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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 다윗 (삼하 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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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다윗 (삼하 3:6~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하니라”(삼하3;6-39)

사람들은 왕(王)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人生)은 일생(一生)이기도 하기에, 한번 뿐인 인생을 왕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물론 거지나, 왕이나 다 소중한 생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같이 천하보다 귀한 삶입니다. 그러나 영향력이 다르지요. 삶의 질이 다릅니다. 그래서 내가, 또 내 자녀가 왕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은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던 왕(王)입니다. 그는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다”라고 스스로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약하다고 합니다.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하니라”(삼하3;39) 다윗의 이 고백을 중심으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울도 왕(王)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사무엘을 시켜 그를 왕으로 삼았지요. 왕이 된 그는 자기의 왕국(王國)을 바라보면서 매우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과 손자 대대로 왕의 자리를 이어가게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 노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인 다윗’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는 것이 자기 왕국을 유지하고, 자기 자식들이 대대로 왕의 자리를 이어받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집니다. 사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울의 문제는 ‘자리’를 권력(勸力)으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왕국’에는 관심이 없었고 ‘自己 王國’을 세우는 것에만 집착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여호와에 의해서 왕이 되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왕권’이 주는 매력에만 사로잡혀 ‘권력을 위한 권력’을 향해 달려가다가  자기와 집안을 망하게 한 대표적인 사람으로, 실패한 왕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이맘때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기관들이 총회를 준비합니다. 각기 오랬동안 준비를 하고, 물밑작업도 벌여서 협상이나, 협박.., 피 튀기는 살벌한 권력싸움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청년회 총회에서는 그렇지 않겠지요?  왜?  권력이라고 생각을 안 해서? 그러나 자리는 자리 맞습니다. 한 번도 못해본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럼 권력이 작아서?  세상 자리와 비교하면 별거 아닌 귀찮은 자리라서? 그러나 여러분, 세상자리는 휘두르는 자리요, 댓가를 주고서 라도 취하려는 자리이지만...  교회의 자리는 福받는 자리입니다. 福이 굴러오는 자리가 교회의 자리입니다. 아멘?

다윗은 사울과 다릅니다. “내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다” 는 본문의 그의 말은  왕의 자리에 대한 그가 가진 ‘정체성’과 ‘자기인식’을 보여 줍니다. 그냥 “나는 왕이다”가 아니라 “나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의 왕권이 ‘여호와의 기름부음’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말입니다. 

여호와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목자의 자리에 앉은 자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방나라의 왕들처럼, 또 앞에서 자기 왕국을 세우려고 집요하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처럼 세속적인 권력욕이 아니라, 여호와의 왕국, 곧 ‘신정 왕국’을 생각하는 말을 합니다. 이런 다윗왕의 고백은 이제 목사인 나에게, 또 지금 2010년의 각 기관  총회를 앞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왕(王)의 자리에 대한 바른 정체성을 가진 다윗의 이어지는 다음 고백을 볼까요.  “내가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그는 우리 생각과는 다른 말을 합니다.  그의 말은 왕으로서는 정말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왕이 이미지, 왕의 체면을 사정없이 깍아 내리는 고백입니다. 그가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초대왕인 사울이 죽은 후에 베냐민지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은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았고, 다윗은 유다지파 중심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삼하3;1절을 보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고 했습니다. 이때 사울 왕가의 군대장관은 아브넬이라는 사람입니다.  

아브넬이 어떤 사람인지 봅시다.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8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삼하3;7,8)  

사울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이 사울왕의 첩과 통간을 합니다. 음란한 사람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왕의 여자를 유혹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무조건 죽을죄 입니다. 그래서 왕인 이스보셋이 그 사실을 지적하고 꾸짓습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입니다.  신하요 부하인 아브넬이 ‘내가 사울의 집에 은혜를 베풀었다. 나 때문에 사울 집이 산다’ 식으로 도리어 큰 소리를 칩니다.  

