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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첫 번 성탄 (눅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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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 성탄 (눅 2:8~20)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4주간을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런 행사가 생긴 이유는 성경에 예수님의 탄생을 몇 종류의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주셨는데 요셉, 마리아, 목동, 동방박사 이런 사람들이 미리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념하여서 우리도 미리 알고 탄생하시는 주님을 뜻있게 맞이하자는 뜻에서 교회가 정한 교회 달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최초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양치는 목동들이었음이 조명되어 있습니다. 

먼저 목동들의 삶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평가해 볼 필요가 있는데 우리 한반도는 기후 조건이나 자연 조건이 유목민이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5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유목민 역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있어야 아주 소수입니다. 한반도는 전체가 다 목장이라서 양떼나 소떼를 이리 저리 몰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를 가나 풀밭이 있고 어디를 가나 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목장이고 누구나 다 목동입니다. 지금의 농사는 기계화되었기 때문에 소가 일하지 않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의 농가는 집집마다 소를 길러야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농가는 어느 집이나 소, 돼지, 개, 닭….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누구든지 사육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소떼를 몰고 다니는 광경도 못 봤고 양떼를 몰고 다니는 광경도 없습니다. 있다면 한 곳에 울타리를 치고 그곳에서만 방목하는 정도의 목장이 있을 뿐입니다. 

가까운 몽골만 가 봐도 온 나라에 유목민이 양떼를 몰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흔하게 발견하게 되고, 아프리카도 여러 나라에서 그런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호주나 미국 같은 나라는 끝없는 소떼를 카우보이들이 몰고 다니는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유대 나라 목동들은 불쌍한 목동들입니다.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직업이 너무나 고달프고 어쩔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서 사회인 중에서도 제일 하층 계급의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들은 정착을 못하기 때문에 계획된 생활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때그때 필요를 간간히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제일 심각한 것은 자녀들의 교육 문제입니다. 1년 내내 이동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주택도 없이 텐트 하나 가지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고 살고 있기 때문에 위생시설도 전혀 안되어 있습니다. 

편안히 잠을 자고 편안히 먹는 입장도 아닙니다. 부엌이 없는데 어디서 무엇을 만듭니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간단히 구워먹는 정도의 식생활을 해결하고 의복은 말할 수 없이 남루하고 제가 볼 때 머리는 일 년에 한번이나 감는지 마는지 무슨 거지 떼 같이 시커멓게 지내면서 세수는 일 년에 한번 하는지…. 이런 정도로 불쌍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는 짐승들이 나타나서 양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양은 방어무기가 없는 짐승입니다. 잡아먹기 제일 좋습니다. 도망도 못가는 짐승이 양입니다. 잡아먹히면 그대로 잡아먹히며 가만히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양 도둑놈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오늘 8절 말씀에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라고 했는데 밤잠도 못자고 지켜야 됩니다. 낮에도 못자고 밤에도 못자고 사람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난스러운 생활을 합니다. 

최하의 말단 계급 사람들이 갖는 직업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숫자가 꽤 많은 편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직업이 이렇다 보니까 인격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법적증인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살았습니다. 항상 떠돌이 생활을 하니까 말을 듣고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니까 “저 사람들은 증인으로 못 세운다.” 취급도 안합니다. 

그러면 왜 천사들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이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준 것인가?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성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낮고 천한 사람들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목자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세상이 모두 잠들어있는 시간에, 목자들만 깨어있는 시간에 천사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당시 절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절대 권력자 헤롯이 궁중에 살았고 절대 권위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살았고, 더군다나 세계 최고의 물리적 힘을 가지고 있는 로마가 정복자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면 효과 면에서는 더 기대할 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8킬로미터 산 너머에 있는 버려진 땅 베들레헴에는 아무 실력자도 없습니다. 이 지역은 지금까지도 버려진 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정부는 베들레헴을 팔레스타인 정부에 오래 전에 내어준 상태입니다. “여기는 너희가 갖던지 말든지….” 그래서 제가 베들레헴에 갔을 때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찾아보니까 없어서 길가에 무슨 건물에 들어가서 볼일을 좀 보자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군인 한 사람이 당황하면서 총을 빼들면서 우리에게 막 뭐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아랍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영어로 대답했더니 그 사람이 또 못 알아듣는 겁니다. 

