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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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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 9:35~38)


<주님의 3대 사역: 교육, 전도, 치유봉사> 

본문은 예수께서 12제자를 전도자로 파송하기 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동안 주로 예수님 홀로 해 오셨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제자들을 파트너로 삼아 함께 동역하기 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12제자 전도 파송 바로 직전에 나온 말씀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12제자를 세상에 파송하시는 장면을 보도하기 전에 세 가지 중요한 설명을 미리 합니다. 첫째, 35절에서 그동안 예수님이 해 오셨던 공생애 사역을 요약합니다. 둘째, 36절에서 예수께서 이와 같은 공생애 사역을 해 오시면서 무리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시고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셋째, 37절과 38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서 큰 고통을 당하는 무리들을 추수할 밭으로 보시면서 이들을 돌보기 위해 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하십니다.

먼저 35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먼저 순회 전도자이셨습니다. 한 곳에서만 복음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며 활동하셨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오늘날처럼 항공기가 발달되었더라면 전 세계를 두루 다니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존 웨슬리가 말했던 것처럼 전 세계가 우리 주님의 교구였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은 딱 세 가지 영역으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 복음에 대해서 힘써 가르치신 '교육'이 주님의 으뜸 사역이었던 것이지요. 둘째,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을 힘써 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두 번째 사역은 '전도'였습니다. 셋째,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심신이 병든 자들을 두루 고쳐주셨습니다. 귀신 들린 자들도 고쳐주셨고, 심지어 죽은 자들도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세 번째 사역은 좁게 말하면 '치유'이고 넓게 말하면 모든 사람들을 섬기고 돌보는 '봉사'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3대 사역이 교육과 전도와 치유봉사인데, 우리 교회 역시 주님의 뒤를 따라서 이 3대 사역에 온 힘과 정성을 다 쏟아야 마땅하겠지요.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 

이렇게 우리 주님은 교육과 전도와 치유봉사의 활동을 하시면서 너무나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우리 주님 곁에는 항상 상처받고 병들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로 가득 했습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랐고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다 놀려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 곁으로 몰려드는 무리들을 볼 때마다 늘 마음이 아팠기에 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우리가 주변의 이웃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는 너무나 중요한 물음입니다. 대개는 이웃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만 하지 도움을 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기쁨을 얻고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기쁨을 주고 사랑을 하려고는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개는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이와 같이 아무런 애정이나 관심도 없이 이웃을 대하는 우리와는 달리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과도 같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부한 이나 가난한 이나, 권력을 가진 이나 가지지 못한 이나, 유명한 이나 무명한 이나 누구나 다 마음에 상처가 있고 고통이 있다고 보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갖가지 일로 고생하며 기진한 이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중동 아시아 지역을 여행해 보면 맨 앞쪽에 서서 양들을 끌고 가는 목자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양이라는 짐승은 짐승들 중에서 가장 연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목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시력이 약해서 10미터 앞쪽을 분간 못해서 절벽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고 이리나 늑대와 같은 맹수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잠시도 목자가 돌보지 않으면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연약한 짐승이 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대의 일반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시고 한없는 연민의 정으로 돌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변에 살고 있는 이웃은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의 도움과 돌봄과 섬김이 필요한 '목자 없는 양'으로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장영희 교수님의 유고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 보면 '나의 불가사리'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습니다. 간밤에 폭풍우로 밀려온 불가사리들이 새까맣게 백사장을 뒤덮고 있었을 때 열 살 정도 된 소년 하나가 불가사리를 하나하나씩 바다로 던지고 있었습니다. 해가 뜨면 불가사리들이 태양열에 그을려 죽게 될까 염려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이 광경을 지켜본 남자 어른이 비웃었습니다. "얘야, 이 해변을 봐라. 폭풍우로 밀려온 불가사리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많은데 네가 하는 일이 무슨 도움이 되겠니?" 소년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불가사리를 힘껏 바다에 계속해서 던지며 말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방금 바닷속으로 던진 저 불가사리에게만큼은 도움이 되겠지요." 