신하의 권력이 왕을 넘어선 경우입니다. 그런데다가  점입가경(갈수록 태산)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삼하3;9,10) 왕의 여자와 통간한 신하 아브넬이 이제는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다윗에게로 가겠다는 미친 소리를 공공연히 왕의 앞에서 합니다.  

또한 이스보셋은 아무 말 못합니다. 그는 힘없는 왕입니다. 실제로 아브넬은 공공연히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18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17,18) 여러분, 여러분이 보기에 이 아브넬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권력지향주의적인 사람입니다.  

배신으로 새로운 권력을 얻으려는 사람, 배신으로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서 창업공신으로 자리 잡아 대대로 권력을 누리려는 그런 기회주의적인, 양심도 도덕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요?   장로들을 불러 하는 말 만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이제 알았나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무시하였고, 오히려 가장 반대편에서 이제까지 싸워온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하여 새로운 권력에 접근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무시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 집안의 군장이요 실권자인 ‘아브넬’이 자기 주인인 이스보셋 왕을 배반하면서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드리겠다고 접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보셋에게 아브넬이 있다면 다윗에게는 요압이 있습니다. 요압도 다윗을 무시합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온 요압이 아브넬의 정보를 듣고서 왕인 다윗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말을 쏟아 냅니다.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25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26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삼하3;24-26)  

다윗왕에게 ‘어찌하심이니이까’하고 책망을 하고, 왕이 뭘 모른다고, 왕이 속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왕 앞에서 나와서 이스보셋을 쫒아가서 데려옵니다. 죽여버립니다.  여러분, 왕과 신하가 있으면 누가 말하고 누가 들어야 합니까? 나라의 정책을 왕이 결정해야 합니까? 신하가 결정해야 합니까?  요압은 듣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들어가 할 말 다하고.. 자기 맘대로 나옵니다. 

그리고 아브넬을 죽여, 자기 동생을 죽인 복수를 합니다.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이 독단적으로 왕인 다윗도 모르게 명령을 내려, 전에 자기 동생을 죽인 ‘아브넬’을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압은 어떤 사람인가요? 요압장군은 이스라엘의 통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요압은 나라의 2인자요, 기둥이지만 단지 동생의 복수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통일 이스라엘의 새로운 권력자로 자기와 자리다툼을 할 아브넬을 동생의 일을 핑계로 미리 죽여 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도여러분,  이 일은 어찌 생각해 보면 정말 좋은 일입니다.  삼하4;1절에 보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헤브론에서 죽었다함을 듣고 손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고 적었습니다. 아브넬은 사울집안의 군대장관이요 실권자입니다. 전쟁 중인 상대방의 가장 큰 대장이 죽은 것이니 그렇지 않아도 이기고 있는 전쟁인데,  이제 승부는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넬의 죽음에 이스보셋의 손맥이 풀렸을 정도면 말 다한 것이지요. 요압을 칭찬해도 모자랄 일 같습니다.  전쟁은 이제 끝입니다. 통일이 눈앞입니다. 어쩌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일 수 있지요.  자기가 명령하지 않아도 요압이 알아서 아브넬을 죽이고, 통일왕국의 창업공신이라는 부담스러운 정치적인 큰 권력을 미리 제거해 버린 그런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말은 전혀 의외입니다.   “내가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마음이 달라서, 목적이 달라서입니다.  다윗은  이 일로 이스라엘이 자연스럽게 통일 될 기회가 깨어지고, 다윗은 백성들에게서 아브넬의 죽음을 배후조종한 인물로 낙인찍혀.. 통일을 하여도 민족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신정왕국자체가 무산될 큰 위기를 만났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물론 군사적으로는 사울의 집안 보다 다윗의 집안이 더 강하므로 무력에 의한 통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진짜 바라는 것은 민족의 평화적인 화합입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그냥 나라가 아니라 여호와의 나라입니다. 자기가 그냥 왕이 아니라 선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왕국,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정 왕국이... 피 흘리는 강제적인 정복 전쟁이나, 정치적인 음모나 모략으로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여호와의 王國이 한사람의 사사로운 살인으로 깨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위기입니다.   지금  다윗은 政治를 信仰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 무산되고,  왕권에 대한 오해를 불러오고, 또 여호와의 목회가 무너질 절박한 순간에 처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어떻게 행동을 할까요?      