그래서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통역하는 안내자가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하고 급하게 뛰어왔습니다. “너희들 도대체 여기 왜 들어왔느냐?” 이렇게 묻는 겁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오줌이 마려워서 들어왔다.” 그 사람이 혀를 차면서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런 일을 하러 들어왔느냐?” “어딥니까?” “아랍파트 정부의 베들레헴 본부이다.” 허름합니다. 그래서 보니까 아랍파트 사진도 걸려있고 팔레스타인 정부의 깃발도 걸려있는데 그런 곳을 모르고 우리가 들어가려고 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안내자가 얘기를 잘 해줘서 간신이 볼 일을 보고 나왔습니다. 막 퉁명스럽게 “다시는 오지 마시오.” “오라고 해도 안 옵니다.”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 때문에 지금 관광지가 되어서 지금 어느 정도 발전했습니다. 2천 년 전 베들레헴은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다만 거기가 이름 있는 다윗의 고향이기 때문에 목동들이 거처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곳을 탄생 장소로 정하시고 그곳 사람들에게 소식을 먼저 전하시는 것으로 탄생하신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소개하실 때 마태복음 11장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하는 일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듣지 못하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어떻게 보면 장애인들만 모인 것 같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물었잖아요?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거 죄 값인데 부모의 죄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 그 의식은 일단 저주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장애인들은 저주의 대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유대 사회입니다. 예수님은 “둘 다 아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이다.” 이렇게 답변을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주변에는 인간으로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음이 탄생 때부터 나타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을 가리켜 뭐라고 그럽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구원 특성은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 로마 황제의 아들이나 헤롯 대왕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합시다. 

누가 그에게 갈 수 있겠습니까? 그 나라의 최고 실력자들만 그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만약 당대 최고 재벌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누가 친구가 되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친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세상에서도 사람이 너무 세련되어 보이면 다른 사람이 접근을 못합니다. 다가갈 수 있는 틈이 없어 보이니까 아예 포기합니다. 또, 말도 서로 편안하게 해야 친구가 되지 너무 야무지게 말한다든지 너무 권위를 주어서 말한다든지 하면 친구가 안 됩니다. “안녕하세요?” 그러면 “반갑습니다.” 그래야 대화가 되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예!” 이런다든지 그러면 대화가 안 됩니다. 

요즘은 주택 문화가 너무 화려해 졌습니다. 고급 주택에 가면 화장실인지 미술관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해놨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들어가면 화장이 잘 안됩니다. 업무가 잘 안되고 너무 조심스러워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부터 누구나 편안히 다가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사역하신 특성은 낮고 천한 자리를 먼저 찾아주신 것이 아주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어느 나라나 길 이름을 위대했던 지도자 이름으로 붙이는 것이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간 길을 우리도 가자는 뜻입니다. 충무로는 충무공이 가셨던 길을 가라는 뜻이고 퇴계로는 퇴계 선생이 가셨던 길을 가셨던 가라는 뜻이고 원효로는 원효의 정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지은 겁니다. 링컨 블르바드는 링컨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가고 조지 워싱턴 브리지는 워싱턴의 정신을 기억하면서 이 다리를 건너가라고 그렇게 지은 겁니다. 

크리스마스!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리라는 뜻으로 해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고 비아돌로로사 언덕길을 오르신 것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처음부터 누구나 다가올 수 있는 낮은 자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동양 사람으로 오셔서 모습이 서양인인지라 동서양 누구도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고 만왕의 왕이지만 서민으로 오셨지만 왕족이나 서민이나 구별 없이 갈 수 있고 온 세상을 소유하신 부유하신 주님이시지만 가난한 자로 오셨기 때문에 부자도, 가난한 자도 누구도 갈 수 있고 남자로 오셨지만 여인들과 사역하셨기 때문에 남자, 여자 구별이 없고, 하나님이지만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도 인간도 다 환영하고, 높은 자리에 계셨으나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기 때문에 높은 자도, 낮은 자도 부담이 없이 다 올 수 있습니다. 

“내게로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할 것이요 마지막 날에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올 수 있지 않느냐?” 이제 목동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첫 번 크리스마스 행사를 위해서 예수님께 달려갔다고 오늘 15절에서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목자들이 서로 말하되 베들레헴으로 서로 가자. 천사가 우리에게 일러준 대로 아기께 경배하러 가자.” 그러면서 목동들이 최초의 성탄 축하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주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취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 소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혜의 문이 열렸습니다. 구원의 보편성! 확실한 예측이 하나 있을 수가 있죠? 최고의 권력자들이나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이 소식이 먼저 갔다면 유대인의 문화가 천연 문화입니다. 절대 하층 계급 사람들에게는 그 혜택을 주지 않는 문화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유대인들에게 주신 것은 나눠주라는 뜻인데 안 나눠주지요? 남에게 안줍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리는 전문 성직자들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보세요. 예배드리는 문제도 이방인의 뜰이라는 것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제사 드리는 데 “너희들은 들어오지 마라.” 제사장들이 칼을 차고 이방인을 색출해서 “이방의 뜰, 저 바깥에 가서 예배를 드리던지 말든지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못 들어오게 합니다. 목자들이 먼저 예수님을 보고 경배 드렸기 때문에 누구도 차별받지 못하고 다가올 수 있지 만약 권세자들에게 갔다면 그들만이 권위에서 나오는 혜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목자들과 같이 첫 번 성탄을 축하한 사람들이 성경에 동방박사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비유대인입니다. 완전 이방인으로서 절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유대 나라는 너무나 많은 외부의 침략을 당한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앗시리아 제국이 번성할 때는 앗시리아 제국의 식민지였고, 바벨론 번성기에는 바벨론의 식민지, 이집트가 점령하고, 터키가 지배했고, 로마, 영국, 나폴레옹, 알렉산더 할 것 없이 역사 무대에 일어섰던 사람들이 안 거쳐 적이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페르시아 사람입니다. 

