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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련함과 슬기로움의 차이 (눅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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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함과 슬기로움의 차이 (눅 25:1~13) 
 

본문의 내용인 열 처녀의 비유는 주님께서 재림할 때에 재림을 맞는 성도들의 신앙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 사람의 처녀들이 신랑을 맞기 위해 등불 들고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오늘날 성도들도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롭다고 했습니다. 
즉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도 어떤 이는 슬기롭고 어떤 이는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것과 슬기로운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1. 준비의 차이입니다. 

어떤 은행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경찰이 출동하자 강도는 은행 직원 한 사람을 인질로 잡고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경찰이 원하는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다급하게 하는 말이 “총알을 달라” 였습니다. 
은행 강도 하겠다는 사람이 총은 가졌으나 총알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강도는 체포되었습니다. 

준비하면 지혜로운 것이고 준비하지 않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옛말에 “양병십년 용병일일(養兵十年 用兵一日)’이란 말이 있습니다. 
병사를 키우는 데는 10년이 걸리지만 병사를 사용하는 데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루를 쓰기 위하여 10년을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하루를 쓰기 위한 10년의 준비는 헛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주님의 재림을 맞는 하루를 쓰기 위하여 평생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다섯은 준비하고 다섯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만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준비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우리의 자세는 집에서 편안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물어보면 다 천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생활에 있어서는 여전히 세상 것에 너무 집착하고 의미없는 것들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와서 보시고 칭찬할 수 있도록 충직한 일군들이 되는 것이 준비하는 것입니다. 

2. 믿음에 대한 이해의 차이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온다는 소리가 날 때 자신들의 등에 불이 꺼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처녀들에게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들이 인정머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기름이 모자라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은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름은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필요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남편에게 주고 싶어도, 자식에게 주고 싶어도 믿음은 나눌 수가 없습니다.
피는 나눌 수 있고 살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기 이식 수술이 가능한 것입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 받아서 살기도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나눌 수 없습니다. 자기 믿음으로 자기만 구원받습니다. 다른 이의 믿음을 나눠 받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3. 평안의 차이입니다. 

본문에 보면 기다리다가 신랑이 더디 옴으로 “다 졸며 잘새..” 라고 하였습니다. 졸며 잤다는 것은 신랑이 더디옴과 기다리는 자들의 피곤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들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미련한 처녀들은 위장된 평안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잠은 멸망을 위한 잠이었습니다. 차라리 다 잠들었을 지라도 남 잠자는 그 시간에 기름을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거짓된 평안을 참 평안으로 느꼈습니다.

신랑을 맞을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평안이 아니라 불안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도 위장된 평안에 속는 미련한 처녀들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살전 5:3절에 보면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평안을 말하는 자는 사단입니다. 사단에게 속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13절에서 “단호히 외침니다. ”깨어 있으라“ 라고 말입니다. 

추운지방에 사는 에스키모인들은 늑대를 잡기 위해 날카로운 칼날에 짐승의 피를 묻힌 후에 그것을 얼린다고 합니다. 칼날에 피가 얼어 붙으면 그 위에 다시 짐승의 피를 묻히고 다시 그것을 얼리는 데 이것을 반복하여 나중에는 칼날이 얼어붙은 피 속에 숨겨지게 됩니다. 

이것을 늑대가 많이 다니는 길목에 칼날이 위로 오게하여 묻어 두면 늑대가 피 냄새를 맡고 와서 얼어있는 피를 혀로 핥기 시작합니다. 계속 핥으면 그 속에 칼날이 나타나지만 늑대의 혀는 이미 차가운 얼음에 감각이 없어져서 자기의 혀가 갈라져 피가 흐르는 것을 모른채 계속 핥습니다. 드디어 늑대는 피를 많이 흘리고 쓰러질 때까지 자기의 피를 마시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조금 잔인한 방법 같지만 이렇게 해서 에스키모인들은 늑대를 잡습니다. 
이것은 죄에 빠진 사람이 이제는 감각이 없어져서 스스로 멸망으로 가는 것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사실입니다. 위장된 평화에 속지 맙시다.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평안은 위장된 평안입니다. 

4. 기회 활용의 차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처녀들에게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랑이 온 후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꺼저 가는 등불에 기름을 넣기 위해 기름 파는 곳으로 갔지만 그 동안에 신랑은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처녀들은 기름 준비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준비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병에 따로 기름을 준비해 온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라도 가서 준비했어야 했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졸며 잠들 정도로 많은 시간이 주어졌건만 그들은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아무 대책도 없이 졸며 보냈습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형식이나 외식이 통합니다. 겉으로 거룩한 척 해도 통할 수 있습니다. 제 믿음이 최고라고 주장해도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는 믿음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기름 없는 등에는 불이 꺼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이 꺼진 다음 더 이상 기회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회개해도 부르짖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회'를 우리에게 우연히 찾아와 우리 삶을 크게 전진시켜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문이 열려지거나, 좋은 여건이 형성되어 한 몫 잡는 것과 같은 기회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브라우닝 웨어 목사님은 "우리의 최악의 환경이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기회일 수 있다"라고 썼습니다. J. B. 필립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역경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역경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람니다. 주어진 기회도 활용하지 못하면 미련한 처녀입니다. 지금이 기회이고 은혜 받을 때입니다.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고 문이 열려있는 동안 자기 등에 기름이 담겨 있는지를 점검하십시오.

캐나다의 한 청년이 어느 날 카드 놀이를 하다가 몹시 다투던 끝에 그만 이성을 잃고 권총으로 상대편을 쏴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청년을 사랑하던 친척들과 친구들이 진정서를 준비하게 되었으며 이웃의 많은 사람들도 거기에 서명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진정서가 주지사에게 전달되었으며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주지사는 진정서를 보고 아까운 청년을 사면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써서 주머니에 넣은 채 성경책을 손에 들고 형무소에 찾아갔습니다. 주지사가 형무소 감방으로 가까이 갔을 때 청년은 주지사인줄 모르고 성경책을 들고 오는 그를 교회의 목사로 알았는지 벌떡 일어나 철책 문으로 다가오며 “여기 오지 마시오! 보기도 싫소. 당신 같은 사람을 벌써 일곱 번이나 만났소” 라고 소리쳤습니다. 

주지사는 다가가서 “내가 젊은이를 위해 아주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이 있는데…” 라고 말을 하려하자 청년이 말을 막으며 “듣기 싫소! 당장 돌아가시오. 그런 소리 듣기싫단 말이요” 라고 소리쳤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주지사는 복잡한 얼굴 표정을 한 채 돌아서서 나왔습니다. 결국 사면장은 효력을 발생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청년은 땅을 치며 통곡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기회는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초대되는 구원의 기회 말입니다. 고후 6:2절에 보면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점점 그 날이 닫혀지고 있습니다. 구원의 기회가 있을 때 믿음의 줄을 잡아야 합니다. 그게 슬기롭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미련함과 지혜로움의 차이는 

① 준비의 차이입니다. 
주님 맞을 준비 못하면 미련한 것입니다. 
② 믿음에 대한 이해의 차이입니다. 
남의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중요합니다. 

③ 평안의 차이입니다. 
마귀가 주는 거짓되고 위장된 평안에 속지 마십시오.
④ 기회활용의 차이입니다. 
지금이 바로 지혜로운 처녀가 될 수있는 기회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는 깨어있는 성도의 지혜로운 움을 갖출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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