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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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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0~58) 
  

오늘은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간 교우들을 추모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유가족들에게 교회를 대표하여 다시금 조의를 표합니다.
같은 자리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서로를 격려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둘러보니 어느덧 그 자리가 비었습니다.
아쉬움과 함께 다시 한 번 휑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우리는 추모예배를 드림으로,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라는 고백처럼 가신 분들을 추모하고,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고 한없이 허전해하는 유가족들을 말씀으로 위로 하고, 이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한다는 신앙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어떤 책에 나오는 목사님의 간증내용입니다.

“칠 년 전 쯤 내가 섬기는 교회에 최공찬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부목사로 청빙한 분인데,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저는 축구를 잘 합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제 이름이 공찬이거든요.’하는 게 아닌가. 그 목사님은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없었다. 손톱에 피부암이 생겨서 잘라냈단다. 본인도 완치 되었다고 믿었는데 재발한 것이었다. 결국은 그 병으로 운명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병원을 몇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병세가 이렇게 진행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면서 설명을 하는데, 꼭 남의 이야기 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나 마음의 동요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운명하시기 바로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내 손을 꼭 잡고 ‘목사님, 감사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주님께 충성할 수 있도록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끝까지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목사님,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말하면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성도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간증입니다.
역사상 그 누구도 죽음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왕도, 지식을 가진 학자도, 돈을 가진 부자도, 모두 죽음 앞에서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무덤 문을 박차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전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1) ‘사람은 부활하는가?’ 2) ‘사람은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가?’ 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대답을 들으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람은 부활하는가?

사람은 부활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로 변증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입증하는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다음 세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3-4절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에 보면 ‘성경대로’라는 말씀이 반복해 나옵니다.

‘성경대로’란 ‘구약의 예언대로’란 말씀입니다.(시16:10-11, 사53:10)

예수님의 부활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구약에서 이미 예언한 내용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상당수의 증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5-8절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상당수의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 자신의 회심에 의해서도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9-10절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누구보다도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헌신적인 복음전도자가 된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유언비어로 여기며, 그것을 유포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혈안이 된 바울이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만큼 더 분명한 예수님의 부활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은 죽음만을 보아 온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부활절기에 친구 목사님들과 함께 택시를 탄 적이 있습니다.
택시 운전 기사분이 ‘예수 부활하셨네.’라는 프랭카드를 보고 한다는 말이, ‘미친놈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나?’라고 일갈했습니다.

손님들이 모두 목사인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 때 친구 목사님이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기사 선생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인데, 죽은 사람 살리는 게 뭐 그리 대수겠어요?”
그렇지요.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훌륭한 가르침을 베푼 스승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분은 세상을 잘 다스린 훌륭한 경세가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세주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려면, 우리의 구세주가 되려면, 우리의 심판을, 우리의 죄를, 우리의 내세를, 우리의 천국을, 우리의 죽음을 해결해 주려면, 덜컥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근래에 사이비 종교들이 많이 출현했습니다.
그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하나같이 ‘나는 구세주이다’ ‘나는 메시아이다’ ‘나는 재림주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지한 백성들은 그 말이 사실인줄 알고 자칭 ‘구세주’를 따랐습니다. 
논밭을 팔아 바쳤습니다. 
교주가 죽었습니다. 
다시 살아나길 기다립니다. 
시체는 점점 썩어져갑니다. 
다시 살아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추종자들은 그런 존재를 구세주라고 따릅디까? 
아니지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지요!
왜냐하면 그는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고 만다면 우리와 다를 바가 어디 있습니까?
죽고 만다면 그 종교는 허망한 것입니다. 
살았을 때 아무리 큰 소리를 쳤다고 할지라도 죽고 말았다면 그 소리는 허무한 것입니다.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열매’라는 말로 우리의 부활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수 있는가?’
부활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란, 이 식물에서는 또 다른 열매가 열릴 것이라는 징표가 아닙니까?
그래서 첫 열매는 반갑고 기쁩니다.
우리는 다 압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그 식물에서는 뒤이어 많은 열매가 열린다는 것을!