페르시아가 또 이 나라를 지배한 것이 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페르시아인들은 원수요 마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시면 예수님 탄생하신 자리에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사람들은 구약시대에서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 땅을 얼마나 침략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군대의 특성! 점령하는 지역에 다 불을 질러 버립니다. 항상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어 버리면서 침략하는 게 페르시아 군대의 전법입니다. 바로 아기 예수 탄생한 그 건물 앞에 왔을 때 유대 청년들이 막았습니다. 

“여보시오! 이 건물은 옛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때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먼 길을 찾아서 바로 예배드린, 예수님께 경배 드린 건물인데 불 지르겠소?” 그래서 군대가 에워싸고 그 건물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그 건물은 불에 안 탄 겁니다. 그 당시 최고 지성인으로 존경받던 미쉘 트루니에는 그의 저서 “동방박사와 헤롯 대왕”이라는 책에서 여기서 나온 동방박사라고 하는 사람은 사실 페르시아 부족들의 왕이었다고 발표를 해서 세계 기독교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왕을 왜 숨겼는가? 자신들이 경배하러 가는 아기 예수가 왕이시기 때문에 자기들의 신분을 낮추어서 왕이라고 표현할 수 없어 그냥 박사들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페르시아의 역사를 연구해서 그 동방박사들의 이름을 밝혀내는데 성공을 하고 그 사람들이 누구였느냐? 그 나라의 부족들 왕이었다는 겁니다. ‘가스파르, 멜쉬오르, 발타자르, 타오르’라는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분명한 것은 페르시아의 왕이든 박사이든 그들이 자기들 나라로부터 베들레헴 나라로 와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했는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하셨는가?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주의가 탄생 때부터 나타난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주가 아니라는 것을 만국에 선포하기 위해서 동방박사들이 페르시아로부터 아기 예수께 첫 번째 경배자로 왔던 것입니다.

또 다른 사건이 나타납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자마자 유대 나라에서는 헤롯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애굽은 아기 예수를 살려주는 장소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건들이 복음서의 구원의 보편주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탄생 때부터 구원의 보편주의를 선언하시며 마지막에는 땅 끝까지 이르러 이 복음을 전하라 만국 복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탄생 때부터 나타납니다. 그래서 지금 온 세상에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이 유대인만을 위한 소식이 절대 아님을 탄생 때부터 선포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크리스마스는 그래서 인류의 축제요 지구촌 행사가 되었습니다. 싫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크리스마스트리는 교회보다도 호텔이나 백화점 이런 곳은 더 화려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는 참 주변이 아름답잖아요? 또 이 앞의 정원 나무도 아름답게 소나무, 상록수가 잘 키워져 있어서 ‘이것을 잘 꾸미면 정말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겠다.’ 언제부터 생각했습니다. “금년에 한번 우리가 그렇게 꾸미자.” 그런데 우리들 손으로 하면 잘못될 수가 있으니까 전문 업체에 한번 맡겨서 금년에는 아름다운 성탄 트리를 만들어보자고 계획해서 알아봤습니다. 

전문업체가 와서 조사를 해보더니만 돈을 얼마를 달라느냐? 5천만 원을 달라고 합니다. ‘그거 가지면 교회 5개를 짓겠다.’ 제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만 두고 150만원어치 재료를 사다가 우리 직원들이 안과 밖에 이렇게 소박하게 만들었습니다. 백화점, 호텔들은 한 달 동안 전기비만 들여도 몇 억이 나오는 그런 성탄 트리를 다 밝히고 있는데 저는 괜찮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하라고요. 크리스마스 불을 밝히지 못하는 나라가 불행한 나라입니다. 

예수의 복음은 만국 선언입니다. 어디에서나 크리스마스 불빛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보편주의가 탄생 때부터 이루어지는 하나의 선물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 대접에서 밀려난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인격 대우를 받아서 최초로 크리스마스 축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이 보편주의는 그의 사역에서 더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누구든지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질병의 무거운 짐 진 자여. 내게로 오라.” 그래서 환자 치유 사역을 예수님이 그렇게 많이 하신 것입니다. 

