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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와 바꾼 생명 (신 30:6~8, 행 20: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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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와 바꾼 생명 (신 30:6~8, 행 20:22~25)


옛날 엿장수를 기억하십니까? 동네 골목길에 엿장수 가위소리가 들리면 활기가 찹니다. 집집에서 냄비, 고무신, 구리전선, 헌책, 머리카락 등을 가지고 나와서 엿을 바꿔 먹습니다. 당시에는 간식이라는 게 별로 없던 터라 엿 바꿔 먹는 재미는 생활의 활력이었고 큰 재미였습니다. 물건을 가지고 와서 엿과 바꾸면 서로 이득을 봐야 합니다. 엿장수는 고물로 돈을 벌어야 하고, 바꿔먹는 사람은 엿 맛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데 한 쪽은 손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대개는 고객이 손해를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을 바꾼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한번밖에 없는 생명입니다. 연습이 없는 인생입니다. 얼마 전 서해에서 또 남북 간의 교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휴전이 아니라 정전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연습이 없습니다. 항상 훈련을 실전처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습니다. 생명이 있을 때 재산이고, 지식이고, 명예이지 생명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생명이 더 귀합니까?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훨씬 더 귀합니다. 생명과 바꾸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사람이 이득입니다. 생명만큼 귀하면 바꾸지 않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해야 바꿉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과 비교가 안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나 ‘진주장사의 비유’를 보세요. 가장 귀중한 하나를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이것들을 삽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 살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희생할 만한  가치가 하나만을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명과 바꾼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자였고,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야고보가 첫 순교자였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무수한 순교자가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꾸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세요. 승리의 장면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을 보는 승리자입니다. 스데반뿐만 아니라 순교자 모두가 승리자입니다. 
  
생명을 누가 주었습니까?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17:25에는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창조하시고 공급하셨는데 그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현대과학은 생명까지 복제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양의 복제 성공률은 3-5%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양 복제 성공률로 봐서 인간 복제의 성공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합니다. 만일에 성공한다고 해도 기형아, 정신장애아 등 심각한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양 복제의 성공률을 근거로 계산할 때 복제 인간 한 명이 탄생하려면 일천 번의 임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중 9백99번은 유산, 조산, 사산, 기형아 등이 되어 탄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에는 복제 이야기가 쑥 들어갔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아무리 보조 장치로 연장한다고 하더라도 채 100년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이란 시간에 비해보면 50년이든 100년이든 모두가 일순간이고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과 무시간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영원히 사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귀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을 바꾼 용기는 지혜와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 용기, 이 지혜, 이 믿음을 소유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환난 가운데 얻는 나라입니다. 

사도행전 20:23에는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합니다. 바울이 무엇 때문에 결박과 환난을 당해야 합니까? 25절을 보세요.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만 아니면 결박이나 환난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경력으로 봐서 권세를 누리고, 지위를 가지고, 학문을 자랑하고, 가문의 영광을 누리며 살 바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으로 꽉 찬 나라입니다. 왠지 아세요? 생명을 버려야 얻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생명이 꽉 차 있습니다. 생명을 버리는 고통, 생명을 위협 당하는 환난, 생명을 빼앗으려는 핍박, 이것이 없이는 못 얻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생명을 낳는 일, 생명을 버리는 일은 다 극한의 고통입니다. 
  
바울은 ‘성령에 매여’라고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토 프뉴마티’인데 ‘by the spirit’라고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성령에 매여”라는 말입니다. 또한 ‘in the spirit’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성경처럼 “심령에 매임을 받아”라는 끗입니다. 바울을 어쨌든 심한 마음의 고통을 표현합니다. 투옥과 극심한 환난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고통과 환난 가운데서 얻어지는 법입니다. 
  
사도행전 21:10-14에는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합니다. 바울의 결박을 미리 안 것입니다. 그 때 성도들은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바울은 왜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하면서 결박이 아니라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가지 말라고 하여도 바울이 함을 받지 아니함으로 성도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면 결박과 환난을 당할 이유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가 병든 장면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유대로 가시려고 합니다. 그 때 도마가 나서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예수님도 환난을 당하시지만 오신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한 사명을 죽음도 막지 못했습니다. 수시로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고, 어떻게 하시는가 항상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롯이 야고보를 참수한 후에 교회에 대한 환난 때문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흩어졌다고 교회가 망했습니까? 교회는 더 흥왕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시는 하나님 방법이 환난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6-7에는 참 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받는 환난은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안식과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바꿔주십니다. 
  
가치 있는 것은 고통과 환난 가운데 얻어집니다. 에덴동산에서 실패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벌을 주십니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주시고, 남자에게는 생산의 고통을 주십니다. 해산하는 고통 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납니다. 땀을 흘리는 생산의 고통을 통하여 소산을 먹습니다. 고통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생명이 가치 있게 하시고, 소산이 가치 있게 하십니다. 
  
