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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한신뢰의 신앙 (창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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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신뢰의 신앙 (창 24:1~9)


심리학에서 쓰는 말 중에<개인 공간(Personal-spac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그어놓은 나만의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을 흔히 거리라고 하여 말로 여러 가지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먼저, 밀접거리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연인의 관계처럼 서로 사랑하고 밀착된 아주 가까운 마음의 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뢰가 있습니다. 서로 믿어준다는 것이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고 참 평안이 있습니다. 이것을 밀접거리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개인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마음을 열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을 열지 않아서 한평생 같이 살지만 아직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입니다. 이 거리를 바로 개인거리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는 사교거리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부득불 많은 사람과 만나야 됩니다. 필요에 의해서 만나기도 하고, 사업상으로 만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만남이 다 전적으로 신뢰해서 만나는 만남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만나는 이것을 사교적 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공중거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허공에 떠도는 공간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간적으로는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마는 마음은 전혀 멀리 있습니다. 나는 뭐라 열심히 떠들고 있지만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딴청을 부리고 있습니다. 지금 가까운 공간에 모여서 제가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만 만약에 여러분의 생각은 다른 데로 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오늘은 무슨 설교를 하려나 하고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기는 하지만 정신은 딴 데로 가 있다면 이것을 공중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무슨 신뢰가 있겠습니까? 서로 따로 따로 노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각각 다르겠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가깝고도 먼 거리에서 서로 알아가고 서로 사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얼마의 거리를 두고 삽니까? 여러분의 개인공간을 어떻게 평가하며 살아가시느냐 하는 말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으며, 저 사람은 나를 얼마나 믿어 준다고 생각하며 사십니까? 사실 이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뢰성이라는 것입니다. 신뢰성이란 마음의 거리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내가 그를 온전히 믿으면 그도 나를 믿어줍니다. 반대로 그가 못 미더운 것은 내가 그를 못 미더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를 전심으로 사랑하면 그도 틀림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데서부터 사랑은 이루어집니다. 행복이란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고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랑과 믿음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면 믿어지잖아요. 그리고 믿어지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의가 있습니까? 만약에 믿음 없이도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자기사랑일 뿐입니다.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사랑이란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내가 그를 믿지 못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받아서 마음이 평안하겠습니까? 평안이 없는 것을 누가 사랑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세요.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것은 믿음 없이도 가능합니다. 동물은 신뢰성 없이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한 이 믿음이라는 것, 신뢰라는 것은 도대체 어느 정도여야 할까요? 
믿음을 말할 때 흔히 세 가지로 정리해서 말합니다. Three Totality라고 하는데 전적으로 수락하고, 전적으로 따르고,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 말처럼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면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이런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에 앞서서 내가 나를 얼마나 신뢰하느냐,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신뢰도는 얼마나 되느냐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한 나의 신뢰도는 얼마나 되는가도 궁금합니다. 
세계경제가 어려워지고 나라경제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가장 많이 듣는 용어가 신용평가, 신용등급, 신용지수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 국가 신용도에 따라서 자금을 빌려주기도 하고 회수하기도 하겠다는 것이요, 투자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이 국가신용등급이 좌우합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신용등급이 높지 못하면 아무리 우량기업이라도 결국엔 신용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국가신용등급은 무엇을 기준으로 매겨집니까? 크게 정치적인 요소와 경제적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정치적요소란 정치체제의 안정성과 정통성, 국가안보상 위험요인이 얼마나 되느냐를 보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경제적 요소란 소득수준, 경제성장률, 인플레이션, 공공채무 부담, 외채(크기와 만기구성), 외환보유고 수준, 대외채무 불이행 경험 등을 가지고 등급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개인적으로나 국가 적으로나 이 신용등급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입니다. 정치적으로 계속적으로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렇게 싸우고만 있는데 누가 국가신용등급을 높여주겠습니까? 힘을 모아서 신용도를 높여가야지 자꾸 싸우면 어쩌자는 건지 안타깝습니다. 문제는 신뢰입니다. 먼저 내부적으로 신뢰가 형성 되어야 서로 일도 맡기고 서로 도와주고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신뢰성회복이 먼저입니다.

