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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사 4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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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사 43:14~21)


待臨節 두 번째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희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막연하게 내일은 좋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 희망, 궁극적인 희망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얼마 전, 북한당국이 100:1로 전격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지금 북한 군부는, 주민들의 소요에 대비해 전투준비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 아침 신문에, 선글라스 아래로 굵은 눈물 줄기를 쏟아내며 흐느끼는 탈북 여성의 얼굴 사진이 크게 실린 적이 있습니다. 흐르는 눈물이 얼마가 되었기에, 턱에 방울이 되어 맺혔겠습니까? 그런 눈물이, 어디 그 탈북여성뿐이겠습니까? 

제 안에 이런 질문이 일어납니다. 북한주민들에게, 도대체 희망은 무엇일까? 누가 그들의 희망일까? 김정일이, 아직도 그들의 희망인가? 이미, 김정일을 버리고 다른 희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궁금합니다.

우리에게는, 希望이 있으십니까? 그 희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그저 막연하게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시는 것인지요? 정권이 두 번 정도만 더 바뀌면, 그 때쯤이면, 희망을 말해도 좋은 때가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희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主로 삼아, 거룩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希望)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 3, 15-16상). 

본문 이사야 43장 말씀, 대림절을 지키고 있는 우리에게,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사는 자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본문 18, 19절 말씀 보십시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 18-19). 

1.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어떻습니까? 나는, 以前 일을 기억하며 오늘을 사는 자이십니까? 옛날 일을 늘 생각하며 오늘을 사는 자이십니까? 혹 그런 분들이 계시는지요? 혹이 라도 나의 믿음생활의 뿌리가, 以前 일을 기억하고, 옛날 일을 생각하며 사는 데 있다면, 오늘 이후부터는 그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성경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시는 대로 기울어져가던 남 왕국 유다의 패망을 예언하면서, 대각성과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바벨론에 패망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끝까지 듣지 않습니다. 거역하다가, 결국 바벨론에 패망합니다. 그 내용이, 이사야 1-39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로, 영원한 종말을 맞이하고 맙니까? 그렇지가 않지요. 선지자는 또 무슨 말씀을 선포합니까? 하나님의 위로,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사야 40-66장까지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서를 크게 보면,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39장까지)는 회개치 않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징계 예언입니다. 반면, 후반부 40-66장까지는, 패망한 유다 백성들을 향한 希望宣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유의해서 읽어보면, 전반부에서 강조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은, 후반부(사40-66)에서 강조되고 있는 하나님의 용서, 구원, 위로를 가져다주는 놀라운 淨潔의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크신 恩寵이요, 攝理지요. 

저자 미상인 시편 119편의 시인의 고백을 보십시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法(말씀, 율법, 토라)이 내게는 千千 金銀보다 좋으니이다”(시 119, 71-72).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런데,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날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고난의 때만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을 때, 가져야 하는 信仰의 基本技이지요. 以前 일을 記憶하지 말고,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아이구, 그 때가 좋았는데. 그 때,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좋았을까? 그 때가 그립다” 하지 말라는 겁니다. 가슴 깊이, 마음에 새겨두십시다.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문제를, 지금의 어려움을, 상황과 현실을, 과거로 투영시키면 안 됩니다. 그것은, 믿음 없음입니다. 하나님께 불신앙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조금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전에, 사고로 병상에 계신 어느 교우 심방을 다녀온 적 있습니다. 얼마나 반가워하는 지요! 목사와 대화하면서 말마다 “예, 예”하십니다. 사고당한 것, 경제적 손실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건강할 때, 사고 당하지 않았을 때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어찌 되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 집사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는 고백이 있었습니다(눈물…). 사고 때문에 본 손해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면서 사업하면서, 세상적인 유혹, 친구들 가까이 하던 삶을 뉘우치시더라고요(진정한 회개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앞으로 하나님 더 가까이 하면서, 잘 살겠노라 다짐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패망의 자리에 처하게 될 유다 백성들에게, 구원과 위로를 선포하시면서, 무엇을 하지 말라 하셨습니까? “너희는, 以前 일을 기억하지 말라.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그 이전 일, 옛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요? 그들의 조상들이, 그 옛날 이집트에서 430년간 노예생활 하던 삶에서, 모세와 함께 탈출한 일, 이집트 군대로부터추격당할 때,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일, 이집트 병거와 말과 그 탄 者를 바다에 던지신 하나님, 그것을 더 이상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홍해를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래, 한 번 보십시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者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그가 바로의 兵車와 그의 軍隊를 바다에 던지시니, 最高의 指揮官들이 紅海에 잠겼고,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출 15, 1-18).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아닙니까? 어찌, 그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그 옛날 이집트에서 구원, 홍해에서의 구원)는 것입니다. “옛날 일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억도 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어떻게 믿음생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과거의 영광 자랑할 것 아니지요. 과거의 충성, 헌신 자랑할 것 아니지요. 우리 기독교 신앙은, 과거 지향적이지 않습니다. 과거 종속적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미래지향적입니다.