이 이야기를 통해 장영희 교수님은 '무더기'와 '하나'의 차이점을 일깨워줍니다. 무더기로 바닷가에 밀려온 불가사리 전체를 구해주지는 못했지만 그 소년이 구해준 하나 둘 불가사리들이 살아나 또 다른 '무더기 불가사리'가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장영희 교수님은 의사에게도 환자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가진 개인이 아닌, 수많은 '무더기 환자들' 중의 일부로 보일 수 있고, 교사에게도 학생 하나하나가 존귀한 개인 인격체가 아닌 무더기 학생들 중의 하나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꼬집습니다. 목사도 그렇지요. 교회가 커질수록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개개인의 아픔과 상처, 고민을 헤아리기 보다는 무슨 무슨 교회, 예컨대 '교회'라는 집합개념의 일부로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길 수 있는 따뜻한 마음과 따뜻한 눈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웃의 희로애락을 헤아리고 먼저 다가서고 도와주고 돌보고 섬겨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수할 일꾼으로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일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기진맥진하고 상처 받고 고통 받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주님 홀로 이 많은 이들을 돌보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주님은 우리가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주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37절과 3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고 치유하고 봉사해야 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을 '추수할 밭'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면서 추수할 곡식은 너무도 많은데 추수할 일꾼은 너무도 적다는 사실을 탄식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똑똑하고 지식이 많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르쳐주어야 할 사람은 너무도 많은데 가르칠 사람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탄식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동참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안정되고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다 영혼이 불안하고 참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주어 영생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가는 영혼들이 너무도 많은데 전도자와 선교사의 숫자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탄식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참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사람들이 다 건강하고 행복해보이지만 영혼이 병들고 불행한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가가 치유와 봉사를 아끼지 않고 돌보고 섬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과 돌봄과 섬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너무도 많은데 봉사자의 숫자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탄식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봉사를 실천하는 일에 적극 동참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주님의 탄식인 동시에 우리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참으로 많은데 쓸 만한 일꾼은 많지 않습니다. 나라에서도 국무총리나 장관을 뽑을 때 인물난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하마평에 오르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바로 그 자리에 정확하게 어울리는 일꾼은 흔치 않습니다. 저에게도 넥타이가 많지만 막상 그 많은 넥타이들 가운데 매고 싶은 것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대여섯 개의 넥타이들 가운데 하나씩 골라 돌아가며 맵니다. 옷도 그렇지요. 좋은 옷이 아무리 많더라도 정말 꼭 입고 싶은 옷은 몇 가지 안 됩니다. 

교회에서 세우는 일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은 많지만 교회일을 맡아서 교육하고 전도하고 치유봉사할 수 있는 준비된 일꾼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의 고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은혜와 감동을 받았고, 주님의 복음 전파를 받아들였고, 주님의 권능으로 치유와 봉사의 은혜를 경험한 이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추수밭에 나가 열심히 곡식을 거둘 수 있는 일꾼들은 흔치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고 탄식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적극적으로 기도까지 하고 있습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이 기도가 우리 교회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추수해야 할 밭이 너무 넓고 거두어들여야 할 곡식의 양도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추수꾼의 숫자는 너무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특히 젊은 층 일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단지 탄식만 하신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또 일꾼들을 불러 모아 일을 맡기신 것처럼 우리 역시 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며 치료하고 있을 때 어느 분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수녀님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사는 사람,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볼 때 시기심이 안 생기나요? 정말 이런 삶에 만족하세요?" 수녀님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여유가 없답니다."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의 도움과 돌봄과 섬김이 필요한 이웃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생명과 구원과 능력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열심히 도와주고 돌보고 섬겨서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치유 받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일을 위해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추수란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적시에 일꾼들이 밭에 나가 곡식을 거두어야지만 농사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의 마음도 다급합니다. 이미 추수할 곡식이 낫을 기다리며 밭이 희어졌습니다. 그러나 일꾼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급하게 더 많은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일꾼은 부족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좋은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힘써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우리를 일꾼으로 불러주실 때,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주소서!" 하고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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