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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사람 예수님 (눅 2: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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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사람 예수님 (눅 2:41~52)  
 
 
❚성경에 무지한 성도들

미국의 목사님 한 분이 학교 측의 요청으로 어떤 미션 스쿨인 초등학교를 방문해 성경수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미션 스쿨 아이들이니까 성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알 것이라 생각하고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누가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렸습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몹시 불안한 표정을 하고 교실 안에는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한참을 지나서 어떤 한 아이가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이름은 존스입니다. 

누가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렸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절대 아닙니다.” 목사님은 너무 기가 막혀서 교장 선생님에게 찾아가 이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교장 선생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존스 군은 제가 아는 잘 아는 학생인데 절대 거짓말을 할 아이가 아닙니다. 그 애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 애는 정말 무너뜨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션 스쿨 교장을 맡고 계신 분이 이렇게 성경에 대해 무지하다니 너무 기가 막힌 목사님은 그 학교의 재단 이사장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얼마 후 목사님 앞으로 이런 편지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목사님, 여리고 성벽이 무너졌는데 아무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도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손해 배상 청구서를 보내주시면 수리비용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웃어야 정상입니다. 왜 안 웃으세요? 웃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 기가 막혀 웃어야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기도 해야 하지만 혹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 우리 교회의 현실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어야 정상입니다. 미국뿐만 아닙니다. 영국은 더 기가 막힙니다. 몇 달 전 더럼 대학에서 ‘영국 성경교육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조사 결과 영국의 수많은 장년과 젊은 세대는 성경에 관심이 없거나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응답자 중 특히 10대 20대 청년층은 성경은 케케묵고 촌스러운 사람들만 보는 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영국은 뿌리 깊은 기독교 국가 아닙니까? 그런데 조사 응답자 중 60%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를 묻는 질문에는 62%가 모른다고 답변했습니다. 십계명을 정확히 암송하는 이는 고작 5% 밖에 안 되고 16%는 십계명 가운데 단 한 개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응답자 중 절반은 ‘삼손과 들릴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30%는 오병이어 사건, 즉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였다는 얘기도 처음 듣는다고 답했습니다. 응답자 중 한 명은 ‘솔로몬과 골리앗’이 선박 이름이라고 말했고 또 한 사람은 ‘다니엘’이 만화영화 ‘라이언 킹’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라고 어처구니없는 답을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성경에 대해 모르면서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이들이 성경책을 찾는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인의 75%가 집에 성경책을 보유하고 있으며 75%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성경을 찾는다고 합니다. 성경 내용은 모르지만 힘들 때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힘들 때만 필요한 부적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는 미국 사람이나 영국 사람들이 모르는 성경 이야기들을 다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된 분들은 빼고라도 적어도 교회를 몇 년 이상, 혹은 수십 년씩 다닌 분들은 설마 다 아시겠지요? 여리고는 누가 무너뜨렸는지 삼손은 누구도 다니엘은 누구인지 말입니다. 이 정도는 아시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도 성경지식에 대해 무지하기는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젊은이들에게 ‘다니엘’이 누구냐고 하니까 TV에 나오는 미남 혼혈배우 ‘다니엘 헤니’라고 대답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교회의 중직이라도, 성경말씀을 읽지 않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7장 19절에는 왕이 된 자가 지켜야 할 일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생명의 양식입니다(히 4:12). 이 말씀은 광야의 만나와 같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도 위로부터 말씀을 받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만남으로 큰 은혜와 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자 예수님

