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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요일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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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요일 4:9~10)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 있는 다섯 번째 청원은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비는 청원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준 것 같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그 말이 뒤에 따라옵니다. 그래서 원문에서 앞서는 부분을 먼저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죄 용서를 하나님께 빌라고 가르치셨다는 데서 우리는 우선 몇 가지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저자는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굳이 하나님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간구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의 상실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한 후 곧바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고백했습니다. 또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9) 죄의 용서는 이렇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누구나 죄의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짓누르며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죄의 용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가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시기를 비는 기도는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과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우리의 모든 문제상황으로부터 구원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켜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의 참됨과 그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사탄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으며,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에 빠져 하나님께 순종해야하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의 자리를 온전히 드리지 못한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거부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거부는 곧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거부로 이어지고 또한 인간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와의 올바른 관계의 거부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나라의 외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삼중의 관계가 바로 서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모든 바른 관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외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백성”다움이며 창조주이신 삼위로 일체 되신 하나님처럼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바른 삼중 관계의 거부, 하나님나라의 외면,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비인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의도되었으며 관계적 존재,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이러한 사실들을 외면하거나 거부하거나 상실한다면 더 이상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비인간화된 상태로 내버려두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비인간화된 우리를 다시 참 사람 되게 하시려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일차적 죄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요16: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상실된 하나님의 나라를 되찾아주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람들 사이에서 온 창조세계와 함께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복구시키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따라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다시 하나님나라의 삶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전적으로 은혜로운 새 언약과 제안에 응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죄 중의 죄입니다. 

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수가 되고 사람들 서로 간에 온갖 갈등과 싸움이 일어나며 자연과 더불어 대립관계에 서게 됨으로써 인간의 생명과 행복이 파괴되고 위협받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닥친 이러한 결과들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죽음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죄의 결과로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5:12) 하고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 하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합니다(고전15:22).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편지하며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2:1)라고 부르고,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도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골2:13)라고 써 보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편지하며 죽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죽음이 육신적인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육신적인 죽음과 구별하기 위해서 영적인 죽음이라고 부를 이 죽음은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선 우리는 하나님지식의 상실과 마음의 부패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엡4:18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없음이 곧 영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신자들에게도 이렇게 썼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0-18) 깨달음이 없고 선을 행함도 없으며 평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는 것이 곧 영적 죽음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실을 영적 죽음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롬1:28)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2:12)는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자입니다. 

또한 우리는 죄의 노예상태를 영적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식, 그의 뜻, 그와의 교제를 떠난 상태는 다름 아닌 죄와 함께하며 죄의 지배를 받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사도 바울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 바 있으며(롬3:9) 사람이 다 “본래 죄의 종”이었다고 합니다(롬6:17). 

끝으로 이성과 의지의 갈등, 죄책, 고뇌, 수치심, 불안, 초조, 기쁨 없음 등 또한 영적 죽음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부르짖었듯이 이 곤고함이란 말로 응축된 상황(롬7:14-23)을 우리는 영적 죽음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죄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닥친 육체적 죽음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죄 때문에 우리에게 육체적 죽음이 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명령을 어긴 첫 사람 아담과 하아에게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신 것이나 죄를 범한 그들이 영생하게 하는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하는 것을 원치 않으셔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어보내시고 그들에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신 것은 사람이 본래는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존재이었으며 오직 죄의 결과로 육체적 죽음이 주어진 것임을 분명하게 가리킵니다. 우리가 병들고 늙어 죽게 되는 것 또한 하나님 앞의 죄의 결과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죄가 무엇이며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때 우리는 날마다 죄 가운데 살고 있으며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죄의 용서가 없다면 정말 우리의 삶은 절망과 공포와 불안과 근심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절실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왜 기도할 때마다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하시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허긴 히브리서 9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으며(히9:26)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9:1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으로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면 매일같이 용서를 빌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일어날 만합니다. 이에 대해 뭐라고 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셨다면 아버지로서의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없고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도 취소되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왜 용서를 매번 빌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말씀 즉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었다가 찾고 즐거워하는 사람의 비유(눅15:4-7)와 한 드라크마를 잃었다가 찾고는 즐거워하는 여자의 비유(눅15:8-10)와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 때문에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눅15:11-32)의 공통된 결론이 무엇입니까?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하는 것이 많아도 궁극적으로는 결코 미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남용하여 끊임없이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부모에게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 용서를 비는 말 한 마디 없이 지낸다면 그 부모의 슬픔과 괴로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것은 부모에 대한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할지언정 그때그때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눈물 흘리며 용서를 비는 자녀 앞에서 부모의 분노와 질책은 다 녹아내리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날마다의 죄를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며 용서를 비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죄 용서를 비는 것은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빌라고 가르치시고 이어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라 하신 것은 우리의 신앙이 육신적, 물질적 필요를 해결하는 일에 머물지 말고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영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데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청원 속에서도 우리는 “나의” 죄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빌라 하신 주님의 뜻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의 죄의 문제만 아니라 내가 사는 사회, 나라, 세상의 죄의 문제를 함께 끌어안고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단순한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저 없었던 것으로 변제해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닥친 모든 문제를 함께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용서와 함께 당신과의 화해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 화해를 위해 비싼 값을 치루셨습니다. 

당신의 유일하신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구구절절이 은혜의 말씀입니다. 성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이런 놀라운 은혜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은혜의 사건을 바로 깨닫는 이번 성탄절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빌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먼저 이루어놓으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구하라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비는 기도와 함께 우리가 할 일은 그 기도의 응답으로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깨달음과 결단을 새롭게 하는 이번 성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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