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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히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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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히 7:1~3)


사람들은 누구나 다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사할 때마다 평화를 비는 내용의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로 만났을 때“안녕하셨습니까?”라고 하며, 헤어질 때도“안녕히 계십시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고 해어질 때“샬롬”이라고 하는데“평화”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약성경의 서신들을 쓸 때에, 서신의 첫머리나 끝을 맺을 때 항상“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지만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까? 두렌트(Durants)라는 사람이“역사의 교훈”이란 책에서 말하기를 인류의 역사란 전쟁의 계속이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문화가 기록된 이래 3,401년 동안 전쟁 없이 지나온 해는 불과 268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토록 평화를 염원하면서도 전쟁이 그칠 날 없는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며, 최초로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은 살렘 왕 멜기세덱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 멜기세덱을 들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서 7장 2절에“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보는 안목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페샤트(Peshat)로서 이는 문자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말씀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레마즈(Remaz)로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암시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영감을 주셔서 그 사람을 말씀으로 붙들어 그 사람을 쓰시려는 원대한 계획 속에 레마즈를 주십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수정교회를 지을 때 힘이 들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누가복음 9장 62절의“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평범한 말씀 같지만 이 말씀이 그 아름다운 성전을 이루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를 로버트 슐러 목사에게 임한 암시의 말씀 즉 레마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데레쉬(Derush)로서 신중히 검토한 후에 알아 낼 수 있는 신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가 필요합니다. 연구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 은혜가 성격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넷째, 소드(Sod)로서 비유적인 내면의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유로 심어 놓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기도하므로 영감을 얻어야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보는 안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감을 따는 것과 같다. 흔들면 떨어지는 감이 많이 있다. 성경을 읽기만 해도 은혜 되는 말씀이 많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는 감이 있다. 이런 감은 하나 하나 정성을 들여서 따야 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는 심혈을 기울여 한 구절 한 구절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성경을 보는 안목을 정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은 멜기세덱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그리스도를 나타내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공통점이 많은 멜기세덱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一.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9장 6절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기를“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누가복음 2장 14절에 천사들이 찬양하기를“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말씀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평안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니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를 얻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이 은혜로 우리들은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12절~16절,19절에 기록하시기를“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하셨습니다. 

참된 평화를 원하십니까? 참된 평안을 원하십니까?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구로 믿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고 순종하는 것은 평화를 얻어 누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모리무라라는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하면서 숙소를 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묵고 있는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다만 청소부 아줌마만 하루에 한 번씩 들어와서 청소를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큰 부자인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수심이 가득했고, 생활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리무라를 지켜본 청소부 아줌마는 그를 만날 때마다“내 마음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원하시면 나누어 드릴 수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여기던 모리무라는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 청소부에게 물었습니다.“당신은 청소부로 있으면서 그렇게 평화가 가득한 비결이 무엇입니까?”그는 말하기를“내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이 말 한마디에 그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미국 시카고에 스패포드(Spafford)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명한 변호사이며 대학교수였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네 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내와 네 딸이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1873년 11월 22일 여행 중 여객선 하브레호가 영국 선박 로천호와 충돌하여 승객 226명이 익사하는 대 참변이 발생했습니다. 네 딸은 모두 익사하고 아내만 겨우 생명을 구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사고 현장에 도착해 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습니다. 아내는 이 절망적인 슬픔 속에서도 남편의 손을 잡으며“여보, 딸들은 지금 천국에 있어요. 우리와 잠시 헤어져 있을 뿐이랍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이 말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비극의 바다에서 한편의 시를 지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던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이것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13장 가사입니다. 극한 슬픔을 만나 좌절의 늪을 헤맬 때 어디에서 위로를 받으며, 무엇으로부터 새 힘을 얻으며, 마음의 평화를 찾겠습니까? 궁극적 위로와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말씀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하셨습니다. 

세상 것과 같지 않은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평화가 우리들의 심령 속에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을 때 값없이 누구에게나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예수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평화가 이룩되었습니다. 사람을 농기구처럼 사고팔았던 노예제도가 성행하는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자 그 노예 제도가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사람을 차별하는 봉건제도가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복음이 전해졌을 때 이 땅위의 남존여비 사상이 사라졌습니다. 양반과 상민제도가 사라졌습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소망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평화, 둘째, 민주주의, 셋째, 자유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주어지지 않을 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근심과 걱정과 불만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러한 것으로 채워졌습니다. 

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의 삶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평화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이들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장 15절에“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밖에 나갈 때 언제나 신을 신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람은 미국의 리처드슨 선교사였습니다. 당시 자바 섬에는 식인종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부족들 간에는 싸움이 잦았습니다. 그들은 화해할 땐 늘 갓난아이 한 명을 상대편에게 바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평화의 아기”라고 불렀습니다. 리처드슨이 자바섬에서 생활한지 2년째 되던 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부족들의 분쟁은 점점 심해져 도무지 화해의 기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백인 부부가 갓난아기를 안고 싸움터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로 리처드슨 선교사 부부였습니다. 선교사는 자신들의 한 살 된 아이를 “평화의 아기”로 내놓으며 말했습니다. “제 아이를 평화의 제물로 바칩니다. 이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악습과 서로를 증오하는 부질없는 싸움을 중단하십시오.”두 추장은 선교사의 사랑에 눈물을 글썽이며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결국 자바 족들은 백인부부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식인의 악습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바섬은 굳게 닫혔던 복음의 문이 열렸고 평화의 섬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복음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발길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장 2절에“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하셨습니다. 

이사야서 6장 8절에 이사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그때 이사야는 말하기를“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우리 모두도 이처럼 평화의 복음에 대한 성령님의 감동에 민감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내가 머문 곳에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9절에 말씀하시기를“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가 곧 화평케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이탈리아의 성자 프란시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화는 저절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양보해야 합니다.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저야 합니다. 내가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기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9절에 말씀하시기를“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렘왕 즉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버리시므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평화가 이룩되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차별과 반목과 질시는 사라지고 화평이 이룩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우리들은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이 큰 은혜를 입은 우리들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내 자신이 평화의 사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서도 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화평이 만들어지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구원받은 성도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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