이런 점에서 우리 예수님은 정말 귀한 습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지난주에는 기도의 습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는데 오늘은 말씀에 대한 습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은 어디서 왔는가? 도대체 어디서 그런 힘과 능력을 받아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셨는가? 지난 시간 기도의 습관에서 그 능력이 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 또 한 가지를 추가합니다. 바로 말씀의 능력에서 그토록 놀라운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늘 기도에 힘쓰고 늘 말씀과 함께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시험을 당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제일 먼저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지난주에도 이런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할 일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힘든 일이 닥쳐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만사 제쳐놓고 기도부터 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야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고요. 예수님도 공생애 3년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가장 먼저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금식기도, 즉 모든 음식을 끊고 생명을 걸고 간절한 기도를 하심으로 공생애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우리 주님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마귀가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하는데 맨 첫 번째 시험이 무엇이었습니까? 이건 다 아시지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지금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셔서 극도로 배고프고 지친 상태입니다. 지금 가장 절박한 것은 떡입니다. 정말 돌로 빵이라도 만들어 먹고 싶은 심정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유혹에 대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무슨 뜻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이 절박한 시기에, 너무도 배가 고파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분별력과 자제력 다 없어질 상황인데도 성경 말씀을 인용해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아주 잘 암송하고 이해해서 필요할 때, 가장 적절할 때 말씀을 인용해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열심히 읽고 암송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은 평상시에도 힘이 되지만 특별히 힘들 때, 시험 당할 때, 급박한 일이 닥칠 때 정말 힘과 능력이 됩니다. 갑자기 큰 일이 닥쳤는데 성경 찾아서 “이런 상황에 해당되는 말씀이 창세기에 나오던가? 마태복음에 나오던가?” 하고 찾으시겠습니까? 못 하지요. 그러니까 꼭 필요한 말씀들이나 중요한 요절들을 암송하고 있으면 정말 적절할 때, 그 말씀이 가장 필요할 때 말씀을 인용해 시험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말씀을 사랑하고 평상시 열심히 읽고 암송해 가장 강력한 영적 무기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말씀합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먹는 것으로만 산다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짐승과 달리 육신의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음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육신의 밥만 먹고 영적 음식인 말씀을 게을리 한다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곧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고 맙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영적으로 능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다가 심하면 영적 사망상태에 이르고 맙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람은, 특별히 영적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야 말로 말씀을 정말 사랑하고 말씀에 정통한 전문가였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권위 있는 새 교훈이 나올 수 있고(막 1:27) 거기서부터 모든 기적과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권세가 나온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영적 권세와 능력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예수님처럼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잘 배우고 연구하고, 성경을 암송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보 첫 면 교회라는 큰 타이틀 아래 보면 “말씀 위에 든든히 선 건강한 교회” 해놓고 그 밑에 세 가지가 쓰여 있는 것입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첫째, 우리교회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둘째, 우리교회는 말씀을 잘 가르칩니다. 셋째, 우리교회는 늘 말씀대로 삽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교회 틀림없이 좋은 교회, 능력 있는 교회 됩니다. 이렇게만 살면 우리 교회 성도들 모두가 틀림없이 능력 있는 성도, 권세 있는 성도 될 줄로 믿습니다.

❚어려서부터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때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유월절이 되면 그들이 살던 동네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예루살렘에서 지키기 위해 그 먼 길을 올라온 것이지요. 그만큼 예수님의 부모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부모의 손에 이끌리어 이 유월절 성지순례에 처음 동참하게 됩니다. 42절에도 나온 것처럼 당시 이스라엘의 관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열세 살이 되면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했기에 아직 열세 살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부모는 어린 예수님을 데리고 먼 길을 걸어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에서 작은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이 함께 왔는지 안 왔는지도 모르고 자기네들끼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참 무심한 부모들이지요?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저들끼리 가다니 정말 무책임하지요? 하지만 충분히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시 이런 순례는 자기 동네와 인근 동네의 친척과 아는 이들이 다 함께 동행했기 때문에 동행자의 숫자가 꽤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알아서 따라오겠지 하고 자기네들끼리 간 모양입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하룻길을 가다가 아들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거리가 120km기 때문에 걸어서 2~3일 이상은 걸립니다. 그러니 한참 가다가 발견한 것입니다. 부모는 깜짝 놀라 다시 하룻길을 되돌아와 성전에 가서 찾는데 꼬박 사흘 만에 아들을 성전에서 찾게 됩니다. 저 같으면 막 야단 치고 때렸을지도 몰라요. 왜 그것도 못 따라 오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매는커녕 요셉과 마리아 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집니다. 열두 살 밖에 안 된 아들 예수가 성전에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열두 살이면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부모 잃어버렸다고 나만 두고 갔다고 울고불고 할 아이가 놀랍게도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생’이란 율법학자를 뜻합니다. 율법에 정통한 그야말로 최고 전문가들입니다. 심지어 어떤 영어성경에서는 doctor, 즉 율법 박사라고까지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겨우 열두 살 된 아이가 율법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 박사님들은 그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지혜로운 대답에 깜짝깜짝 놀랍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하고 말입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신학박사님들이 열두 살 된 초등학생과 토론을 하다가 그 해박한 성경과 신학지식에 혀를 내두르는 격입니다. 예수님이 이 정도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까지 하는 탁월한 성경 실력을 갖춘 분이었던 겁니다. 물론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어려서부터 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의 신앙교육과 말씀교육에 가장 큰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반드시 경건과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을 배우는 최대의 교육 장소는 교회학교도 다른 학교도 아닌 바로 가정이요 부모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모도 틀림없이 자녀에게 율법을 가르쳤을 테고 나아가 예수님 자신이 뛰어난 통찰력과 능력으로 이미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거의 말씀 전문가, 성경에 대한 대가(大家) 수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노니...”(딤후 3:15). 어떻게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때문이지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디모데에게 성경을 가르친 것입니다. 게다가 디모데가 워낙 뛰어나서 젊은 나이에 이미 사도 바울도 인정할 만큼 성경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딤전 4:12)고 걱정할 정도로 젊디젊은 디모데를 그 큰 에베소 교회 담임목사로 파송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말씀에 대한 전문가니 누구도 그 권위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목사를 볼 때 나이보다 말씀의 권위를 먼저 보지 않습니까? 나이는 아들뻘, 손자뻘이지만 그래도 목사라고 존중해 주는 것은 말씀 전문가기 때문이요 말씀에 권위가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디모데도 그랬던 것처럼 어려서부터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은 부모의 책임, 특히 어머니의 책임이 큽니다. 아버지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바깥에 많이 나가 있지만 어머니는 늘 자녀를 품에 안고 기도를 가르치고 말씀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성경이 시험에 나옵니까? 그럴 시간 있으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게 하고 수학문제 하나라도 더 풀게 해야죠”라고 한다면 말씀교육은 불가능합니다. 정말 영원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예수님을 찾은 후 놀라서 “너 어째서 이렇게 했니? 우리가 얼마나 걱정하고 찾았는지 아니?” 하고 물었습니다(48절). 그런데 뜻밖에 이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 뭡니까? “어머니, 어째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49절) 이 말을 듣고도 예수님의 부모는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연하지요.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입니까? 하지만 이 순간 예수님의 부모가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중대한 사실입니다. 이 부모의 무지의 원인은 한 마디로 말씀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낳은 육신의 아들이지만 그의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 탄생에 앞서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도(마 1:18~25) 마리아에게도(눅 1:30~33) 장차 태어날 아기가 누군지 분명히 가르쳐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12년이 지난 지금 그 사실을 기억하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귀를 두 개로 만드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어떤 이들은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니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럴 듯 하지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귀가 두 개라서 한쪽 귀로 열심히 말씀을 듣는데 그만 한쪽 귀로 다 새나가 버립니다. 마치 길 가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치우는 것처럼 말입니다(마 13:4). 그러니 수십 년 교회 다니며 그 주옥같은 설교 들었고 말씀 배웠는데도 기억 못하고 새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두 귀로 말씀을 듣습니다. 남들보다 두 배로 듣겠지요? 그리고는 마음 판에 딱 새겨서 절대 안 잊고 삽니다. 둘 중에 누가 신앙이 자라고 누가 복을 받겠습니까?