저는 채마밭에 오이 씨앗을 심어 본적이 있습니다.
봄철에 오이 씨앗을 심으면 따스한 봄볕을 받고 새싹이 돋습니다.
줄기가 커 가면 나뭇가지로 줄기를 받쳐줍니다.
초여름이 되면 줄기 끝에 노란 오이꽃이 핍니다. 
참 예쁩니다.

오이꽃이 떨어지면, 파랗고 싱그러운 오이가 살을 찌웁니다.
그런 오이를 보노라면 한없이 기쁩니다.
그 첫 열매는 애쓴 보람이기 때문에 기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첫 열매는, 아직 꽃은 피지 않았지만, 아직 다른 열매를 맺히지 않았지만, 오이 넝쿨 가득히 오이가 주렁주렁 열릴 것이라는 징표입니다.
그래서 그 첫 열매를 보노라면 기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합니다.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2. 사람은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42-44절에는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이 있느니라.”

우리가 천국에서 살게 될 때 이 몸 그대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금만 일해도 피곤하고, 쉬이 병들고, 늙는 이런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동물에게 각각의 적절한 몸을 주셨습니다.
공중의 새에게는 날아가기에 적절한 몸을 주셨습니다.
물에 사는 물고기에게는 헤엄치기에 적절한 몸을 주셨습니다.

땅 위의 동물에게는 땅위에서 살아가기에 적절한 몸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에겐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적절한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은 현대 유전학, 생체학에서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묘막측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기에 적절한 새 몸을 주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몸을 ‘신령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몸이 어떤 몸인지 알려면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틀림없이 자기들도 죽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샬롬, 그대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문을 걸어 잠궜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아이고, 예수님의 영인가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만져보아라. 나는 살과 뼈가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도마 같은 제자는 그 못자국과 창 자국에 손을 넣어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여기 뭐 먹을 것 좀 없느냐?”하시며 음식을 같이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문을 걸어 잠궈도 들어오실 수 있었고, 문을 열지 않아도 나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승천하실 때에는 중력의 법칙을 초월하여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의 과학적인 지식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입을 신령한 몸입니다.

롬8:10절에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를 잘 믿다가 돌아가신 분은 그의 육체는 땅에 있으나 그 영혼은 낙원에서 무한한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후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늙지 않고, 죽지 않고, 병들지 않는 영생불멸의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가 살아남아 있다면 우리는 홀연히 변화되어 부활하신 예수님과 똑같은 신령한 몸으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연동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성희목사님이 ‘영으로 걸으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목회자이며 신학자이며 저술가이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많은 저서들을 직접 출판하실 만큼 저서들에 마음을 담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저서는 ‘신약성서개론’입니다. 하루는 나에게 원고를 한 아름 넘겨주시면서 ‘이 책은 네가 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왜 이 책을 제가내야 합니까?’
‘글쎄, 내가 아무래도 그 생각이 든다.’

원고지를 받아들고 첫 장을 넘겼습니다. 첫 장에는 ‘나의 마지막 저작이 될 것 같은 이 책을 내 평생의 충성된 반려자, 내 사랑하는 아내 설귀연님께 드린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의 소명이 끝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 원고지를 내 손에 받은 이틀 후 여느 때처럼 아침 문안을 드리는 전화에,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잘 걷지 못하시고, 자꾸 넘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책이 마지막 책이 될 것을 아셨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소명이 끝난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잘 걷지 못하셨습니다. 마지막 여섯 달 동안은 전혀 걷지 못하셨습니다. 한번은 내가 병실에 갔을 때 아버지는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으셨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십니까?’
‘천사가 와 있다.’
‘몇 분이나 오셨는데요?’

아버지는 한참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시더니 ‘여섯 분이 와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로 아버지는 여섯 번이나 천당에 다녀오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땅의 걸음이 멈추는 날부터 아버지는 하늘 걸음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더불어 하늘 산책을 계속 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영정으로 함께 하신, 먼저 가신 교우들도 주님과 더불어 하늘 산책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행복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죽어도 감사합니다.
살아서는 주님과 이 땅에서 산책할 것이고, 죽어서는 주님과 하늘에서 영원히 산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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