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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사람이 입어야 할 옷 (골 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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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람이 입어야 할 옷 (골 3:12~17)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입는 옷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3가지 문제를 이야기할 때, 의식주라고 하였다. 먹는 문제보다도, 자는 문제보다, 입는 문제를 앞세우고 있다. 그래서 ‘옷이 날개’라는 말도 있고, ‘못 입은 거지는, 얻어먹을 수도 없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입는 옷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다. 이왕이면 잘 입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파리에서 새로 생긴 패션이, 뉴욕이나 동경에 유행하기 전에, 먼저 서울에 유행한다고 한다. 요즘 미국이나 일본에서 살다가, 한국을 방문하러 오신 여성들이 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면, 어딘지 모르지만 촌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사는 여성들의 옷이, 더 멋있고 화려하고 비싸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로 새사람이 된 성도들은, 거룩하고 사랑스런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왜 옷을 입어야 하는가? 

(1) 옷은 신분을 상징한다.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군복을 입고 있으면 군인이다. 학생복을 입고 있으면 학생이다. 흰 가운을 입고 있으면, 대게 의사나 간호사다. 이처럼 옷은 신분을 짐작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민족이나 국적을 짐작하기도 한다. 

‘기모노’를 입고 있으면, 일본 사람일 것이고, 한복을 입고 있으면, 한국 사람이다. ‘치파오’를 입고 있으면, 중국 사람이다. 이처럼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드러낸다. 가끔 자기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옷으로 변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옷을 신분을 말해준다. 

(2) 옷은 품위를 보여준다. 입고 있는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나 품위, 교양,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교양이 넘친다. 그러나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옷, 또한 요란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경박하게 보인다. 

캐주얼 옷을 입으면, 가볍게 활동하고 싶고, 야한 옷을 입으면, 야해지고 싶다. 거룩한 옷을 입으면, 거룩하게 행동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더러운 옷을 입으면,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어지고, 깨끗한 옷을 입으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3) 옷은 몸을 보호해 준다. 그래서 중동 사람들은, 뜨거운 뙤약볕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몸에 천을 걸치고, 머리에는 터빈을 쓴다. 북국에 사는 에스키모 인은 추위에 견디기 위해, 털옷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털신을 신고 다닌다. 

공장에서 위험한 작업을 하는 사람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철모를 쓰고 작업복을 입는다. 그렇게 해야만 몸을 보호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서 몸에 걸쳤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이, 가죽으로 옷을 입히시고 보호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1. 신분에 합당한 옷을 입어라(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영관급 장교 대령에서 장군, 즉 별을 달게되면, 외모와 대우에 약100가지 정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우선 장군의 표시로, 별 계급장을 달게 된다. 모든 모자에, 금 월계수 나뭇잎 무늬가 새겨진다. 역시 금테가 둘린 정복과, 예복을 지급 받고, 태극무늬가 새겨진, 허리띠를 찬다. 

‘장군화’라는 자크가 달린 통 군화를 신는다. 대통령께서 직접 하사하신 ‘삼정도’라는 칼을 받는다. 허리에 차는 권총도, 무거운 Colt45구경(7연발)에서, 가벼운 리벌버 38구경(5연발) 권총으로 바뀐다. 대위급 전속부관(비서)이, 항상 수행한다. 지프차 외에도 2,000cc급의 승용차와 전용운전병이 생긴다. 

탑승하는 차량에는 항상 별 판이 달리고, 앉는 책상마다 별 판이 놓인다. 화장실이 달린 사무실을 이용하고, 항상 장군이 있는 곳에는, 깃발이 게양된다. 장군전용 이발소에 출입을 한다. 특별히 부대 행사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매 행사 때마다 군악대가 도열해 일성곡을 연주하게 된다. 

죽어서도 장군은 특별대접을 받는다. 대령의 국립묘지면적은 1평인데, 장군의 묘는 8평이다. 장군은 유해 매장이 허용되지만, 대령 이하 군인은 반드시 화장해, 유골만 묻게 되어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의 스타이며, 천국의 장군이 된, 성도들의 신분과 인격과 생활에도, 반드시 변화가 있다. 