예수님의 부모는 비록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들은 12년 전에 들은 약속을 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무지 때문에 그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실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우리가 세상 어떤 지식이나 정보에 정통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잘 알아 말씀의 전문가가 되기 바랍니다. 그래야 말씀의 참된 능력으로 여러분이 승리하게 됩니다. 반드시 잘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바를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시니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을 그대로 믿고 확신하면 하나님이 약속을 지켜주시고 반드시 우리를 잘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배우고 확신한 일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이 말씀에 통달하게 하고, “말씀대로 살면 절대 손해 보지 않고 반드시 잘된다, 하나님이 네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고 확신을 가지고 가르친다면 반드시 신명기 28장에 약속하신 것처럼 우리 자녀와 자녀손이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고(13절),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사람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1절).

❚말씀 위에 든든히 선 건강한 교회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목적이 무엇입니까? “말씀 위에 든든히 선 건강한 교회” 아닙니까? 우리 교회 비전이 바로 이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말씀입니까? 왜 하필 교회가 말씀 위에 서야 합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온 것처럼 같은 집을 지어도 반석 위에 지으면 어떠한 풍파와 시련에도 안 무너지지만 모래 위에 지으면 작은 시험에도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인생을 잘 계획하고 노력해서 멋진 인생을 만들어도 그 인생을 모래 위에 세우면 작은 시험과 유혹에도 반드시 무너지고 맙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세우면 절대 안 무너집니다. 인생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어떤 교회는 잘 나가는 것 같다가도 한 순간에 시험 들고 무너집니다. 왜요? 멋진 교회를 세웠지만 반석 위에 세우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그 반석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반석 위에 인생을 세우고 교회를 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 40장 8절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시들고 마르게 마련입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를, 우리 인생을 이 유일하게 영원한 것, 영원한 반석인 말씀 위에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건물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정도 성도 숫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다 영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야만 바로 섭니다. 오늘 본문 52절 결론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말씀의 사람이 되어 말씀대로 살고 말씀의 능력을 참 의지한다면 우리 인생이 점점 자라고 창대해지며, 우리 가정과 자녀와 사업과 직장이 점점 자라 번성하고, 우리 교회가 점점 자라 하나님에게 참 사랑 받는 교회와 성도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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