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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눅 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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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눅 7:2~10)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누가7:9)

신앙생활에 믿음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공의로움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공의로움과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 가는 일에 함께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16:14)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막20:27)
  
믿음을 중요시 하는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
  
성경은 예수님이 놀라워 하셨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으로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대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감동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으로 부터 인정받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이런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럼 그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   
  
백부장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구원자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오신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병들어 죽게 된 그의 종을 고쳐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백부장은 그의 종을 살려주실 분으로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불렀습니다. 원어의 ‘주여’라는 말,  ‘퀴리에(Κύριε)’ 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하나님을 칭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칭하면서 그 능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또한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면서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종이 낫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하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원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죤 스토트(John Stott)’ 는 기독교에 대한 세 가지 오해를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신조(creed)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일종의 신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 없이 줄줄 암송할 수 만 있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란 특정 교리에 동의하는 사람을 말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부적절한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에는 교리도 있고, 또 기독교의 신조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조를 고백하며 살지만 신조자체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독교는 근본 적으로 행동규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행동규범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착실한 삶을 사는 한, 당신은 무엇을 믿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십계명을 지키기로, 또는 산상수훈의 기준에 맞추어 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또한 황금률을 따라 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이 모든 것은 훌륭하고 귀중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도덕적 행동이 아닙니다. 기독교에도 윤리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과 함께 이제까지 세상에서 알려진 가장 고상한 윤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옳고 바른 삶을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삶을 삶고 윤리적으로 행동을 하지만 그것자체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의식(cult)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나름대로의 특정한 예식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세례식과 성찬식 같은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셨고 지금까지 교회가 준수해오고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성경읽기와 함께 각종예식이 기독교에서 중요하지만 이것 자체가 기독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고 관계하는 것입니다. 이것 후에 신조와, 행동, 예식과 함께 헌신의 생활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시인함으로 구원의 삶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바로 되어야 기독교인입니다.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이종현’이란 분은 예수를 잘 믿는 장로님이었습니다. 이북 공산당원이 그를 붙잡아 초등학교 교장 훈시대에 세워놓고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어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면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원은 ‘이놈 죽어봐라’ 하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총을 쏠 때에 ‘아버지 하나님,’하고 불렀고, 총소리 후에도 장로님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원은 ‘총알도 튀니 할 수 없다’면서 장로님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공포탄을 쏜 것이었습니다. 공산당원은 생명을 내놓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시인하는 장로님의 절대적인 믿음에 감동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에 있어서 예수님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에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예수님을 부활과 생명의 주님으로 우리로 천국가게 하시는 분으로 믿습니까? 백부장처럼 예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들으시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믿습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믿음이 바로 되어 있는 믿음은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입니다.   
  
  자기 극복의 믿음 
  
백부장은 주인으로서 종을 염려하는 특별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집을 향해 가실 때, 그는 벗들을 보내어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자신은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에 부끄럽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해달라면서, 제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병사와 같이, 또는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종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지배국인 로마군대의 지휘관으로 명령적이고 거만하기 쉬움에도 피지배국의 한 평민인 예수님께 오히려 겸손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명령을 하면 부하들이 행하듯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권한아래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명령을 하시면 모두가 복종할 것이라는 겸손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겸손을 보고 놀라셨고 감격하신 것입니다. 
  
자기극복의 최고 모습은 겸허함에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자기극복을 하지 못한 사람이 교만하여 거만하고 무례한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제자들이 “선생님 어떻게 해야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고 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대답하기를 ‘겸손이니라.’고 했습니다. 겸손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담는 그릇이며, 그 은혜와 축복을 지키는 산성입니다. 백부장의 겸손은 종을 살리는 은혜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백부장의 겸손은 자기극복의 믿음과 그 믿음의 인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의 자기극복의 믿음이 너무 크기에 예수님께서 놀랍게 여기시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극복의 믿음에서 겸손의 극치를 이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사람을 사랑하는 믿음 
  
백부장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희생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임에도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백부장의 요청을 간절한 마음으로 전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에 대하여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존경을 표했습니다. 
  
백부장은 보잘것없는 재산의 한 소유물과 같은 ‘종’을 살리고자 했습니다. 당시 로마법의 견지로서는 종이란 주인의 살아있는 한 도구에 불과 했습니다. 종에게는 어떤 개인의 권리도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마음에 따라 종을 사고팔며,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했습니다. 종이 병들면 내어버리거나 적당한 방법으로 처분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종이 병들자 팔아버리거나 버리지 않고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종을 살리려는 그의 행동은 그의 지위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종을 한 인격체의 고귀한 인간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종을 살리기 위해 무명의 나사렛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보인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이 백부장의 믿음에 예수님은 감동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큰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량 물로 내어주신 그 사랑을 따라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율법의 핵심이하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이 사랑으로 세상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의학계에 ‘마라스머스’라는 이상한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주로 고아로 고아원에서 외롭게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증상은 신체발육이 부진하고 온 몸에 힘이 빠집니다. 환자는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맙니다. 이 병은 영양부족이나 병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사랑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고 어머니의 살내음을 맡아야 할 어린아이가 그것을 전혀 누리지 못할 때에 이 병은 나타납니다. 마음속에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남들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마라스머스와 유사한 병에 걸릴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밝히는 이 병의 치료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매일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매일 사랑을 느기도록 하십시오” 라면서, 이 사랑의 말 한마디가 최상의 묘약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면서 사랑하기 위하여 희생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세상을 건강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는 큰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이 사랑과 희생을 가진 믿음을 보였기에 예수님은 감격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입니다. 우리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거룩하고 위대한 희생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놀랍게 여기시고 감격하시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하십시오. 자기극복의 믿음을 가지십시오. 사람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십시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할 때에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시기를 구했던 아버지처럼 믿음주시기를 구하십시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막9:24)
  
예수님도 놀랍게 여기시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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