그의 행동은 이스보셋과 비교해 보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본문의 앞부분에서 이스보셋 왕은  신하인 아브넬에게서 모욕에 가까운 폭언을 들을 때, 그는 군대장관이자 실세인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대답치 못하니라”(삼하3;11)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경우를 당한 다윗은 다릅니다. 그는  ‘요압’이 자신 보다 힘이 강하여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을 하면서도 그를 두려워하며 잠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브넬의 억울한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요압의 범죄를 백성들 앞에서 분명히 드러냄으로 神政王國의 역사가 뒤틀릴 수 있는 큰 위기를 넘깁니다.  그는 상여를 따라가며 울고, 해가 질때까지 금식을 합니다. 또 요압을 저주합니다.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29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28,29절) 그는 진실 된 태도로 일관 합니다. 다 드러냅니다.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근심하여 정치적인 술수를 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릴 수 있도록 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고,  부하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과 약점조차도 백성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행동을 합니다. 
 
얼마 전에, 전에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을 만났을 때, 전에는 그 교회 집사였다가 이제는 목사인 나에게 그분은 아주 인상적인 목회적 충고(?)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목회를 물(水)에 비유하시면서, “물이 길을 묻는 것 봤냐. 그냥 위에서 아래로 순리대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가고, 힘이 약하면 억지로 뚫으려 하지 않고 한 방울 두 방울 고이고 모여서 그 장애물을 마침내 넘어 간다. 

목회를 물(水)처럼 해야 한다” 고 저에게 조언을 하셨습니다. 솔직히 그 말을 다 이해는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30년 경험의 목회 지혜를 다 이해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하지만 오늘의 다윗을 보면서 조금은 그 말을 알 듯도 합니다.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와 자기의 자손들이 왕의 자리에 계속 앉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갈라져서 통일되지 못하는 것이며, 여호와의 신정왕국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며,  백성의 목자로서의 사명의 실패가 두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순리(順理)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의 상황을 놓고 하나님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 지로다” 이 말은 체념(滯念)의 말이 아닙니다. 자기의 연약과 한계를 인정하는 말이고, 인생들의  주권자가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는 말이고,  역사의 주인이며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손길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확신하는 고백적인 기도입니다.   

이것은 또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린 양을 돌보는 현장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으며, 연약과 한계를 깨닫는 사람이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또한 이 기도는 주인을 찾는 종의 기도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양을 맡은 자가 드리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권력을 둘러싸고, 통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특히 다윗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와 같은 한 목자의 삶을 묵상하면서, 내가 오늘 본문의 다윗의 기도를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기도가 나 자신의 기도가 되기를 바라고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부럽습니까. ‘기름부음’받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삶의 현장에서의 자신의 약함과 한계도 솔직히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강력한 세력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에 돌려드리는 그런 기도.  그리고 세상을 권력과 권력의 구조,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의 구조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를 합니다.  전혀 다른 시야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총회를 앞둔 여러분, 또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권력과 이권에 접할 여러분...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허수아비지만 이스보셋같은 왕?    *새로운 권력을 찾는 아브넬 같은 기회주의자?    *사적인 복수에 사로잡혀 대의를 망치는 요압 같은 권력자?  여러분은 다양한 선택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원하는 길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나, 나나,  다윗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런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의 기도는 같은 길을 걸으려 하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과 같은 기도를 하고, 우리 모두가 다윗과 같은 목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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