자,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이야기인데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감격스러운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백세에 얻은 소중한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삭이라는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아들입니다. 이 아들이 커서 이제 장가를 보내야겠는데 문제는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이방 땅이라 그곳 이방족속 중에서 며느리를 맞이할 수가 없어서 자기 고향인 갈대아우르에 사람을 보내어서 며느리 감을 데리고오고자합니다. 그래서 한 늙은 종에게 그 막중한 사명을 주고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늙은 종을 보내면서 어떤 여자를 구해오라는 구체적이 조건이 없습니다. 또 늙은 종도 마찬가지입니다.“어떤 여자를 데리고 올까요? 키가 커야 될까요? 작아도 될까요? 인물은 어느 정도여야 할까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전혀 아무 조건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따지는 결혼의 조건 따위는 하나도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보통 중매를 할 때도 상대방의 조건을 보고 얼추 비슷한 조건이나 이정도면 잘 맞겠다 싶은 조건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라면 철저히 따지고 꼼꼼히 챙겨서도 신신당부를 하고 보낼만한 일인데 오늘 아브라함은 늙은 종에게 이런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런 마음입니다.‘나는 너를 믿는다. 가서 하나 데려 와라.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 이다.’이것뿐입니다. 그 종 역시 그러고 가서 그야말로 사진 한 장도 본 일이 없고 편지 한 장 본 일이 없는 리브가라고 하는 아리따운 여자를 데리고 와서 이삭의 결혼이 성사됩니다. 

이런 신뢰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종을 믿습니다. 종은 또 아브라함의 말을 믿습니다. 종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주인이 자기를 그 정도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묻지는 않아도 주인 아브라함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면으로는 나름대로 주인 아브라함의 신앙관이나 평소 철학 등을 이해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며 충성되고 진실하게 사명에 충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면으로는 하나님 앞에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중에 가정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본문 뒤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먼저는 분명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도해줄 줄로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평소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나 혹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늙은 종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뢰입니다. 이 믿음은 하루아침에 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흐르는 세월에 심어진 믿음입니다. 함께 하면서 축적되어 온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입니다. 언제 어떤 일로 팔려 왔는지 모르겠지만 노예는 노예 일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노예를 이 정도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 아닙니까? 하나 뿐인 아들의 인생이 달려 있는 혼사의 문제를“네가 알아서 해라.”할 정도라면 웬만한 신뢰로 되는 문제냐 이 말입니다. 이게 심어진 신뢰요, 축적된 신뢰라는 것입니다.

자, 팔려온 노예에 불과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집에 살면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믿음을 배웠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배웠습니다. 신앙적 가치관을 배웠습니다. 신앙적 판단력도 배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종이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통하여 주인 아브라함도“저 종은 충성되고, 내 마음을 잘 안다. 내 성향도 알고 내 취미도 알고 내 신앙까지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저 종을 믿는다.”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제까지 보아 온 그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의 판단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맞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의 인간관계가 이래야 되겠습니다.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 온 만큼 믿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함께한 만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피차가 노력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햇수가 쌓여갈수록 믿음이 나아져야합니다. 신앙의 연조는 쌓여 가는데 매일의 생활이 무미건조합니다. 도대체 신앙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믿음이 나아지는 건지 어떤지가 분간이 안 됩니다. 가끔씩‘저래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맡기시겠나..’싶은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양계장을 운영하는 한 여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교회출석은 열심이었으나 도무지 헌금을 드릴 줄 몰랐습니다. 하루는 담임목사님이 조용히 불러서 타일렀습니다.“우리가 가진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는 드릴 수 없지만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하고 말했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목사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네, 목사님 이제부터 주일에 낳은 달걀을 모두 십일조로 드리겠습니다.”그리고 그때부터 매주 수백 개의 달걀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점점 달걀의 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단 하나의 달걀도 가져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담임목사는 다시 성실한 십일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성도의 대답이“목사님, 우리 닭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때문에 주일은 알을 낳지 않습니다.”그러더랍니다. 신앙이란 해가 거듭될수록 나아져야지 자신의 불신앙과 믿음 없음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신뢰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믿었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다 도망가는 형편없는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전적으로 믿어주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족한 자기들을 무한 신뢰하며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던 것처럼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자들이 됩니다. 신뢰란 이런 것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아름다운 능력,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다는 것은 믿음을 세워나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심어야 됩니다. 그리고 믿음은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말한다고 되고 맹세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신뢰하고 또 믿고 신뢰하고 이것이 기본 능력이요, 기본 자산입니다. 무한신뢰의 신앙, 여기에 하나님의 맡기심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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