“걱정 근심의 무거운 짐 진 자여. 내게로 오라.”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평안을 주셨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무거운 짐 진 자여 내게로 오라.” 예수님이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죄 짐을 지고 무거워 하는 자여. 내게로 오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흰 눈 같이 되리라. 외로움에 무거운 짐 진 자여 내게로 오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도 다 내게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목자도 오고 왕도 오고 부한 자도 오고 가난한 자도 오라. 남자도 오고 여자도 오고 어른들도 오고 아이들도 오라. 누구든지 오라.” 그래서 온 세상에 미칠 기쁜 소식이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지역 가운데 왜 베들레헴인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거라고 구약에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BC 740년에서 710년까지 유대 나라는 미가 선지자의 활동 시기였습니다. 미가서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나실 것이라고 5장 2절에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유대 땅에 와서 헤롯에게 물었잖아요? 헤롯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메시야가 어디에서 나겠느냐”고 물으니 “나도 모르겠다.” 

제사장, 서기관들을 다 불러서 “이 사람들이 메시야가 났다고 그런다. 어디서 나겠느뇨?” “베들레헴입니다.” “왜 베들레헴이냐?” “베들레헴에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확실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 때부터 부활 때까지 일생의 모든 사역이 구약에 예언되어져 있는 대로 탄생하시고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비록 된 대로 가거니와 아버지가 나에게 정해놓으신 이 길을 가거니와” 그래서 구원의 주님이요 그래서 그의 탄생을 온 세상이 기뻐하는데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더 큰 소식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도 전 세계 기독교 복음이 들어간 나라들은 다 죄수 석방의 순서를 갖습니다. 특사령이라는 것을 통치자가 내려서 갇힌 자를 해방하고 포로를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서 죄는 지었지만 주님의 은혜로 다 풀어줍니다. 이명박 정부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나 복음이 들어간 나라는 다 그렇게 합니다. 지금은 대강절 행사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대강절 행사를 가정마다 재미나게 했습니다. 집안에다 식탁 옆에 꽃 장식을 합니다. 

그리고 네 개 초를 꽂아놓고 매주일 초 하나씩 불을 붙여서 크리스마스 때까지 네 개의 불을 밝히는 겁니다.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겁니다. 가정에서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집안에 구유 하나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좋아할 만한 것을 너희들의 아이디어로 장식하라.” 그러면 아이들이 생각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뭘 좋아할까?’ 구유이니까 어떤 아이들은 밀짚을 깨끗하게 깔기도 하고 “예수님이 오시는데 밀짚을 갖다놓으면 어떡하냐?” 

고급 카펫을 갖다가 깔기도 하고 아이들이 하는 겁니다. “유모차가 필요할 거다.” 유모차를 갖다 놓기도 합니다. 우유병, 맛있는 과자 등 아이들 아이디어로 잔뜩 쌓아놓는 겁니다. 12월 24일 저녁까지 계속합니다. 25일 새벽이 되면 커다란 아기 인형을 준비해서 아기 예수를 갖다 놓고 아빠, 엄마들이 아이들을 깨워서 아기 예수 탄생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대강절입니다. 그때 부르는 찬송이 오늘 성가대가 송영으로 불러준 겁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생활 고달파 메시아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 찬송을 부르면서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이하는 대강절입니다. 

금년 성탄에서는 특별 기도제목이 하나 생겨서 마음이 아프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2009년 성탄절에는 북한 땅에 탄생하소서. 북한 주민들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합니다. 시장 경제가 허락하지 않는 그 땅에서 먹고 살려고 굶주리면서 골목을 다니면서 물품을 하나씩을 구해서 팔면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푼푼히 모은 서민들의 주머니를 이 추운 겨울에 화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휴지 조각을 다 만들어 버렸으니 이 세상에 가장 추악한 정치 제도들을 가지고 민초들을 죽이는 저 북한 땅에 주님이시여! 찾아가 주소서. 거기 탄생하소서.” 

저는 저런 정부는 하루속히 무너져야,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주민들은 몇 사람의 정치 개혁에 수없이 희생당하며 살고 있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기독교 진리와 다른 종교의 절대 차이! 세상의 종교는 내 노력으로 신을 찾아가는 자력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 겁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주님은 마침내 인류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찾아오셨고 한국에 찾아오셨고 우리교회에 찾아오셨고 나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어버렸을 때 예수님이 어떡하셨습니까? 예수님 사역의 특성! 잃어버린 양을 향하여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2009년 성탄절에도 주님은 분명히 나를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셨을 때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영접하는 대강절! 그래서 이런 순서가 있는 겁니다. 모두 주님을 맞이하는 대강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여! 주님은 언제는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자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천국을 향하고 계십니다. 이 대강절 기간 동안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아버지의 귀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북한 땅을 자유하게 하옵소서. 저 불쌍한 형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이 속히 비춰지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성탄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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