위대한 문화, 예술, 업적은 고통과 장애를 극복한 힘겨운 분투에서 탄생합니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곱사등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유명한 웅변가 데무스테네스는 원래 말더듬이였습니다. 그의 첫 공식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야유했습니다. 고대의 서정시인 호머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악성이라고 하는 음악가 베토벤은 청각장애인이 되었을 때 불후의 명작을 작곡하였습니다. 성경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받는 환난은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안드레 지드는 “마귀의 도움이 없이는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술도 그러한데 하물며 신앙의 세계에서 환난은 위대한 신앙의 열매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환난 가운데서도 이런 신앙을 지키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생명조차 귀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0:24에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바울에게는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자신의 사명인 복음을 증언하는 것은 생명을 바쳐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주를 위한 충성의 결과가 결박과 환난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의 바울의 태도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이 아닙니다. 자신의 수고에 대하여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불평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당한 감사와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목사님의 ‘일사각오’를 아시지요? 복음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삽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일제의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나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초개란 풀과 겨자를 말합니다. 풀이 얼마나 잘 탑니까? 금방 타서 사라지는 풀처럼 생명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금방 타서 없어지는 풀같이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릴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살도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과 자결은 다르게 사용됩니다. 자신을 위하여 죽으면 자살이라고 합니다. 국가나 정의나 대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 자결이라고 합니다. 신앙을 위하여 나 스스로가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하여 죽습니다. 이것을 순교라고 합니다. 
  
전통적인 자살의 나라라고 하면 일본입니다. 옛날 사무라이는 긴 칼로 배를 가르는 활복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사무라이가 아들과 함께 시장을 갔습니다. 떡집 앞을 지나가는데 떡집 주인이 사무라이의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고 합니다. 사무라이는 아들에게 떡을 훔쳐 먹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훔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인은 계속 아들이 훔쳐 먹었다고 하자 사무라이는 칼로 아들의 배를 갈라서 아들의 뱃속을 보여주었습니다. 뱃속에 떡이 없자 사무라이는 떡집 주인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런 유의 사무라이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프랑스도 자살을 잘 하는 나라입니다. 프랑스의 존경받던 정치인인 베레고부아는 노동자 출신으로 장관과 총리를 지난 존경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우리 돈으로 1억5천만 원을 빌렸다가 갚았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스캔들로 법정에 섰습니다.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는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했습니다. 자기 결백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신의 명예나 인격이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하면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예나 인격 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전 인류 역사에 온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억울한 사람이 있습니까? 바울만큼 인정 못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욕적인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옥에 갇히고, 매 맞고, 죽을 뻔하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고, 3번 태장으로 맞고, 1번 돌로 맞고, 3번 파선하고, 1주야를 깊은 바다에 있었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과, 수고하고 애쓰고,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합니다. 이런 얼울하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바울은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얼마든지 다 바칠 수 있지만 생명을 스스로 버려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큼 당하지 안 했거든 절대로 억울하단 말하지 마세요. 바울만큼 당하지 안했거든 내세우지 마세요. 
  
토마스 머튼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뿐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우리의 생명도 버릴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5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을 잃어야 얻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을 잃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잃어서 얻었습니다. 많은 얻은 사람들이 지금도 죽어서도 그 이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숨어 있던 제자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빌라도에게 가서 반역죄로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살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베드로와 요한을 보세요. 사도행전 4:19에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과감하게 유대 관원들에게 말합니다. 생명을 건 복음전파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과 바꿀만한 가치 있다는 것을 알면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결론 

사도들은 자신들을 복음의 증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증인’이란 말의 헬라어는 ‘마르투레스’입니다. 이 말은 순교자라는 말도 됩니다. 말씀의 증인이 되는 것은 순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생명을 거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한 결 같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복음을 생명과 바꾸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안드레는 스코틀랜드에서 X자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스페인에 가서 전도하다가 참수를 당하여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빌립은 러시아 남부 스키티아에서 전도하였고 히에라폴리스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도마는 인도에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마태는 카스피해 아래에서 전도하였고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시리아에서 전도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다대오는 시리아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전도하다가 시리아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시몬은 터키와 북 아프리카와 아르메니아와 영국 런던 등을 두루 다니며 전도하다가 페르시아에서 톱으로 켜서 순교하였습니다. 가룟유다 대신 뽑힌 사도 맛디아는 대신 뽑히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뽑혀서 아르메니아에서 전도하였고 이디오피아에서 두 눈을 뽑히고 순교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오로지 요한만이 에베소에 가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살며 마지막 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다가 자연사하였습니다. 조지 폭스의 ‘순교자 열전’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해 죽은 사람들은 결코 우울함 속에서 순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쁘게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의 복음에 대한 그 열정을 가집시다. 생명을 바치면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줄 알고,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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