먼 훗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훼파되어 무너져버린 솔로몬 성전을 재건축할 때(스룹바벨성전, 제2성전),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 말씀이 있지요. “이 聖殿의 나중 榮光이, 以前 榮光보다 크리라(솔로몬성전, 제1성전).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 9).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왜, 이전 일을 기억하거나, 옛날 일을 생각하면 안 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우리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대림절의 신앙이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 19말씀 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시선을 과거로 돌리면 안 됩니다. 

과거의 영광과 부와 명예를 기억하거나 추억하지 말아야 합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 보십시오. 패망의 늪으로 내리닫던 유다 백성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이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탄식합니다. 탄식하던 그가 깨닫습니다.

자기 파수하는 곳에 서며, 城樓에 서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 지, 기다립니다.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주어집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極에 달해 있을 때가 아닙니까? 그러나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義人은(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 4). 

하나님의 미래를 바라보는 자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탄식하던 하박국 선지자가 완전히 바뀌어, 확고한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비록 無花果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葡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橄欖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羊이 없으며, 외양間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主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 17-19). 이런 믿음의 자리에 서는 일이 가능이나 한 일입니까?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입니다.

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은, 溫故知新과는 본질적으로 궤를 달리합니다. 왜 입니까? 믿음의 기준은, 과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 푯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한 것 아닙니까? 

두 눈을 부릅뜨고,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이 백성’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보면, 이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 하다가 끝내 바벨론제국에 참담하게 패망해버릴 유다백성들을 말합니다(미래시제이지만). 

우리 역사에 비하면, 풍전등화와 같았던 舊韓末에, 주신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패망의 기운이 감돌던 그 시대, 1905년과 1910년을 거치면서, 결국 20C중반 1945년까지 나라 잃고,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19C 舊韓末에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셨다면, 어찌 말이나 되는 말씀입니까? 이해나 되는 말씀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어찌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이해가 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의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역사적인 실제상황입니다. 

20세기 신학의 이정표를 놓은 독일 신학자 J. Moltmann이 1964년도에, 불후의 명작,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희망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입니다. 그 분은 곧 부활하신 하나님이십니다(십자사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곧 부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재림) 약속하신 하나님, 아니십니까? 주님의 다시 오심(재림, 파루시아 παουσία)이, 인류역사와 인간의 궁극적인 희망, 참 희망이라는 겁니다. 

몰트만은, 1943년 영국 공군이, 고향 함부르크를 공습했을 때 자기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4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 때, 그의 인생에 중대한 질문이 던져지지요.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누구이십니까?”

그런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다가, 1945년에 벨기에 포로수용소에 투옥됩니다. 전쟁에 참여하면서,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문명과 군사력이, 아우슈비츠 유대인 대학살을 통해서 무너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게 된 거지요. 전쟁포로로 있을 때, 美國人 軍牧이 그의 손에 들려준 성경책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앞에서 산산조각 나 버린 인간의 희망, 전쟁의 허망함, 절망에 빠져 있던 몰트만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참 希望을 발견한 겁니다. 그것이, 희망의 신학의 출발입니다. 절망과 고난의 한복판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 希望을 발견했고,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거지요.

내 인생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누구이십니까? 내 인생의 노래는, 무엇입니까? 以前 일, 옛날 일,이십니까? 과거의 영광이 아무리 소중하고 아름답다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집트에서의 해방, 紅海에서의 구원이 아무리 위대하고, 놀랍다하지만, 새 일을 행하시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미래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單純한 時間的인 未來가 希望이 아닙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미래가 희망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依賴하는 믿음의 사람 되십시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바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아멘.

대림절 둘째주일을 지키며, 다시 오실 하나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待望합니다. 오늘의 내 삶, 환경, 이 시대의 불의함, 어두움, 희망 없음의, 참 希望이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主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되심을 믿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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