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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친구가 된다는 것은 (요 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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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된다는 것은 (요 15:12~17)


[함석헌]선생의<그 한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 만리 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 놓고 갈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너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가 가라앉을 때 /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의“예”보다도 /“아니오”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며 진실로 충언해 주는 /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진실한 친구를 한 사람이라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에<친구>라는 단어를 찾아보면“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런던타임스에서<친구란 무엇이냐>라는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상모집을 했습니다. 이 현상모집에서 3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이렇습니다.“친구란, 기쁨을 더해주고 슬픔을 나누는 자이다.”또 2등으로 당선된 대답은“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친구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설명하려고 그러면 오히려 설명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다 안다는 겁니다. 긴말도 필요 없고,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나는 너를 안다. 네 억울함을 안다. 네 고통을 안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네 진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바로 그가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1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이렇습니다.“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게서 떠나 버릴 때 내게로 와 주는 자이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인[웹]박사는 친구의 정을 지속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는 겁니다. 

첫째는 내가 남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면서 내 먼저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때만이 또 다른 사람도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진실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여간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숨기고 숨기고 또 숨깁니다. 그러면서도 꼭“이건 비밀인데...이 비밀을 꼭 지켜줘”부탁하면서 말하는데 이미 다 말해놓고 무슨 비밀입니까 비밀은...웃깁니다.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비밀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부사이에 비밀이란 알면서도 속아주고 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 가운데 속이면서 살아가기가 가장 힘든 관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친구사이입니다.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또 비밀이 없어야만 친구입니다. 오래된 친구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이 사이만은 완전한 진실이 있습니다. 죽고 못 살던 친구 관계가 하루아침에 멀어진 경우를 생각해보면 틀림없이 거기에는 배신이 있습니다. 

배신이 무엇입니까? 거짓말을 했단 말입니다. 속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친구의 정을 지속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바로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부부는 돌아서면 바로 남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사이는 돌아서도 여전히 친구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법적으로 해지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평등의식입니다. 가만히 보면 주변에 친구가 많은 사람이 있고 친구가 거의 없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친구가 없는 사람 중에 특히 봉건주의적인 행복 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영원히 친구가 없습니다. 언제나 내가 그 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너 보다 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친구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행복 관에 문제가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평등의식을 가져야 친구가 많아집니다. 지위가 높든 낮든, 학벌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건 적건, 심지어는 남녀 어른 상관없습니다. 다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평등의식입니다. 너와 나는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평등의식 속에 친구가 되고, 또 친구를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제자들을 향해서“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먼저는 일단 예수님은 스승이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제잡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을 스승으로 섬기며 따랐고 지금도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을 제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제자들을 부를 때 보통 사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도는 사명을 지워서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보낸 자의 명령을 따라서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사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십자가를 앞에 둔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도 아니요, 사도도 아닌 친구라고 말합니다. 왜 일까요? 무슨 의미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구라고 부르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을 높여 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동시에 예수님 자신은 낮추어서 그들과 수평관계에서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보통 친구관계를 이야기할 때 어떻습니까? 나보다 훨씬 출세도 하고 지위도 높은 친구를 다른 사람에게 내 친구라고 소개할 때 기분 좋습니까? 아니면 어느 모로 보나 나보다 출세하지 못했고 사는 것도 변변찮은 사람을 내 친구라고 소개할 때가 기분 좋습니까? 사람이란 거의 똑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내 친구가 누구냐 하는 것이 곧 내 인격을 말하는 것 같아서 잘 된 친구, 소위 출세했다는 친구를 위주로 소개하고 싶어 합니다. 친구 덕에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심보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통상적인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자기는 높아지고 친구는 낮추는 게 되고 맙니다. 반면에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주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여러 사람 앞에서 소개하면서“이 사람은 내 친구요. 아주 죽마고우요, 좋은 친구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자기는 낮추고 친구는 높이는 것이 됩니다. 멋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허물없는 관계이면서도 참 조심스러운 게 친구관계입니다. 

그러고 보면 친구라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입장에서 친구라고 말할 때 내가 높아지려하느냐 친구를 높이느냐를 생각해야하니 한편으로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옳은 것은 나를 낮추고 친구를 높이는 마음으로 먼저 친구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 예수님이 오늘 제자들을 보고 친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보통 민망한 일이 아니지만 얼마나 현명하신 분입니까? 그러니까 자신을 낮추시고 제자들을 높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을 보고도 예수님이 먼저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낮추시고 우리를 높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13절에“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하시면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친구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한다는 것, 이건 쉬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이런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까? 그만큼 진정한 친구사랑이 어렵다는 얘깁니다. 친구는 내가 선택한 사랑이요. 내가 자발적으로 해야 할 사랑입니다. 그러면서도 묘한 라이벌의식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불쌍한 사람을 사랑 하는 것은 쉽습니다. 나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어려운 것이 친구사랑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사랑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를 낮추고 그를 높여서 동등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올리려면 나는 내려가야 하고, 저를 내리면 얼마든지 내가 올라갈 수 있지만 이건 사랑이 아닌 겁니다. 친구사랑은 이래서 어려운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예수님이 어려운 일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이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이것은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육신적인 목숨이 아니라 영혼까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친구를 위하여 마음과 몸을 다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친구사랑이라는 말에는 엄청난 정신 적인 사랑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6절에 보니까 중요한 말씀을 또 하십니다.“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친구관계가 되는 길은 누군가가 먼저 주도적으로 시작해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누가 나에게 친구 되어 주기만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으면 죽을 때까지 친구를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는 말은 주님께서 주도적으로 택했고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친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잘 보세요. 예수님과 친구 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14절입니다.“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그랬습니다. 무엇을 행하라는 것입니까? 12절로 올라가보면“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내가 나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서 동등한 친구가 되는 것이라 그 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다가서서 복음을 전하고 친구처럼 사랑할 때에 구원받는 무리가 많아질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전도의 원칙입니다. 친구 되는 것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어서 죄인처럼 되시면서 까지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숱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의 친구가 되시기 위하여 욕을 먹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무엇하나 자랑할 만한 것이 없고 무지한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당신의 제자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급기야 그들을 향하여 친구하자고 하십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이 친구 되심과 이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마태복음9: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세무를 보고 있는 세리 마태를 현장에서 부르십니다.“나를 따르라.”이 세리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모든 사람으로부터 멸시만 받아왔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다니 얼마나 감격을 했든지 자기 동료들을 다 불러 가지고 집에서 잔치를 합니다. 예수님도 이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당시 풍속으로는 이건 안 되는 겁니다. 세리의 집에 들어가도 안 되고 세리와 만나도 안 되고 그 집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는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얼마나 세리를 멀리했느냐 하면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가 주는 돈을 안 받았답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집에 가서 잡수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비난을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시고서 곧 이어“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높여 친구를 끌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낮추어 친구를 올려서 동등 되고자 하는 예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방법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 속에서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이런 친구를 가진 자는 절대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친구를 통해서 내가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낮추어서 친구를 높아지게 하는 예수님의 사랑방식을 배우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런 친구가 되었다면 이제 사랑하십시오. 

오늘 말씀 17절을 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이라.”

친구 됨의 목적도, 의미도, 방법도 오직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의 친구 된 여러분, 또한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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