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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고뇌 (사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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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고뇌 (사 7:13~14)


어떤 어린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하나님이 지으셨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물론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빠도 ?, 엄마도 ?,” “물론이지”, “그럼 나도 하나님이 ?”, “물론이지”, 그러자 아이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솜씨가 근래에 아주 좋아지셨어요.” 오늘 아이들이 이렇게 영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모든 것이 선합니다. 그래서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하고 대 만족을 표시하셨습니다. 아들을 낳아놓고 만족해하는 부모의 심정과 같습니다. 에덴동산은 온갖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낙원이었습니다. 파라다이스였습니다. 완벽한 동산이었습니다. 자연만물을 고상하게 그리고 조화 있고 질서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다 만드신 후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청춘 두 남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두 남녀가 사랑을 속삭입니다. 그것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선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매사가 선하시고 의로우십니다. 그곳 낙원은 불화와 갈등과 미움이 없습니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독이 없었습니다. 

그곳의 모습을 이사야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사자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사 11:8). 그곳이 천국이었고 낙원이었고 에던 동산의 모습입니다. 에덴동산은 그렇게 완벽한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천지창조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완벽한 세상 에덴동산을 하나님은 아담 부부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최상의 선물이었고 최상의 대우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조석으로 에덴동산에 오셨고 아담과 대화하시며 거닐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최상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특 대우하신 것입니다. 그랬으면 아담부부는 그 세상을 보존하고 지켰어야 합니다. 더 아름답게 가꾸고 보살피고 조성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담부부의 도리였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어긋난 의도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신 후 이 세상의 모습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선한 남녀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부터 했습니다. 그래서 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 먹는 일부터 하였습니다, 거기 에덴동산에도 유혹이 있었습니다. 뱀의 유혹입니다. 뱀의 유혹은 집요했습니다. 뱀은 인간의 허영을 그대로 이용했습니다. 

“그 열매를 따 먹으면 눈이 뜨여 하나님 같이 된다”고 유혹하였습니다. 아담 부부는 그 말에 넘어갔습니다. 인간에게는 이 허영된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도 사람은 이 마음 때문에 고민하고 실패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성공한다, 출세한다, 유명해진다 하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타락과 허영과 편법과 뇌물과 실패가 오는 것입니다. 

아담부부가 그 말에 넘어갔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 그 열매가 먹음직해서 먹은 것도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먹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해서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낙원이 마침내 실낙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부부가 참 서툰 짓을 했습니다. 아담 부부가 한국 사람 같았으면 선악과를 먹지 않고 먼저 뱀을 잡아 먹었을 것입니다. 아주 서툰 짓을 했습니다. 이 죄성이 참 신비하고 오묘한 것입니다. 그 낙원에도 죄성이 있었습니다. 

뱀이 인간을 유혹하여 이간하고 갈등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죄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훈련이 없어도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은 배우지 않아도 조금 크면 거짓말부터 합니다. 뺏고 감추는 것부터 행동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 세상에 부조화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사에는 매사가 뒤틀리게 되고 부조화와 갈등과 의심과 불만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담 부부는 부부관계도 소원해졌을 것입니다. 아담은 원치 않는 노동을 해야 하였고 하와도 원치 않는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여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뱀을 보면 증오심이 불탔을 것입니다. 아담은 가정에도 소원했을 것이고 아내에 대한 소원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설입니다만 아담이 돌아다니며 자신의 갈비뼈를 빼서 또 다른 하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담이 밤늦게 들어오면 하와가 어떤 여자와 지금까지 있었느냐고 다그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담은 무슨 소리냐 여자는 당신 뿐이잖느냐고 변명을 하였습니다. 아담이 잠이 들면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를 쿡쿡 질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담이 뭐 하는 거냐 하고 야단치면 하와는 “말시키지 말아요. 옆구리 갈비뼈를 세는 중이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의 한계입니다. 마침내 아담이 하와 몰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어 바람을 피우다 어느 날 들켰습니다. 하와가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바람에 아담이 혼이 나자 아담은 눈을 부라리며 “어디 두고 봐라 아직 갈비뼈는 얼마든지 있으니까“하고 중얼거렸다는 것입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완벽한 세상을 만들어 아담 부부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 부부는 그 세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낙원이 실낙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 세상에는 온갖 갈등과 불화와 탄식이 난무하는 세상에 되고 말았습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또 갈등하셨습니다. 남녀는 남녀대로 갈등을 했습니다. 자연은 자연대로 갈등을 했습니다. 세상은 세상대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 죄 만연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은 마침내 죄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부정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의 곁을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부정하고 뜻을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려고 하였습니다. 고로 이 세상은 마침내 허무로 가득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허무를 쫓고 헛된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나아갔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 좋은 환경, 좋은 조건, 좋은 하나님의 배려를 다 잊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을 방치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 심판이 제 1차 심판인 물의 심판인 노아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 물로 쓸어버리셨습니다. 40일간 이 땅에 비를 내리게 하셨습니다. 비는 하늘서만 내린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옆에서 물이 밀려오고 땅 속에서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입체적으로 물이 쏟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40일 만에 이 세상이 완전히 물로 뒤덮였습니다. 마침내 노아의 8가족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인간만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주인인 인간이 심판을 받으니까 나머지 피조물들도 같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연도 동식물도 인간이 타락하니까 연대책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도 자연도 동식물들도 함께 복을 받게 됩니다. 인간이 타락하니까 이 세상도 함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의 주역인데 주역이 타락하니까 모든 조역들도 함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먼저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의 근원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아야 이 세상이 복을 받게 되고 이 나라도 복을 받게 됩니다. 결국 내가 복을 받아야 이 세계인들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고 책임입니다. 노아홍수 이후 이 세상이 다 멸망하였습니다. 이 세상이 철저하게 심판을 받았습니다.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 8명만 구원받고 그 8명 가족으로 이 세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랬으면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새 세상도 또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지난날 물의 심판도 잊었습니다. 또 전과 같이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 무섭게 타락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모여 살면 죄성이 나타나 죄를 짓게 되고 탐욕과 살인이 일어납니다. 