(1) 칭호가 바뀐다. ① 하나님이 택하신 자 ② 거룩한 자 ③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이다. 이 3가지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용되던 표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고,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이며,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신 백성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내던 이 표현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에게 택함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택함 받은 존재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이 지구상의 인구가 69억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뽑힘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다.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천사들이 수종을 들게 되었다. 

(히1: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할 때, 우리는 죄로 인해, 몸과 마음과 영혼이 더러워진 상태였다. 이렇게 죄로 인해 더러워진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깨끗이 씻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요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거룩하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으니, 감사하시기 바란다. 

(2) 성품이 바뀐다. 
우리는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을 입고,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인격적인 옷은 무엇인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다. 

이런 인격의 덕목을 온전히 갖추고 계신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다. 주님이 입으셨던 그 옷이, 바로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이다. 왜냐하면 이 옷이야말로 우리 신분에 합당한 옷이기 때문이다. 긍휼은 고난에 처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과, 너그러운 마음을 의미한다. 

남을 업신여기고, 남을 무시하고, 남을 나보다 못하게 여긴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다. 남을 세워주고, 높이고, 존대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님의 성품이다. 자비는 성품자체가 부드럽고, 친절함을 말한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친절을 말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 다가오시는 분이다. 겸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하며, 온유는 회개하는 마음을 통한, 부드러운 마음 상태를 지칭한다. 오래 참음은 복수하지 않고,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한다. 

긍휼과 자비, 겸손과 용서, 오래 참음, 이 다섯 가지 무늬가 있는 옷을 입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옷이 벗겨지지 않도록, 허리띠를 단단히 매야 한다.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허리띠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허리띠를 매지 않으면, 수치를 당한다. 

우리가 아무리 오색 단풍 같은, 긍휼과 자비, 겸손과 용서와 오래 참음의 무늬가 있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도, 사랑의 띠로 묶지 않으면 안 된다. (14)을 보면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했다. 사랑 안에 이 모든 성품이 다 있다. 

2. 용서와 사랑의 옷을 입어라(13-14).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바울은 먼저, 소극적으로 용서하는 삶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용서하는 삶을 사셨다. 주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셨다. 그렇게 용서의 삶을 사신 주님이, 이제 우리에게 용서의 삶을 살도록 명령하신다. 그리고 적극적인 사랑의 삶을 살도록 권하신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영화 한 편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영화는 우리 일생의 기록영화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여주는데, 알려진 사실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고 있던 일들, 예를 들면 그가 어떤 생각을 했고, 또 무슨 동기로 행동을 했고, 그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가, 화면에 다 나타날지 모른다. 

지나친 상상이 아니라, (눅12:2-3)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르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필름을 보다가, 내 일생을 볼 차례가 오면, 떳떳하게 앉아 있을 수 있을까요? 그때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 ‘어떻게 하면 저 필름을 없애 버릴까?, 주님이 내 과오를 모르고 지나가시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고민하지 마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신다. (히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천국에서는 제 일생을 담은 필름을,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는 사람의 필름은, 천국에 없다. 

이렇게 우리 일생을 통해서 경험하는 일 가운데, 최대의 경험, 가장 놀라운 경험이 있다면, 주님께 용서받는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서,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 있다면 용서하는 일이다. 

실수는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이전의 잘못된 삶을 용서받았음은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전혀 실수가 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구원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이고, 거듭남도 분명한 사실이고, 죄를 용서받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통해, 실수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요한 웨슬레가 집회를 인도할 때, 어떤 장군이 회심하게 되었다. 요한 웨슬레는 그 장군이, 정말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회심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했다. 

