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겸손히 배우라 (마 11:25~30)

  • 잡초 잡초
  • 362
  • 0

첨부 1


겸손히 배우라 (마 11:25~30)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모르는 척 했더래요 //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더래요
   시집 간 날 첫 날 밤에 한없이 울었더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안 그런 척 했더래요//
   갑돌이도 화가 나서 장가를 갔더래요
   장가 간 날 첫 날 밤에 달 보고 울었더래요
   갑돌이 마음은 갑순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고까짓 것 했더래요//

마음으로 사랑을 하면 무얼 합니까!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고, 안 그런 척하고, 고까짓 것 하면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표현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고나서 달 보고 울기 전에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실천하는 법을 배웠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캠페인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선택할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이 있습니다. 자유뿐만 아니라 책임이 있기에 바른 것을 선택하도록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선택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는 첫 번째 주제는 ‘열정으로 살라’였습니다. 열정은 삶의 태도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주제는 ‘온전히 사랑하라’였습니다. 우리의 열정은 온전히 사랑하는데 바쳐져야 합니다. 열정이 태도라면 사랑은 내용입니다.
   
이제, 세 번째 주제는 ‘겸손히 배우라’입니다. 열정으로 가지고 온전히 사랑하며 사는 것을 선택하였다면 거기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먹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겸손히 배워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열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겸손히 배워가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인격으로 빚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계속하여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겸손히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일생을 훈련의 과정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25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그 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을 하실 때,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고 귀신 들린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고라신이라는 마을과 벳새다라는 마을입니다. 그리고 또 한 마을은 가버나움입니다(마 11:20-23). 특히 가버나움에서는 지붕의 기와를 벗겨내고 달아 내린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눅 5:17-26, 마5:1-8)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시는 등등(마 8:5-17) 많은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마 11:24).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고 하셨습니다. 아는 사람이 알고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하나님의 진리는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알고, 아는 사람이 몰랐습니다. 하나님께 감추시면 알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셔야만, 계시해 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25절에 ‘나타내다’는 말과 와 27절의 ‘계시하다’는 말과 동일한 단어[ajpokaluvptw/아포칼립토]로 뜻은 ‘덮개를 제거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꺼풀을 벗기어 드러내어 알게 하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알게 하셔야 배웁니다.

일반적으로 배우는 자리를 ‘학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교의 교실 안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많은 부분은 실제의 생활에서 배워야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배워야 하고, 딸은 어머니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는 어른에게서 배워야 하고, 어른도 아이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배움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전혀 배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시면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이라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면 어린아이들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27)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알게 된 것은 은혜요 선물입니다(엡 2:8).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를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보따리는 일생을 통하여 풀어보아야 할 만큼 놀랍고 풍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배우는 것은 이미 주신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내게 주신 것을 확인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본래의 말뜻이기도 합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밖으로 이끌어 내’[education=e-(밖으로)+ducare, duco(꺼내다, 이끌어 내다)]는 것이 교육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이 무엇인지 선물 보따리를 풀어가는 것이 일생동안 배우는 과정입니다.

어떻게 선물보따리를 풀어가겠습니까? 어떻게 일생을 통하여 배워가겠습니까?

28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8a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예수님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삶의 무게를 멍에처럼 메고 살아가는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수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습니다.

