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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 거기서 나오라 (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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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거기서 나오라 (룻 1:1~5)


(1절)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 하였는데
(2절)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절)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 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지 십 년쯤에
(5절)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기는 아주 짧은 내용의 성경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탁월한 작품성에 감탄합니다. 독일의 그 유명한 작가 괴테(Johann Wolfgang Goethe)는 “가장 사랑스럽고 완전한 작품" 이라고 극찬 했습니다. 슈뢰더(A. Schroder)는 ”세상의 어느 작가도 이보다 아름다운 단편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룻기란 무대의 커튼을 열어젖히면 여기저기 곳곳에 쓰러져 있는 시신들을 발견합니다. 가장(家長)인 남편이 죽었습니다(3절). 두 아들이 다 죽었습니다(5절). 재산도 다 죽었습니다(룻1:21), 젊음, 건강도 다 죽었습니다(룻1:19), 꿈(Vision)도 죽었습니다(1절).

원래 이들은 베들레헴이란 동네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가장(家長) 엘리멜렉은 자기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나 모압이라는 곳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런데 믿고 따랐던 엘리멜렉이 한 순간 픽 쓰러지는 것입니다. 남아있는 아들을 의지하고 기대려 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도 차례차례로 쓰러집니다. 재산도 다 날아가고, 젊음과 건강도 날아가고, 이젠 모든 꿈도 다 접어야 하는 기막힌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Leader:인솔자)는 항상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방향(direction)이고, 둘째, 목적(purpose)이고, 셋째, 때(Time)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멜렉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부분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방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동체를 모압으로 이끌고 갑니다. 모압은 여리고성 맞은 편, 요단강 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곳은 평야지대, 초지가 풍부한 곳이었습니다(민32:1). 뿐만 아니라 그곳은 세상연락(世上宴樂)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민25;1). 하지만 이 땅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땅, 하나님을 거역하는 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롯의 두 딸이 아버지와 차례로 잠자리를 같이하여 낳은 자식들의 후손의 땅이기 때문입니다(창19:37-38). 둘째, 그곳으로 내려간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흉년을 피하여 잠시 머물다가 돌아올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완전히 주저 앉으려는 목적으로 내려 갔습니다(룻1:1,2,4). 목적이 잘못 되었습니다. 셋째, 때가 잘못되었습니다. 두 사이의 거리는 불과 70Km, 여기에 흉년이면 거기도 흉년입니다. 그러므로 흉년을 피해 살려고 갔는데 갈 때는 풍족했으나 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1:21, 눅15:13-14). 엘리멜렉은 때를 잘못 읽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엘리멜렉은 방향, 목적, 때를 읽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패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은 것이라곤 늙은 여인 나오미와 홀로된 두 자부 뿐이었습니다(3,5절). 그런데 이 나오미의 귀에 언 날 소문(所聞) 하나가 날아듭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소문이었습니다(룻1:6). 하나님이 일하시고, 역사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소문에 나오미는 민감하게 반응(反應)합니다(룻1:6).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생활을 청산(淸算)하고 그곳에서 돌아오려고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압과 베들레헴 사이에 이어져 있는 길에 들어섭니다.

길(way)이 있습니다. 룻기 1장은 ‘길(Way)' 이 모티브(Motive)입니다. 이 길은 모든 인생 앞에 놓여 진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 위에 계속하여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은 “돌아오라’는 소리였습니다(6,7,8,10,11,12,15(2회),16,21,22(2회)). 자세히 보니 무려 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보면 열 두 번의 소리 중 모압으로 ‘돌아오라’가 6번,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라’가 6번입니다. 똑 같은 소리가 6번씩 들립니다. 똑같은 ‘슈브’(turn back, return)' 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이 길 위에 사람들은 각각 다른 발자국을 남깁니다.
엘리멜렉(모압 ⇦ 베들레헴), 나오미(모압 ⊂ 베들레헴),
룻(모압 ⇨ 베들레헴), 오르바(모압 ⊃ 베들레헴)

이들의 발자국들이 각각 다른 것은 ‘돌아가라’는 소리를 나름대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돌아가라’를 ‘모압으로’ 해석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돌아가라’를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라’ 는 뜻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모압과 베들레헴은 서로 반대(反對)입니다. 모압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곳입니다. 결국은 나도 죽고, 내 가까운 사람도 죽이는 곳입니다. 반면 베들레헴은 떡집입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곳입니다. 축복을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모압이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며, 몸담게 만드는 곳입니다. 첫째, 종교다원주의(宗敎多元主義)라는 모압입니다. 둘째, 진화론(進化論)이라는 모압입니다. 셋째, 세속주의(世俗主義)라는 모압입니다. 이 현대판 모압의 특징은 현대인들로 하여금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롬1:28).

오늘 현대인들은 종교 다원주의, 진화론, 세속주의란 따뜻한 물에 자신의 몸을 푹 담그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개구리를 삶기 위해 물을 점점 데우는 냄비 속인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먼저,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 성경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행4:12). 둘째, 무신 진화론에 대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말합니다. 셋째, 세속주의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한다“ 고 말합니다(계21:27).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귀에도 ‘돌아오라’는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이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모압입니까, 베들레헴입니까? 어느 방향으로 발자취를 남기고 싶습니까?

등반가 오은선(1966년)씨가 있습니다. 그녀는 여성 산악인으로서는 세계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도전하는 산악인입니다. 그녀는 ‘살아 돌아오는 것이 최고의 등반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상에서 5분을 머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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