“장군님은 하나님께서 장군님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십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면 장군님은,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들을, 정말 다 용서하셨나요? 장군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한 사람만 빼고 다 용서했다. 군대에서 함께 일하던, 이 친구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때 웨슬레는 이렇게 경고했다. 그렇다면 장군님에게는 2가지 일이 생긴다. (1) 앞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를 못한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할 수 없다. 왜냐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없다. 

(2) 장군님은 앞으로, 절대로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만,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용서와 사랑에 왜 명령이 필요한가? 우리의 감정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명령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저 사람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제발 그 인간만은 제외시켜 주십시오”라고 대답하기에,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을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랑을 결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충분히 있다. 

(롬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불순종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새사람이 되었다면,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 

3.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를 주장하라(15-17).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걱정하지 않는 자라는 별명(티테디오스)를 가졌다. 평강의 옷을 입었으면, 

(1) 하나의 몸이 된다(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라고 했다. 죄로 인하여 깨어진 부분에, 희생제물이 되어서, 하나 되게 만드셨다. 

따라서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한 몸으로 부르셔서,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과, 하나 됨을 의미한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은 하나로 묶어 주는 띠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는 위대한 힘이 사랑이다.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전혀 다른 사람과 하나 되게 하는 힘은 사랑뿐이다. 

(2) 감사한다(15下.)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다. 현대인이 상실한 감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 범죄 한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른다. 감사를 상실했기 때문이다(롬1:21). 

(딤후3:2) 말세가 되면 나타나는 현상들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해야 한다. “나는 구원받았다. 택함을 받았다.”라는 확신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온다. 

현재 나의 형편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장차 저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감을 믿으면, 감사할 수 있다. 우리는 돌아갈 하나님 나라와, 날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행복하다. 우리는 이러한 소망이 있기에, 믿고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3) 예배하는 자가 된다(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하였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각광받는 분야 중 하나는, 음악 치료라고 한다. 사람이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릴 때, 또 충격적인 일을 경험한 후, 정서가 불안정하고, 사회적응과 대인관계가 어려운 사람의 경우, 적절한 음악을 들으면, 상태가 호전된다고 한다.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를 때, 정신적 육체적 안정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 음악이 이렇다면 영적인 능력이 충만한 찬송이야말로,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찬송을 부르는 중에,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찾고, 몸과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을, 아마 대부분 성도님들은 체험하셨을 것이다. 

어디 찬송뿐인가? 기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정신과를 찾아가, 의사와 상담하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에 응어리져있는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서다. 이 응어리를 적절하게 표현되지 못하면, 분노와 스트레스와 무기력이 쌓여,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초래한다. 

하지만 신앙인은 그럴 염려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어두운 부분까지 솔직히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종 무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나왔지만, 기도한 후에, 얼마나 후련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어서게 됨을 경험하지 않는가? 

또 말씀을 들을 때,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얻게 되는가? 말씀을 통해, 우리의 혼돈된 가치관과 뒤바뀐 삶의 우선순위가, 바르게 정돈됨을 느끼게 되지 않는가? 이렇게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함께 하는 예배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영과 육이 아울러서, 건강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가 회복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예배를 의무나 짐으로 생각했던 분들이 있다면, 예배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은혜의 시간이요, 장소임을 생각하고, 예배의 자세를 새롭게 하시기를 바란다. 

예배에 임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좋은 예배가 좋은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예배를 만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예배에 참석해서 은혜 받기 위해,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기도로 준비하고 오신 분들이, 예배하는 교회는, 은혜가 넘친다. 

교회에 와서, 오늘 찬양대는 어떻다, 저렇다고 평가하는 자세로 예배하면, 은혜가 안 된다. 우리 목사 오늘 설교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 설교를 평가하던 자들이, 우리 목사님의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 교회와 제가 살게 하소서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신령한 예배요, 은혜 넘치는 예배가 된다. 

결론이다. 새사람으로 택함 받은 자가 입어야 할 옷은 무엇인가? 택함 받은 자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을 입어야 하며, 피차 용납하고 용서하는 삶이 되어야 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평강의 옷을 입으신 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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