에는 마을까지 불길이 번질 상황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모두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때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추장이 나서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어서 빨리 마을 앞 옥수수 밭에 불을 질러라!  꾸물대지 말고 빨리 빨리 불을 질러라!!”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추수를 기다리고 있던 옥수수 밭은 새까맣게 불타 버렸습니다.   추장은 다시금 마을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살고 싶거든 모두 다 불탄 자리에 올라서라!”  마을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젖먹이 어린 자녀들을 끌어안고 평생 살아온 집에서 나와 불타버린 옥수수 밭으로 올라가 그 엄청난 화염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추장은 이미 한번 불에 탄 곳은 다시는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무서운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심판 받으신 십자가의 자리에 나오기만 하면 다시는 심판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짊어지시고 심판 받으셨기에 우리는 같은 죄를 가지고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 받은 자리에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5:2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책, ‘The Gift- 바로 당신을 위한 특별한 선물’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시에 북군의 군인들 가운데 전쟁과 죽음을 두려워 한 병사가 탈영하였고, 그가 잡혀와 재판장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를 향한 사회의 여론은 한마디로 즉각적인 사형선고를 요구했습니다.  전쟁에 임하고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피’를 보임으로 임전불퇴의 군인정신에 본보기로 보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죽음에 두려워 떨고 있는 북군 병사를 향하여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즉각적인 사면을 내리며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먹고 재기하여 전투에 임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북군은 남군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한 병사가 있음을 보고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치열한 전투에 나가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음을 맞은 상태였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그의 시신을 수습하던 동료들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두려움에 떨며 달아나다가 잡혀와 사형언도 직전에 이르렀을 때에, 사형에 처하지 않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사면해주었고, 자신의 모든 가치를 재평가하게 만든 링컨 대통령의 한 장의 사면서였습니다. 꼭 죽어야 하는 자리였는데, 무조건 사면해주므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쳐 위대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같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내려오신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보잘것없고, 그냥 버림당해도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위하여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지신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였다고 사면서를 써주셨습니다.    우리는 허물 많은 죄인이요, 세상에서 비천한 사람이요, 가장 작은 자였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을 위하여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헌신 봉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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