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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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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14~18)
  

지난 목요일 낮에 대전에서 대전충남지역 연합집회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전도사님이 따라나와 말을 걸었습니다. <목사님, 그 동안 극동방송에서 성경 강해를 들었는데, 늘 목소리로만 들어서 꼭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부산 극동방송에서 녹음한 성경강해를 포항과 대전 등에서도 내보내고 있어서 그 분도 들으신 것 같습니다. 

<목소리만 들었는데,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은 우리 모두가 해본 생각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내년 1월 10일부터 신년맞이 부흥사경회가 열립니다. <원 플러스 원 집회>입니다. 두 분의 목사님이 강사로 오십니다. 새벽에 말씀을 전하실 임석웅 목사님은 종종 만나는 분입니다. 그런데 저녁에 말씀을 전할 정 목사님은 저도 한 번도 직접 뵌 적이 없습니다. 방송에서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직접 뵙게 될 것입니다. 저는 강사님이 먼 데서 오시면 교우들을 대표해서 공항에 마중을 나갑니다. 말씀으로만 접하던 분을 직접 만나게 되는 순간입니다.

누군가를 목소리로만 만나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만으로 접하다가 직접 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늘 말씀으로만 접하던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한 번도 하나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어떤 내용을 말씀하기 전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란 구절이 붙거나, 말씀한 후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란 구절이 붙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이며,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궁금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모습을 가지셨을까? 직접 뵙는다면 그 분은 어떤 분일까?>를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상상해서 만들어 보기도 했고, 그림으로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을 금송아지의 모양으로 만든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갔는데,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백성은 불안해졌습니다. 그 때 백성들은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하나님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론과 백성들은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 모양을 만들고는 <이게 하나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이 상상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어찌 금송아지가 하나님이겠습니까? 