타락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타락이 극에 달하게 되어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 세상에 경고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이 나타나 경고하고 타 이르고 심판을 경고하였지만 사람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타락하였는가 하면 소돔성의 사람들 중에 의인 열 명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그 세상이 얼마나 타락하였다는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중재에 나섰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또 심판하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지난번 노아의 때는 물로 심판하였지만 이번에는 불로 심판을 하였습니다. 본보기로 심판이 어떤 것인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소돔성에 유황불이 쏟아져 도성을 순식간에 불태워 버리셨습니다. 물보다 불이 훨씬 더 무섭다는 것 보여주셨습니다. 물은 쓸어버립니다, 그런데 불은 흔적도 근거도 없이 다 태워버리고 사라지게 합니다. 

노아의 심판 때에는 물이 입체적으로 쏟아져서 심판을 하였는데 소돔성도 유황불이 쏟아지는데 입체적으로 위에서 아래에서 옆에서 쏟아져 순식간에 도성을 삼켜 버렸습니다. 도망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영화를 보면 성이 불에 타는데 도망하던 어느 부인은 순간 다시 뒤로 돌아 집으로 뛰어가 금고문을 열고 패물들을 집어 들고 나오다가 옆 건물이 불에 타 넘어지는 바람에 덮쳐서 불속에 묻혀 버리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물 심판을 통해서 세상에 경고하셨는데 이번에는 불 심판을 통해서 후대인들에게 또 경고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하면 이렇게 된다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노아의 심판이 BC 2349년경에 있었고 소돔의 불 심판이 BC 1910년대에 있었는데 그때 심판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줄기차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타락하면 이렇게 심판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은 아니시지만 계속된 경고를 무시하면 결국 이렇게 심판받는다고 경고를 하십니다. 그래서 역사 공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후 이 세상은 또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후대인들은 그때 심판을 옛날이야기로만 치부하고 옛날에 있었던 동화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후대인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인줄은 모릅니다. 그래서 그 후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다시 경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회개하라, 소돔과 고모라를 회상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역사를 보면 그렇게 외치는 선지자들을 사람들이 핍박하고 박해하다가 마침내 그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개탄하십니다. 탄식하시고 통탄해 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헛된 길로 가는 자식을 보고 한탄하듯이 말입니다. 어느 노부부는 살인을 저지른 아들 앞에서 개탄하고 탄식하고 한탄을 합니다. 그 아들을 낳아 놓고 큰 기대를 했고 소망을 걸었고 그래서 자랑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아들이 마침내 살인을 하였습니다. 그 부모가 너무나 실망하고 개탄하고 탄식합니다. 그러다 “네 죄를 내가 대신 지겠다”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부부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만족해하시고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통탄할 일이 나타나고 탄식할 일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노부부의 심정처럼 하나님 마음이 참담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민하십니다. 고뇌하십니다.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습니다. 또 세상을 심판하시면 될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민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고뇌를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고뇌하시다가 하나님은 마침내 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십니다. 대신 예수를 세상에 보내 그를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입니다. 

예수 보내심 

지금부터 2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예수를 보내실 것을 처음 예고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장차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뜻의 의미는 이렇게 세상이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과 계획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계획의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에서 고난 받는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80년 전에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전에 에스더를 준비하셨습니다. 통일 이스라엘을 이루기 위해서 다윗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를 보내실 것을 700년 전에 준비하시고 예고하셔서 마침내 태어나게 하셔서 어느 날 십자가에서 제물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다. “그를 믿는 자는 곧 나를 믿는 것이다” “그를 본 자는 곧 나를 본 자요”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멸망이 곧 심판을 의미하고 그 심판은 곧 불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원래 심판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과 회복과 은총과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심판은 왜 있는가 하면 그것도 사랑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자식에게 매를 드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심판의 경고는 불로 심판하여 죽이겠다는 뜻이 아니고 그렇게 살면 심판받게 되니 정신을 차리라, 깨달으라는 경고입니다.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죽이지 않아도 너희 스스로가 재앙을 만나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심판은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예수께서 오시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오셔서 함께 하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마지막에는 독생자 아들을 보내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안달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으라고 애원하고 호소를 합니다. 그리하면 구원을 받고 복을 받으리라고 강조하십니다. 이제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 두 가지를 묵상하여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고뇌의 심정입니다. 타락된 세상을 또 심판하실 수 없어 마지막 카드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제물삼아야 하는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또 하나는 약속된 주님을 고대하는 일입니다. 대망하는 일입니다. 대강절은 약속하신 예수께서 오실 것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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