2. 자신을 알아야 배울 수 있습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진정으로 필요를 느끼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팔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것은 지겨운 일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여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더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이 수고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쉼을 갈망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고통을 아는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하나님께서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것을 주셨는지를 진지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여기에서 배움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언제나 정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오! 주님, 저에게 당신이 필요합니다. 주여 나를 이끄소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에게 절망함으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이 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배움이 자신을 아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다시, 28절 말씀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오라’[deu'ro/듀로]는 말은 ‘여기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그곳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로 온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29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9a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오라고 하신 것은 자신의 멍에를 함께 메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 짐을 지고 피곤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멍에를 지라니 이러면서도 쉼을 얻게 하시겠다니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여기에서 멍에는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하여 말이나 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입니다. 이 멍에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에 사람들은 멍에라는 말에 중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하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거운 짐까지 덧씌워 버리시면서 쉬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 당시 멍에는 소 한 마리에 메우기 위하여 만든 구부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소 두 마리에 함께 메일 수 있는 일자형의 긴 막대기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멍에를 멘다는 것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와서 함께 있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이유 중에 하나도 ‘자기와 함께 있게’(막 3:14)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방법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에게 배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제가 사는 집은 아파트 9층입니다. 그리고 같은 아파트 같은 통로 7층에 부부 집사님이 사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곳에 산지 벌써 두 달이 지나도록 한 번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파트 마당이나 길에서 마주친 적도 한 번도 없습니다. 왜 일까요? 아파트의 다른 동에 사시는 권사님은 아파트 단지에서 자주 만나는데, 그것도 아주 이른 새벽에 만나는데, 같은 동 같은 통로에 살면서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집사님 부부가 일부러 저를 피해서 다니거나 제가 일부러 피해 다니기 때문일까요? 단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삶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 나라의 어린이이기 때문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사업상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십니다. 그러니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옆 동에 사시는 권사님을 새벽에 만나게 되는 것도 저와 그 권사님이 일어나는 시간이 똑 같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방향으로 출근하면 자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스타일이 같아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스타일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스타일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위기는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배당에 다니고 있지만 삶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자신을 이끌어주신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께 배우기를 원한다면 자신과 함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삶의 스타일을 함께 하여야 합니다. 함께 있으면서 다른 행동을 한다면 아무리 함께 있어도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계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배워야할 삶의 스타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다시 29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9a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배워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4. 예수님의 성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과정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예수님과 같은 시간에 출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닮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오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하여 선교사를 모집하던 때의 일입니다. 
신청자를 대상으로 어느 추운 겨울 날 새벽 3시 경에 시험이 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지망생들이 그 추운 날 새벽에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아침 8시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8시가 되어 시험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시험문제는 2X2는 무엇인가라는 문제 한 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이 시험에 응시한 많은 선교사 지망생들이 “새벽 3시까지 오라고 하고는 8시까지 5시간을 기다리게 하더니 결국 이런 유치한 문제를 주고 풀라니 우리를 무엇으로 보는 거야?”하며 돌아갔습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단지 두 명만이 자리에 끝까지 남아 한심한 시험지에 답을 쓰고 합격되어 선교지로 파송되었습니다.
왜 이런 이상한 시험을 치르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세 가지를 테스트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추운 날 새벽시간에 나올 수 있는 열심이 있는가를 보기 위하여 새벽에 시험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추운 날 새벽 3시부터 8시까지 불평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력이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다섯 시간을 끌었습니다. 셋째는 겸손을 보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어린아이도 맞출 수 있는 문제에 자존심이 상하여 돌아갔다면 그는 선교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정으로 사랑하며 살기 위하여 일생동안 밟아야 하는 과정은 바로 겸손입니다. 잘난 척하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드러나는 겸손은 어떤 모습일까요?

- 오늘도 살아있음을, 호흡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 
- 언제나 마음이 따스하여 대하기 편한 사람 
- 만날 때마다 먼저 즐겁게 인사를 하는 사람 
- 조그마한 호의에도 고맙다고 인사할 줄 아는 사람 
- 틈날 때마다 책을 읽는 사람 
- 잘못 걸려온 전화에도 친절한 사람 
- 얼굴에서 훈훈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람 
- 잘못한 걸 알면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는 사람 
-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도 목에 힘주지 않는 사람 
- 때로는 손해를 보고도 생색내거나 소문내지 않는 사람 
- 늙어도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깨끗한 사람 
- 비싼 옷이 아니어도 늘 단정한 사람 
- 어느 자리에서나 맡은 일에 열중하는 사람 
- 남에게 말한 대로 자기도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 
- 한 포기의 들풀, 한 송이의 야생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 차를 운전하면서 양보 받았을 때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 
- 돈 주고 사먹지만 종업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 
   
이런 일을 힘써 지키려고 하다보면 예수님이 어느덧 마음에 와 계시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마음에 와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함께 계신 예수님을 의식하고 살아감으로 자신에게서 그 분의 성품이 우러나오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는 과정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29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9b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사람의 마음은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에게 주는 복은 쉼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안식을 예수님을 배움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5. 예수님께 안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서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소 두 마리가 함께 한 멍에를 멘다면 힘이 없는 소는 힘이 있는 소의 덕을 볼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힘이 약한 소는 힘이 있는 소와 멍에를 같이 메고 힘을 제대로 쓰지 않고 그냥 따라만 다녀도 될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양쪽에서 아빠와 엄마가 손을 잡고 가면 가운데 아이는 힘을 들이지 않고 걷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예수님을 닮음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내 생애 마지막 한 달 :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한 30일’이라는 제목의 영적 성장을 위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 달을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달 후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시간만큼 더 많은 날들을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한 달을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인생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결국 삶을 진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열정은 우리가 살아야 할 태도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야 할 내용입니다.
배움은 우리가 살아야 할 과정입니다.
열정으로 사랑하기를 배우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