어쨌든 이처럼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늘 궁금한 분이었습니다. 늘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분이 오신 것입니다. 늘 말씀만 하시던 그 분이 실제로 오신 것입니다. 이건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 높은 하늘 보좌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오실 때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너무 황홀하고 위대한 분이어서 사람의 눈으로는 감히 그 분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정한 인간이 거룩한 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존재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아무리 바라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으시려고,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오늘 본문 14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 육신으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마리아라는 여성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탄생하신 아기는 바로 하나님 그 분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고 사람의 몸으로 오셨는데, 거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 문제란 <사람들이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라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분을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대적하기도 했습니다. 모욕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그 분에게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눈이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그 분에게서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본문 14절 중간을 보십시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니>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날 때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유심히 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가까이 하고 싶은 매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혐오감이 생기고 가까이 있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이 때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면 <보는 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을 오해하여 <나쁜 사람>으로 여긴다면 <보는 눈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14절을 계속 보십시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할렐루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즉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분을 가만히 보니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남루한 의복을 걸치고,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너무도 평범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만히 보니 그 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당시에도 다양한 영광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로마 황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자주색 가운과 머리의 면류관은 이 세상 최고의 권력자, 대 제국 로마 황제의 영광을 상징했습니다. 그 황제의 영광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 영광은 감히 대항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영광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것은 <폭력과 지배>였습니다. 황제는 수많은 나라를 점령했습니다. 수 천, 수 만 명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수백 만 명을 노예로 부렸습니다. 사람들은 황제의 영광에서 폭력적 독재자를 보았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헤롯왕의 영광도 보았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에게 일정한 땅을 받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헤롯의 영광에서 교만함과 비굴을 보았습니다. 헤롯은 유다 백성들 앞에서는 교만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 앞에서는 비굴했습니다. 이런 영광을 바라보는 것은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 영광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성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여호와께 영광>이라고 새겨진 관을 머리에 쓰고, 에봇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영광에서 보여지는 것은 <억압과 무시>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율법도 지키지 못하는 무식한 민중이라고 백성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로 인해 성전은 너무도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백성들은 하나님께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한 아기가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습니다. 그 분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눈이 열린 사람들은 그 분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로마 황제의 영광이나, 헤롯왕의 영광이나, 대제사장의 영광이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보여주신 영광은 당시 최고의 인물로 추앙되던 세례 요한도 감히 바라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하실 무렵 세례 요한은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요한 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신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까지도 요한을 메시아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말씀에 보면 요한은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15절을 보세요.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한은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내 뒤에 오시는 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나 보다 앞섰고, 나 보다 먼저 계시다>고 했는데, 이것은 요한 자신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어지기 전에, 영원 전부터 그 분은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요한이 대단하다고 해도 어떻게 예수님의 영광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알아보는 눈이 열린 사람들은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 분은 삼 년 가까이 따라다닌 후에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후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길 원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위대한 인물을 믿는 게 아닙니다. 한 위대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의 도리를 먼저 깨달은 분으로부터 인생관을 전수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위대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다시 14절을 보세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여기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를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당시 눈이 열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우리 선배들은 어떤 위대한 사람이나 의리있는 친구나 동료와 함께 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위대한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본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시 통치자들처럼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굴복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오히려 사랑하셨습니다. 오라고 하는 대신에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그 분의 바라보는 눈길 속에 부드러움과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눈길은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분에게 나오려고 애를 썼습니다. 삭개오는 그 분의 눈길을 한 번만 받기를 원해 나무 위로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그 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길 소원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그 분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리면서 기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몸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셨고, 지금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써클에 가입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선배들이 맛본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엊그제 신문에 노벨상 만찬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매년 12월 10일 알프레드 노벨의 서거일에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데, 시상식 후에 스톡홀름 시청에서 만찬이 열린다고 합니다. 그 식탁에 초대받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참석자 1,250명중 3분의 2가 세계적인 학자들입니다. 학계에 기여한 공로가 없으면 제아무리 재벌이라도, 왕족이라도 티켓을 구할 수 없습니다.거기 한 번 앉아 보는 것은 일생일대의 영광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그 자격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 중에는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노벨상 만찬에는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서클에는 반드시 가입해야 합니다. 천국의 만찬에는 반드시 초대받아야 합니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세상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늘의 사람이 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동시에 천국 시민이 됩니다. 아무개 씨의 아들과 딸인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더구나 그 분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우선 그 분 안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란 거저 주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오래 전에 늦게 귀가하던 한 고등학생이 서울 화곡동 근처에서 뺑소니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지나던 행인이 학생을 데리고 근처 병원에 갔지만 보호자도 아니고, 돈도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몇 군데 병원을 다니는 동안에 학생은 과다출혈로 죽었습니다. 그 무렵 한 가정에서는 아이의 부모가 아이가 돌아오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댁의 아드님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사망하게 된 경위가 밝혀졌는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 아이를 거절했던 병원이 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버지의 병원에서 거절당해 죽은 것입니다. 

치료받으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교육을 받으려면 등록금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정한 대가를 주고 교환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시장 경제의 원리는 붕괴됩니다. 줄 게 없어서 받지 못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미소가 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 모양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안아주십니다. 홀로 버려졌다는 고독에서 건져줍니다. 삶의 방향을 줍니다. 비전을 줍니다. 열정과 의욕을 줍니다. 힘과 능력과 지혜를 줍니다. 제한된 몸을 가지고 살면서도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게 만듭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원합니다.  

또 그 안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르게 해 줍니다. 부부 관계를 바르게 정립해줍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를 바르게 세워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통치자의 도리가 세워지고, 경제 윤리가 바로 세워지고, 사회 질서가 바르게 세워집니다. 그 안에서 왜곡된 모든 것이 바로 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 분이 오셨습니다.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 안에 있는 놀라운 은혜와 진리가 우리의 것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손잡고 세상을 걸어가는 행복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이번 성탄절에 이 놀라운 은총이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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